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국(吳越國) 박암(朴巖) & 후사벌왕(後沙伐王) 박언창(朴彦昌)에 대한 의문(疑問)

오월국(吳越國) 박암(朴巖) & 후사벌왕(後沙伐王) 박언창(朴彦昌)에 대한  의문(疑問) 

- (자료 모음 및 분석)


잊혀진 왕국 "후사벌국과 박언창"

1. 개요 

박언창과 후사벌국 : 박언창(朴彦昌, 미상 - 929년)은 후삼국 시대때 신라의 제54대 군주인 경명왕의 5남이며, 후사벌국의 초대 국왕(917년 - 929년)이다. 

2. 박언창의 사벌주 부임 

경명왕 때에 그의 5번째 왕자인 박언창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져서 사벌주에 부임했다. 박언창의 임무는 사벌주를 초적및 태봉과 후백제의 마수에서 방어하는 것으로 그는 지금의 사벌면에 본영을 설치하고 병풍산성(屛風山城), 이부곡산성(吏部谷山城), 자산산성(子山山城: 일명 자양산성) 등을 축조, 제반군비를 강화하여 쳐들어오는 적과 대항했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아 신라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고립되어 버렸고 사벌주 안의 상황도 나쁘게만 돌아가 이전인 효공왕 8년인 904년에 사벌주의 30여 성(城)이 이미 후고구려에 침탈당했다. 

3. 사벌주의 "아자개 세력과 고령가야의 건국"으로 인한 고립  

사벌주 본군(本郡)의 바로 옆인 고령군(古寧郡)의 가야유민들이 고령가야를 세워 반기를 들었고 병풍산성에서는 아자개의 세력이 웅거하며 박언창을 괴롭히며 세력을 확장했다. 918년에 아자개는 고려에 귀부했다. 

4. 박언창의 後沙伐 건국 

919년에 박언창은 연락이 두절된 본국에서 자립해 후사벌왕(後沙伐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후사벌>이라 정한 후 사벌면 일대에 왕성(王城)을 만드는 등 수도로 정비한 뒤 둔진산(屯陣山)을 군사 주둔지로 수비의 완벽을 기했다. 

후사벌은 지속적으로 침략해 오는 후백제와 힘겹게 항쟁했다. 

929년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군이 대거 침공하자 후사벌은 격렬히 항쟁했지만 결국 패망하고 말았고, 이때에 박언창도 패사한 듯 하다. 

박언창은 패사 후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에 매장되었다.

5. 후사벌국의 패망 이후와 한계

후사벌의 멸망 후 박언창의 아들 박욱이 고려의 개국 공신이 되었고 그 후에 그 후손인 견(甄)을 중시조로 상주 박씨가 시작되었다.

a) 후사벌국

신라의 왕자 박언창이 왕명을 받아 상주 지역에 부임한 뒤 신라와의 연락이 끊어지자 신라가 망했다고 판단하고 왕을 선포해 만들어진 국가이다. 이도학 교수의 '진훤이라 불러다오'에서는 신라와 연결이 끊기자 살아남기 위해 사벌국[沙伐國]으로 독립을 하고 개국한지 11년 만에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후백제에 밀려 멸망하면서 박언창이 피살되자 왕족인 그의 아들 박욱은 고려로 망명했다. 

b) 실존했는가

물론 이러한 기록은 정사에는 한 줄도 안 나오고 박씨 족보상에만 나오고 있다는 점이 의심스럽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일제시대 때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사벌국왕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애매하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다 족보상으로 아들로 나오는 왕세자 박욱(朴昱)이 훗날 고려에 항복해서 개국공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고려의 공신으로 제대로 기록에 남은 사람은 박욱(朴郁)으로 경명왕의 첫째 아들로 밀양 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밀성대군 박언침의 아들이다. 물론 이 박언침이라는 인물 자체도 족보 상에만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이다.  

