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서평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 한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자 -


욕망너머의 한국고대사를 지은 젊은역사학자모임은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소장 학자들이 주축이 돼 2015년 결성한 모임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에 퍼져있는 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을 공유했고, 이에따라 대학원 과정에 있거나 이제 막 박사학위를 취득한 젊은 연구자들이 뜻을 모아 활동을 시작했다. 이 책은 2017년 7월부터 9월까지 <한겨레21> 지면상에 연재한 글들을 뼈대로 삼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현대사 전공자의 글을 실었는데, 이는 사이비역사학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현대사의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해석에 있어서는 아쉬운 해석이 많이 보인다.1)

이 책은 총 11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고조선과 낙랑군에 관련해서 2파트, 고구려에 관해서 1파트, 백제에 관해서 2파트, 신라에 대해 2파트,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1파트, 발해사 1파트, 전반적 한국고대사에 대해 1파트, 현대사를 통한 비판에 1파트를 할애하고 있다.

고조선과 낙랑군에 대해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파트는 기경량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국사학전공 조교수가 쓴 글이다.

책에 따르면, 고조선에 대해서 실체를 갖춘 형태의 가장 오래된 관련 기록은 《관자》라는 책 이다. 책의 저자 관중은 기원전 8~7세기 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책이 실제 관중의 저술이 아니라 전국시대에 제나라에 모인 여러 학자가 관중의 이름을 빌려서 만든 책으로 짐작되며, 《관자》의 저술 시기는 대략 기원적 4세기 무렵으로 추정한다. 책에는 ‘무늬가 있는 가죽’을 특산물로 교역하는 짧은 기록이 존재한다. 또 전한대의 저술된 《염철론》에 따르면 연이 동호를 엄습해 달아나게 하고 천리의 땅을 개척했으며, 요동을 지나서 조선을 공격했다고 한다. 또 위촉오 삼국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삼국지 위략》에서는 주나라가 쇠약해져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할 당시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며 연나라와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고조선은 연나라 진개 장군에게 고조선의 서쪽 2000여리를 빼앗기고, 만번한이라는 곳을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실체를 갖춘 형태로 기록된 고조선에 대한 문헌은 매우 적고, 고조선이 존재했을 당시, 단군신화에 대해 기록된 서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은 13세기 말에 승려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와 1287년에 이승 휴가 저술한 《제왕운기》에 실려있을 뿐이다. 실제로 단군신화가 당대 고조선에서도 존재하던 신화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고조선의 실존은 기원전 4세기부터 확인되므로, 실존은 확실하다. 하지만, 고조선에서 단군신화를 믿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각 책에 따라 신화의 내용도 다르 므로, 이를 실제의 역사로 믿는 것은 어려운 해석이라고 느꼈다. 사람들은 한국사 최초의 국가라는 상징성 때문에 고조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지만, 실은 근대에 서구에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유입되며 고조선에 대한 강조 의식이 현대에 와서 생겨난 것이다. 책의 주장처럼, 현대인들의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보편적 역사로 고조선을 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이비 역사학계의 오래된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낙랑군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네 군중 하나다. 한사군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임둔군은 대략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 일대, 진번군은 황해도 일대, 현도군은 함경남도 함흥일대에 설치됐다가 나중에 랴오닝성 싱징(흥경)으로 옮겨 가고(제2현도군), 다시 랴오닝성 푸순(무순) 일대(제3현도군)으로 이동했다고 파악한다. 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평양 일대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사이비 역사학계에서는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일대라고 간주하는 것이 틀렸다고 본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재위 300~331)에게 공격을 받아 망한다. 평양 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으로 개편되지만, 당시 낙랑군을 이끌던 장통이라는 인물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낙랑인 일부를 이끌고 요서와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선비족의 수장 모용외(재위 285~333)에게 망명한다. 이 같은 내용은 중국 역사 서인 《자치통감》에 실려 있다. 이때 본거지를 떠난 이들을 새로운 땅에 정착시키며 과거에 살던 지역명을 계승해 사용하는데 이를 ‘교치’라고 한다. 교치는 중국 남북조 시대에 크게 성행한 현상이다. 서진 말 ‘영가의 난’을 계기로 중원 지역 한족들은 이민족에 쫓겨 남쪽 지역으로 대규모 이민을 한다. 이때가 중국의 5호16국 시대이다. 남쪽 지역으로 이민한 한족들은 근거지를 옮긴 이후에도 과거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중원 지역세어 사용하던 지역명을 계속 사용하려 했고, 이에 남조계 국가에서는 과거 북쪽에 있던 주군현의 이름을 그대로 딴 행정구역을 남쪽에 새롭게 설치한다. 이때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허구의 행정구역과 호적 편제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낙랑군도 유민들의 이동으로 ‘교치’가 발생했고, 요하에 설치된 낙랑군은 정치 격변에 따라 여러 차례 이동을 하다가 결국 소멸한다. 이러한 배경이 ‘교치’ 개념에 있지만, 사이비 역사학자들은 지식의 부재로 인해 교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요하에 낙랑 군이 존재한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또 이러한 해석의 심리적 배경에는 민족주의로 인해 야기된 식민지 콤플렉스가 있을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이동시키고 영토를 축소시키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왜곡을 막고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고구려에 대해서

