『三國志 魏書卷30辰韓伝』 비판

 

三國志 魏書卷30辰韓伝의 기록에 따르면,

"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行酒為行觴 "


그러나 위지의 기술은 위나라 사신이 고구려-위 전쟁 직후 서술한 기록이다. 따라서 3세기 후반의 기록이라 생각함이 옳다.

그 당시, 진한의 상황은 어떠했나? 

당시 신라의 기록을 보면, 첨해이사금 시대, 왜국과의 전쟁 이후 석우로 장군의 사망이 기록되어있다. 그 이후 신라의 기록은 매우 줄어든다. 

이 왜와 전쟁 패배 이후, 위나라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다. 그럼 신라 사람은 위나라 사신을 어떻게 대접해야 했을까? 


내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진한의 12개국은 전쟁 패배 이후, 신라의 반독립국들이다. 이들은 모두 진한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위나라의 도움을 얻기위해,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을 의미한다고 프로파간다을 한 것. 

또, 신라의 “三國志 魏書卷30辰韓 :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為邦,弓為弧,賊為寇,行酒為行觴”는 기록은

유리이사금 시대 “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 儒理 尼師今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기록에 나오는 이민자들의 영향일 것이다.

따라서, 당대 신라인들은 진(辰)이 진(秦)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이는 역사적 우연 + 중국주의 프로파간다의 합치물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