상주 박씨 계보에서 기록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사람으로 최초로 나오는 인물이 박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박양유(朴良柔)다. 박양유는 경종에 묘졍에 배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 박양유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사벌국이 존재했었다면 고려사에 기록이 안 되어 있을리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또 상주시 사벌면에 박언창이 묻혔다고 하는 사벌왕릉 역시 후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벌면 일대에 왕성(王城)을 만드는 등 수도로 정비한 뒤 둔진산(屯陣山)을 군사 주둔지로 삼았다고도 하는데 왕성을 만들었는데 현재까지 아무런 유적이 없다는 점도 의심스럽다. 

후사벌이 위치했다고 하는 곳도 당시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가 일어난 곳인데 후사벌에 대한 기록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때문에 후사벌은 실존이 의문시되는 나라다.  

첨언하자면 설령 후사벌이란 나라가 있었거나 당시 사벌주 지역에 후사벌과 비슷한 세력/나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후백제나 고려(후고구려, 태봉, 마진), 후기 신라 후신라 이 3개 나라에 견줄만한 세력이 크지 않고 왕봉규 및 구가야 세력들이 세운 고령가야처럼 당시 여러 지방에 수없이 할거해 있던 독자적 호족 세력과 크게 별반 차이가 없는 정도였기에 후사국 시대라고 굳이 칭하진 않는다.

ps) 글로벌 이코노믹 기사 발췌

신라말기인 889년 진성여왕 3년에 사벌주에서 원종·애노(元宗·哀奴)가 처음으로 대규모 농민항쟁을 일으켰다. 이 농민반란은 나중에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신라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군웅의 할거를 거쳐 후삼국시대가 열리는 단초가 되었다.  

경명왕 때에 그의 5번째 왕자인 박언창(朴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져서 사벌주에 부임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고 본국과의 교류가 단절되자 917년에 사벌국을 선포하고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처음에는 왕을 선포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924년에 승하한 뒤 자신이나 형 대신 아버지의 동생이 왕이 되자 이에 반발해 독립을 선포했다는 추측도 있다. 

후사벌은 929년에 후백제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박언창도 이때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언창의 아들 박욱(朴昱)은 고려에 귀부하면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왕조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그후에 그 후손인 견(甄)을 중시조로 상주 박씨가 시작되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光濟叟 ]

光濟叟

同光年, 高麗行人至, 副使者春部少卿上柱國朴嵓叟, 文雅如中朝賢士. 旣行, 吏掃除其館舍, 得餘燭半梃, 其末紅印篆文曰, 「光濟叟」叟蓋以命燭也.

淸異錄 卷下 > < 說郛 卷一百二十 下 >

朴嵓 ]

○燭[附燭臺發燭][주] 

……淸異錄, 同光年, 高麗行人至, 副使者春部少卿上柱國朴嵓, 文雅如中朝賢士. 旣行, 吏掃除其館舍, 得餘燭半梃, 其末紅印篆文曰, 「光濟叟」叟蓋以命燭也.

[주]四庫全書 本, 浙江大學에는 名類가 기재되어 있다.

格致鏡原 卷五十(日用器物類二) >


[ 미상 ]

