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길에 얽힌 이야기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 기사)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 )2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 』라고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이 있다.』고 했다.

 죽죽: 여지도서에서 죽령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인물.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가 죽령길을 개척하고 순사하여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개 서쪽에 죽죽사라는 사당이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죽령 개척을 아달라 이사금 5년(서기 158년) 3월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죽령옛길은 소백산맥에 나란히 자리한 이곳 죽령과 문경새재, 추풍령을 일러 영남과 기호지방을 통하는 관문의 삼형제라면 그 중에 죽령은 바로 맡형격이다. 그연대, 그자리,그높이,그 구실이 단연 음뜸이기 때문이다.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룩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689m의 죽령이다.

죽령옛길은 신라 때 죽죽이 길을 개척하였다 하여 죽령이라 한다. 한때에는 신라와 고구려와의 국경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후로도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북쪽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 남쪽-신라 북쪽 국경선이었고, 이는 진흥왕 때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빼앗는다. 이 때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고야 말겠다"고 달려나갔다가 유시로 유명을 달리했을 만큼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 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원신라 영역(현 경상도) 상주와 원고구려 영역 명주, 삭주의 경계선이었다.

이후 김헌창이 세운 장안국의 판도에도 들어갔으나 김헌창의 장안국은 빨리 망해 이 중요한 지역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궁예의 태봉에게 이 중요한 지역이 넘어갔으며, 이후 고려에게 계승되어 신라가 고려 상대로 상당히 불리한 처지의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바 있다. 다만 이 일대가 고려가 후백제군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는 통로로 자주 활용된 게 신라에겐 불행 중 다행. 고구려가 과거 신라의 종주국이 되었을 때 주로 죽령을 통해 지원군을 보냈는데, 고려가 죽령을 장악하면서 비슷한 구도가 사백 년 만에 다시 성립된 것. 다만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 과정 중 후백제가 아주 잠깐 죽령을 장악한 일이 일어났는데, 경북의 다른 주요 요지는 고려에게 넘어갔고 후백제의 다른 북쪽 국경 일대가 꽤 남하한 상황이라 신라는 또 다시 위기를 벗어난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470년) 신라 진흥왕12년 왕이 거칠부등 여덟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 뒤인 영양왕1년(서기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이 왕께 자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 (삼국사기)으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평강공주의 남편인 고구려 장수 온달이 죽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기 590년경 온달이 "죽령 이북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출정했지만 장렬히 전사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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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죽죽(사로국), 죽령, 영남대로 참고

최영준 저, '영남대로' 참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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