세 번째 파트는 안정준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조교수가 쓴 글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그 당시 고구려의 역사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책에 따르면, 이 광개토왕비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데, 1880년 무렵 농경지 개간을 하던 한 농민이 광개토왕비를 발견해 현지의 청나라 관리에게 보고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1200여 년이 지나서야 비의 존재가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비에 대한 본격전이 연구를 시작한 건 일본이다. 1883년 일본군 중위 사코우 가게노부는 지안 지역에서 현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우연히 광개토왕비를 발견했다. 그는 광개토왕비의 전체 탁본을 구해서 일본에 반입시켰다. 이렇게 반입된 탁본들은 일본 연구자들 손에 들어갔고 이들은 탁본을 통해 광개토왕비문을 수년간 분석했다. 그리고 1889년에 비문 전체 판독문과 기초적인 연구 보고서가 작성돼 《회여록》이라는 학술지에 실린다. 일본 사학자들은 1880년대 당시 《일본서기》의 내용 을 근거로 해서 4세기 이래 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비롯해 백제-신라까지도 정치적 영향 력 아래에 두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교차 입증할 자료로 광개토왕비문의 문구를 예시로 든다. 당대 일본이 순수한 학술적인 동기만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것은 아니였으나, 해석 자체에 있어서 논리적 문제는 없었다. 이후로 일제 식민지 치하의 한국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가 해석을 달리 했으나, 개인적으로 내가 보기에 주어나 목적어 등을 억지로 집어 넣어 해석함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책에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억지 해석을 변호하는 논지로 서술되는 것으로 봐서, 현대시대까지도 민족주의의 암영은 존재 하는 것이 아닐지 의심이 든다. 이후 또다른 문제 제기로는 일제가 모사본을 뜰 때, 석회를 발라서 떠냈는데 이를 근거로 능비 조작설을 제기하지만, 실은 중국 지안에서 탁본 작업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하던 전문 탁본업자들이 석회를 바른 것이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지나 가던 군인인 사코우의 능력으로 신묘년조의 한문 문구를 일본 측 고대사 연구에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1883년 탁본이 일본에 처음 입수됐을 당시에 일본 내 역사학-한문학 등 관련 전문가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판독과 역주, 기초적 연구 결과를 내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그런데 과연 이를 급박하게 위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러한 능비 조작설은 당대 민족주의 광기의 전형이라고 본다. 진실의 추구보다는 주장자들의 정치적, 역사적 목적에 맞춰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경계해야 함을 느꼈다. 지금에 와서 이러한 조작설을 주장하거나 해석왜곡을 자행한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과연 반성하고 있을까? 또 이러한 주장에 침묵하거나 방조한 것도 엄연한 문제이다. 우리 시대에서도 이러한 왜곡된 해석이 진행되고 있지는 않는지 경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느꼈다.

백제에 대해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파트는 백길남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임동민 고려대학교 한국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가 쓴 글이다.