始封
高麗之先, 蓋周武王箕子胥餘於朝鮮, 寔子姓也. 歷周秦, 至漢高祖十二年, 燕人衛滿亡命. 聚黨椎結, 服役蠻夷, 浸有朝鮮之地而王之. 自子姓有國八百餘年, 而爲衛氏, 衛氏有國八十餘年. 先是, 夫餘王得河神之女, 爲日所照, 感孕而卵生. 旣長善射, 俗稱善射爲‘朱蒙’, 因以名之. 夫餘人, 以其生異, 謂之不祥, 請除之. 朱蒙懼逃焉, 遇大水無梁, 勢不能渡. 因持弓擊水而呪之, 魚鱉竝浮, 因乘以濟. 至紇升骨城而居, 自號曰‘高句驪’, 因以‘高’爲氏, 而以高麗爲國. 凡有五部, 曰消奴部, 曰絶奴部, 曰順奴部, 曰灌奴部, 曰桂婁部. 漢武帝滅朝鮮, 以高麗爲縣, 屬元菟郡, 其君長賜之鼓吹伎人. 常從郡受朝服衣幘, 縣令主其名籍. 後稍驕, 不復詣郡, 於東界築小城, 歲時受之, 因名‘幘溝漊’. ‘溝漊’者, 高麗名城也. 於是始稱王焉. 王莽發其兵, 以誅匈奴. 不至, 降王爲侯. 而麗人益寇邊, 光武中興, 罷遣邊吏. 建武八年, 遣使來朝. 因復王號, 列爲外藩. 安帝以後, 部衆滋熾, 雖少鈔暴, 旋卽賓服. 初消奴爲王, 旣衰, 而桂婁伐之, 至王. 生而開目能視, 國人惡之. 及長壯勇, 和帝時, 頻掠遼東. 傳至王伯固, 伯固死, 有二子. 長曰拔奇者, 不肖. 次曰伊夷模, 國人立焉. 漢末, 公孫康擊破伊夷模於其國九都山下, 國人共立其子位宮. 位宮亦有勇力, 好鞍馬. 以其祖, 生而能視, 今王亦然. 句驪謂相似爲‘位’, 故名曰‘位宮’. 魏將毌丘儉屠之, 追至肅今上御名, 刻石紀功而還. 位宮五世孫, 晉永嘉中, 與遼西鮮卑慕容廆鄰, 不能制. 康帝建元初, , 帥師伐之大敗, 後爲百濟所滅, 其後慕容寶, 以其王高安平州牧. , 義熙中, 遣長史孫翼, 獻赭白馬, 以爲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 七世孫, 隋文帝時, 率靺鞨寇遼東. 唐太宗時, 其東部大人蓋蘇文, 賊虐不道, 帝親征之, 威震遼海. 高宗又命李勣, 往平之. 俘其王高藏, 裂地而爲郡縣, 建安東都護府於平壤城, 以兵鎭守. 後武后遣將, 擊殺其王乞昆羽, 而立其王乞仲象. 亦病死, 仲象祚榮立. 因有其衆四十萬, 據于挹婁, 臣于唐. 中宗時, 乃置忽汗州, 以祚榮都督渤海郡王, 其後, 遂號渤海. 初之俘也, 其酋長有劍牟岑者. 立外孫爲王, 又命高偘討平之. 都護府旣屢遷, 舊城頗入新羅, 遺民散奔突厥靺鞨. 高氏旣絶, 久而稍復, 至唐末遂王其國. 後唐同光元年, 遣使來朝, 國王姓氏, 史失不載. 長興二年, 王建權知國事, 遣使入貢, 遂受爵以有國云.

