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진국과 마한, 진변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진국과 마한, 진변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기록:

기록에 따르면, 부여융의 묘지명에 백제진조인이라는 기록이 존재.

중국 사서에 목지국의 군주가 진왕을 칭했다.

변진한 24개국 중 12개국이 목지국의 진왕에게 조공을 하였다.

기록에서는 삼한이 모두 옛 진국이라거나 진한이 옛 진국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문화:

고고학 자료상 중부 이남지역은 진국에서 한이라는 명칭의 변동에 관계없이 세형동검문화 단계 아래의 주민과 문화가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진국에서 한으로의 명칭 변화가 진행되는 기원전2세기 말에서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철기문화가 급격히 확산되는 변화가 있었으나 삼한사회는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 단계의 주민과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04_0060_0010_0010 )


그러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진왕은 고조선 출신으로, 이는 마한이 고조선의 후예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위만의 재위 찬탈로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으로 교체된다.

기자조선의 전설은 신뢰하기 힘든 기록이지만, 스스로가 기자의 후손을 자청했다는 점에서 중국계 집단의 고조선 장악의 의심을 피하기는 어렵다. 

기자조선계의 집단은 피지배계층 맥족계 야만족, 그리고 지배층의 중국인 집단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백년의 세월로 야만족의 비율보다 중국계 집단의 비율이 기자조선 내에서 더 많아졌을 것이다.

이 중국인 다수의 기자조선 집단은, 위만조선으로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다수 남하해 이주, 거주하게 된다. 이들은 이후 진(辰)인들을 단순 야만인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만만히 보고, 이들 위에 군림하고자 진(辰)왕을 자처한다.

진이라는 집단은 본래 기자조선 집단이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조선 남쪽의 소집단들을 진이라는 통칭으로 부른 것일 것이다. 이는 진이 본래 7시~9시 방향을 가르키던 말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진은 평양에 존재하던 조선이 동북방향에서 남쪽방향까지 둘러싸고 있던 모든 종족의 범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자조선 이민족(진왕을 자처한 한족들)은 반도 남부의 마한54개국 변진한24개국 중에서 일부만이 이 한족계 이민 국가 였을 것이다. 

이는 변진한 24개국 중에서 12개국 만이 조공하고 있다고 기록된 점, 

246년 낙랑군이 본래 진한의 6개국은 낙랑의 국가라고 주장한 점, 

영산강 유역의 일본계 전방후원분 분포가 마한 54개국이라고 주장한 영역과 겹치는 점

백제의 성장 시대에, 이미 마한을 정벌했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실제 백제계 유물의 범위가 충청도 이남을 넘지 않았던 점

(삼국사기 기록의 백제가 마한을 정벌했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마한이라고 추정되는 반도 남부의 국가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중국 이민자계의 한족 마한인들은 모두 백제인들에게 정복되었고, 남은 국가들은 마한馬韓인들이 중국 후한인들이나 중국 위나라 사람들에게 저들은 모두 한족이다라고 거짓말한 실제 진한인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사실 중국 한나라의 한과 마한의 한이 사실상 발음이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사실 같은 민족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한족 집단은 진한에도 이민오는데, 이 1차 중국인 집단은 스스로를 한족으로 자칭했다.  그리고 2차 중국인 집단의 이민이 진한과 신라에 도달하는데, 이 2차 중국인 집단은 최씨낙랑국 전설에서 확인된다. 최씨 낙랑국인은, 스스로가 낙랑군에 습속을 선택한, 중국인 이민자 정치적으로 예속되면서도 독립된 형태의 소국 집단들 이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원정 공격으로 낙랑인들은 신라로 이민을 왔고, 이들은 기존의 중국인 성씨가 아니던 신라 6부에 통합되었을 것이다. 

(당시 사로국 내의 모든 중국인 이민자들의 국가 구성비율은 10%도 안되던 비율이었을 것이다.) 

(이는 중국계 성씨가 신라 중기를 넘어서야 등장하는 점과, 최지원과 같은 건국초기부터 활약했을 가문이 외국인 고용자들도 받던 고작 6두품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이 2차 중국인 이민집단은 스스로를 진에 융합되고자 발음이 비슷한 진인으로 칭한다. 따라서 진인은 반도 남부 내륙에 주로 분포하던 집단이다. 이는 신찬성씨록의 진씨가 백제로 부터 이민한 이민 집단이라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지속적인 중국인 이민집단을 유도하고, 프로파간다를 계속한 결과(+진계 민족 사이의 불화). 진한을 진한으로 변환시켰으며, 이는 문무왕비나, 대당고김씨부인묘지명으로 확인되는 중국계 이민집단의 국가 탈취를 거쳐, 당나라와의 우호가 채결된 7세기에 와서 완전한 중국화(Sinization)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존재하는 이, 최, 손, 정, 배, 설은 기존의 6부의 위치에 이민온 중국인들이 인구수 역전을 통해 빼앗은 지역이며, 당시 각 부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성씨 집단이 그 6부의 전통을 빼았아 소급적용한 결과이다. 이는 해당 6개의 중국 성씨가 신라 중기까지 등장하지 않는 사실, 서술된 순서가 최씨부터 서술되지 않고, 이씨 순으로 중국계 인구수가 많은 순서임과 합치한다. (신라에 4세기까지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러한 중국계에게 불리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본인들에게 편리하게 재해석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현재 전주이씨는 본인들이 백제인이라는 기록을 창조한다. (이는 영어 위키피디아 페이지에 설명되어 있다.)

현재 경주이씨는 일본어 위키에 박혁거세 조의 딸의 남편이라는 기록을 창조한다 (이는 일본어 위키피디아 페이지에 설명되어 있다.)

경주손씨는 일어 위키에 본인들이 박씨의 후손이라는 기록을 창조한다 (이는 일본어 위키피디아 페이지에 설명되어 있다.)

수원백씨는 명백히 중국에서 이민온 백씨의 후손이다. 하지만, 백제시대부터 있던 성씨임을 창작한다. (이는 한국 위키에 설명 from: 수원 백씨KR 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02. Retrieved 2022-05-02. )

이외의 성씨집단의 기원에 대한 글은 다음 기회에 작성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飲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 진(秦)나라 망명인인데,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했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진한(秦韓)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우두머리 혹은 군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에 적당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비단의 일종)를 짓는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는 예법이 있다. 보행하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는 풍속이 있다. 나라에 철(鐵)이 산출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무릇 재화를 교환할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그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금(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


예, 왜, 마한, 진한, 변한, 예맥, 낙랑, 조선 각 민족의 정체에 대한 글도 다음 기회에 작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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