책에 따르면, 중국 기록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동진 다음의 송나라(420~479) 역사를 기록한 《송서》부터이다. 지금의 양쯔강 유역에 있던 송-제-양-진. 이렇게 4왕조와 백제는 교류하면서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남조의 자료에서 백제의 요서 진출 내용이 전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을 때, 백제 역시 요서를 차지하고 진평군현, 백제군과 같은 군현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에대해 민족주의적 역사관점에서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실재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백제가 남조에게 본인들의 전공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거짓 정보를 흘렸거나, 낙랑군민들의 이동과 연관있는 어떠한 해양세력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많고, 확실히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유추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또 한일 역사학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칠지도의 경우, 칠지도를 백제의 하사품으로 보거나, 동진에서 백제를 경유해 왜에 전해진 것으로 보는 ‘백제 경유 동진 하사 설’, 칠지도를 백제와 왜 사이의 외교적 상징물 내지 선물로 이해하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들 이 존재한다. 백제사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연구방향이 설정되어 왔고, 이는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진실된 양국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좋겠다.

신라에 대해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파트는 이성호 동국대학교 사학과 강사와 최경선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가 쓴 글이다.

본래 신라의 삼국통일은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한국의 조상들은 가지고 있었지만,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면서 김춘추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면한 ‘매국노’로서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친 것과 같으니 어찌 통일의 영웅이라 칭송하느냐”라고 평가하면서,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목소리가 강해진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은 신라 입장에서 모두 외세였으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아마도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삼국이 한 민족이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통일의 불안정성에는 아쉬움이 따르지만, 이를 완전히 부정적인 관점으로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삼국통일을 통한 긍정적 영향과 그 한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선이 필요함을 느꼈다. 또, 가끔 신라 왕조는 흉노의 후예라는 주장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정치적, 역사적 목적을 가진 의도된 거짓 프로파간다라고 느낀다. 신라 김씨 왕실과 관련된 소호 금천씨 기록 중 가장 빠른 것은 ‘김인문묘비’이다. 김인문(629~694)은 김춘추의 둘째 아들로 문무왕의 동생이다. 삼국간의 전쟁 시기, 당의 군사를 빌리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김춘추는 자기 아들들을 당나라에 보내 황제를 숙위하게 했다. 그는 694년에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인문묘비에는 소호와 금천이 나오는데 이는 소호 금천씨를 의미한다. 또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의 비에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최근의 연구에서는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를 한 핏줄로 만들기 위해 문무왕릉비에서 신라가 화관의 후손이 세운 나라임을 표방했다고 보았다. 즉 이는 당대의 정치적 목적의 역사 프로파간다로 이해함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본다. 또한 한국 민족을 그리고 김씨를 흉노와 연결 짓고자 하는 주장에는, 기마민족에 대한 선망과 민족주의적 그리고 혈통주의적 열망이 강하게 첨가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여덟 번쨰 파트는 위가야 성균관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쓴 글이다.

책에 따르면, 임나일본부설을 간단히 정리하면 4세기 중반에 왜의 야마토 정권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구를 설치해 200여 년간 한반도 남부를 직간접적으로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963년 북한의 학술지 《력사과학》에 김석형은 <삼한-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들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일본서기》에 한반도에서 있었다고 기록된 사건의 대부분은 한반도 여러 나라와 왜의 야마토 정권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기원전 수세기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이주민이 존재했고, 이들은 각기 한반도에 있는 본국에 대해 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국을 세워 살았다는 주장이다. 이후 여러 과정을 통해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양국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으로 공식 폐기되었고, 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지 않는다. 한국 사학계가 일본을 추종한다는 비방은 흑백론에 따른 근거없는 비방일 뿐이며, 가야사 연구에서 객관적인 사료적 가치가 높은 《일본서기》를 참고하는 것일 뿐이다.

발해사에 대해서

아홉 번째 파트는 권순홍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이 쓴 글이다.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의 옛 땅에 세운 나라이다. 926년 멸망할 때까지 200년을 넘는 기간동안 존재하면서, 스스로를 고려로 칭하기도 하였다. 반면,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발해를 부를 때, 멸시나 야만의 의미가 담긴 ‘말갈’을 붙여서 말갈발해 혹은 발해말갈로 비하한다. 이 때문에 발해가 고구려 유민의 나라인지, 말갈의 나라인지에 대해 오래도록 논란이 있어왔다. 중국측은 발해는 말갈의 나라이며, 당의 지방정부라는 입장이다. 당의 지방정부라는 주장은 당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관계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반박 가능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가 말갈의 국가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이 가능한가? 여러 기록에서 보이듯, 발해에서 말갈은 중요한 사회구성원으로서 기능했고, 이들이 국가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해는 동아시아의 한국, 중국의 공동의 역사라고 인식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의 발해 중국사화(中國史化)는 ‘동북공정’과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결부된 정치적 목적이 숨어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순수한 학술 연구의 목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연구를 경계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현대사를 통한 사이비 역사학 비판

아홉 번째 파트는 김대현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이 쓴 글이다.