책봉의 연원[始封]
고려의 선조는 주(周) 무왕(武王)이 조선(朝鮮) 제후에 책봉한 기자(箕子)인데, 서여(胥餘)이고, 성은 자(子)이다. 주(周)·진(秦)을 거쳐 한(漢) 고조(高祖) 12년(BC 195)에 이르러서 연(燕)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해 왔다. 무리를 모아 상투[椎結]를 틀고 와서 주변 오랑캐를 복속시키며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기자[子姓]가 나라를 다스린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 되었고, 위씨가 나라를 다스린 것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이 비치어 감응하여 임신하고는 알[卵]을 낳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였기 때문에 주몽이라 이름 붙였다. 부여 사람들이 그의 탄생이 특이했기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은 두려워서 도망가다가 큰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활로 물을 치며 주문(呪文)을 외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그것들을 타고 건널 수가 있었다.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살면서 스스로 그곳을 ‘고구려(高句驪)’라 불렀다. 그 때문에 ‘고(高)’로 성씨를 삼았으며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라고 불렀다.
한 무제(漢 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玄菟郡)에 소속시켜,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 옷과 모자[衣幘]를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을 맡아보았다. 뒤에는 점점 교만해져서 다시는 군(郡)에 나아가지 않으니, 동쪽 경계에 조그만 성을 쌓고 해마다 받아가게 하면서 그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불렀다. ‘구루(溝漊)’는 고구려에서 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왕’을 호칭하였다. 왕망(王莽)은 고구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匈奴)를 토벌하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출병하지 않자 왕을 낮추어 후(侯)로 삼았다. 이 때문에 고구려 사람들은 더욱 변경 지역을 침범하였고,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하자 고구려[罷]는 변방 관원을 파견하였다. 건무(建武) 8년(32)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하러 왔다. 따라서 왕의 호칭이 복구되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이 되었다. 안제(安帝) 이후에는 5부(部)가 번성하고 비록 약탈도 조금 있었으나, 곧 다시 되돌아와서 신하의 예를 갖췄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 출신이 왕이 되었다가 쇠퇴해지자, 계루부(桂婁部)가 대신하였다. 왕이 궁(宮)에 이르렀는데,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므로 나라 사람[國人]들이 그를 미워했다. 자라면서 매우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화제(和帝) 때에는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했다. 왕위가 백고왕[伯固]까지 이르렀는데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형은 발기(拔奇)라고 했는데 어리석었기 때문에 동생인 이이모(伊夷模)를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한(漢) 말기에 공손강(公孫康)이 이이모를 그 나라 환도산(丸都山) 아래에서 격파하니, 나라 사람들이 함께 그 아들 위궁(位宮)을 세웠다. 위궁 또한 용맹과 힘이 있고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의 선조(先祖) 궁(宮)이 출생하면서 곧바로 볼 수 있었는데, 이제 왕도 역시 그러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유사한 것을 일러 ‘위(位)’라고 부르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위(魏)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쳐들어가 무찌르고 숙신(肅愼)신(昚)은 지금 황제(송 효종)의 이름이다까지 추격하여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갔다. 위궁의 5대손 유(劉)가 진(晉) 영가(永嘉) 연간에 요서(遼西)의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외(慕容廆)와 이웃하였는데, 모용외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煌)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가 부여를 크게 격파했으나, 뒤를 이은 부여왕[百濟]에게 패배 당했다. 그 뒤에 모용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안(高安)으로 평주목(平州牧)을 삼았다. 고안의 손자 고연(高璉)이 의희(義熙) 연간에 장사(長史) 손익(孫翼)을 보내어 자백마(赭白馬)를 바치니 영주목 고려왕 낙랑군공(榮州牧 高麗王 樂浪郡公)으로 삼았다. 고연의 7대손 고원(高元)은 수(隋) 문제(文帝) 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침범했다.
당(唐) 태종(太宗) 때에는 동부대인(東部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개소문을 정벌하여 위엄을 요동에 떨쳤다. 당(唐) 고종(高宗)이 또 다시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왕 고장(高藏)을 사로잡고 그 땅을 나누어 군현(郡縣)을 삼았으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켰다.
뒤에 무후(武后)가 장수를 보내어 그 왕 걸곤우(乞昆羽)를 죽이고 걸중상(乞仲象)을 왕으로 세웠으나 또한 병으로 죽으니, 중상의 아들 대조영[祚榮]이 즉위하였다. 대조영은 그 백성 40만을 이끌고 읍루(挹婁)에 터를 잡고 당의 신하가 되었다. 당 중종(中宗) 때에는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대조영을 도독발해군왕(都督渤海郡王)으로 삼으니, 그 뒤부터 드디어 발해라고 하였다.
고장(高藏)이 사로잡혔을 때 그 추장(酋長) 중 검모잠(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가 고장의 외손자 순(舜)을 왕으로 세우니, 다시 고간(高侃)을 시켜 토벌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여러 번 옮겨져 옛 성은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었고 유민들은 돌궐(突厥)·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고씨(高氏)는 이미 멸망했지만 오랜 뒤에는 점차 회복되어, 당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이 되었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923)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는데, 국왕(國王)의 성씨(姓氏)를 사관이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다. 031 장흥(長興) 2년(931)에 왕건(王建)이 나라 일을 맡아보며[權知]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드디어 작위(爵位)를 받아 나라를 차지했다.