책에 따르면, 위서 《환단고기》는 1968년 6월 잡지 《자유》 창간에서 시작된다. 이 잡지는 냉전 질서 속에서 북한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반공의 정신 무장을 앞세우기 위해 창간된 잡지이다. 이 잡지는 1967년부터 사이비 역사학의 색체를 띄게 되는데, 이들은 ‘민족사관’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활동하는데, 이는 반도에 국한된 사관을 개정하고, 대륙사관에 맞게 집필해야 하며, 한반도 내 한사군설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당대 군사정권의 공산주의에 전략에 대응하는 반공의 체계로서 빌붙은 것이다. 책에 따르면, 당대 박정희 정부의 주장에 부합됨을 주장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사이비들이 ‘민족사관’이라는 구호를 통해 당대 군사정부에 빌붙고 싶어했거나, 눈밖에 나지 않으려 했음은 확실하지만, 군사정부가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이는 글 작성자의 개인적 사견이 포함된 평가가 아닐까? 어쨌든 사이비 역사가들의 ‘민족사관’은 ‘반공-냉전사관’ 으로 당대 미소 대립 시대에 반공 이데올로기에 올라타 그들의 성공을 도모했다. 이들의 사이비 역사학은 당대 반공 이데올로기와, 성경의 “아부라함”, 남북통일 목적의 “민족통일”사상, 군사정권의 유산인 권위주의에 영합 등, 지난 반세기 동안의 한국사가 겪은 부정적인 면모들 의 집합체이다.

<환단고기>에는 정말로 군부독재의 유산이 숨겨져 있는가?

11번 파트에서 김대현 저자(연세대 사학과 박사과정)은 소위 '환빠'라고 불리는 사이비역사학과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군부독재 유산과의 만남이 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사이비 역사학의 이해와는 다르다.

나는 11파트에서 서술된 소위 '환빠'의 시초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는 일본 역사학계의 사정과도 연결해서 봐야 한다고 본다. 본래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당대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체주의적 행보를 지지하는 사상을 기반으로 역사학을 해석하고 있었으나, 1945년 패전 이후, 자국의 《일본서기》기록을 비판적으로 보거나, 연대를 120년 혹은 그 이상 늦춰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2) 동시에 일본의 패배주의적 역사관은 일본 야요이족의 기원에 대해 조선반도로 잡고,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족속이라고 가르치는 전후 역사관이 일본에서 탄생한다. 이 기류에 편승해서 일본의 재일한국인의 마이너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 일본 천황의 시조인 신무천황이 김수로왕의 후손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 자이니치들의 차별적인 지위에 분노했고, 이를 왜곡된 역사적 해석을 통해 자아만족을 이루고자 하는 왜곡된 욕망을 실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일과 관련자들의 태도는 당대 일본 사회의 재일한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오히려 더 키우기만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3)

일본의 마이너 역사계에서도 일본의 도래왕조의 유래를 중국 동북지역까지 확장하여 해석하는 역사적 해석이 존재했고4), 이것은 당대 일본의 반전주의적 기조와 전후 역사관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하던 역사적 해석이라 알고 있다. 이처럼 당대 일본 역사학계의 태도, 일본 마이너 역사계의 동북지역 중시 사관, 한국 내부 몇몇 집안의 설레발과 당대 한국정부의 반공산주의 & 민족주의 고조. 이러한 다양한 요인들의 복합작용으로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요인으로만 원인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1) 젊은역사학자모임, 『욕망너머의 한국고대사』, 서해문집, 2019, pp.4-7.

2) 젊은역사학자모임, 『욕망너머의 한국고대사』, 서해문집, 2019, pp.146-149.

3) “'고천원제'韓·日 공동행사,”<영남일보>, 2005. 4. 6, <https://m.yeongnam.com> (2:00, PM) 

4)“やまと,邪馬台国,卑弥呼,天皇,『渡来民族による激しい抗争』・・・日本人の源流を探る,”<Youtube>, 2020. 12. 6, <https://youtu.be/Fq6LXPmjWsE> (11:3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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