 031 『신오대사(新五代史)』에는 광평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과 춘부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이 파견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新五代史』 卷74 四夷附錄 高麗). 하지만 고려에서는 후량(後梁)에게 파견한 것으로 되어있다(『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6年(923년) 6月 ). 당시는 후량(後梁) 후당(後唐)의 교체기였기 때문에 후량(後梁)에 파견된 고려의 사신이 후당(後唐)에 조공을 하게 되어 이러한 기록이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선화봉사고려도경 >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 건국(建國) >


: 견훤의 전(傳)의 후백제의 역사 상, 오월(吳越)이란 나라 이름 출현. 이 나라는 아마도 오대십국(五代十國) 중의 한나라. 혹은 반도?

이 두 기사 외에 '천성(天成) 3년' 또는 '?? 2년' 즉, '928년'과 '??+2'년에 견훤과 왕건간의 서신에도 오월왕의 양국분쟁에 대한 중재의 기사가 실려 있다. (?? : 기준이 없고 그저 2년이라고 작성되어 있다.)

오월국은 전류(錢鏐)가 당말의 난리 통에 일으킨 현재의 항주(杭州)을 중심으로 저장 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이다. 주로 중원의 후량(後梁)에 신속하면서 인근의 강대한 오(吳)와 항쟁하였다고 한다. 보통 907년 후량에게 책봉된 것을 건국 시점으로 하지만 첫 기사가 「삼국사기」에 보이는 900년에도 그 일대에서 사실상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쓰러지기 전 당나라로부터는 절도사로 인정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곳에서 먼저 세력을 떨치며 칭제하였던 동창(董昌)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후로도 월왕(越王)과 오왕(吳王)에 피봉되었다.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는 견훤의 기록은 없는 듯하고, 

다만, (天祐: 904년에서 919년의 당나라 연호) 

"천후(天祐)의 초년에 고려(高麗)의 석굴사(石窟寺)의 애꾸눈 중인 궁예(躬乂)가 무리를 모아 개주(開州)에 근거하여 칭왕(稱王)하면서 대봉국(大封國)이라 하면서 이에 이르러 좌량위(佐良尉) 김입기(金立奇)를 보내 오(吳)나라에 입공(入貢)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자치통감: 후랑기 권 270」)


[ 서기 900년 ]

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당(唐)의 광화(光化) 3년이자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 사신(使臣)을 보내 오월(吳越)에 조회(朝會)하였다. 오월왕(吳越王)이 보빙(報聘)하고 이내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하고 나머지는 옛과 같이 하였다.

< 삼국사기 - 견훤전 >

: 검교태보를 더하고 라는 표현에서 이미, 전에 오월왕에게 방문하였음을 상징한다. (보빙하다: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다)


[ 서기 918년 ]

貞明四年戊寅 ....... 秋八月 ......  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정명(貞明) 4년 무인(戊寅 )....... 가을 8월 ......  사신(使臣)을 보내 오월(吳越)에 들여보내 말을 진상(進上)하니 오월왕(吳越王)이 보빙(報聘)하고 더해 중대부(中大夫)를 제수하고 나머지는 옛과 같이 하였다.

< 삼국사기 - 견훤전 >


[ 918년 8월 11일(음) 신해, 9월 18일(양) ]

甄萱遣一吉粲閔郃, 來賀卽位, 命廣評侍郞韓申一等, 迎于甘彌縣. 郃至, 厚禮遣之.

견훤(甄萱)이 일길찬(一吉粲) 민합(閔郃)을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자 광평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 등에게 명하여 감미현(甘彌縣)에서 영접하도록 하였다. 민합이 이르자 후하게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 고려사 >

 

[ 923년 6월 10일(음) 계미, 7월 26일(양) ]

夏六月 癸未 福府卿尹質使梁, 還獻五百羅漢畵像, 命置于海州嵩山寺.

여름 6월 계미 복부경(福府卿) 윤질(尹質)이 양(梁, 후량)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오백나한(五百羅漢)의 화상(畵像)을 바치자 명하여 해주(海州) 숭산사(崇山寺)에 두게 하였다.

< 고려사 >


[ 923년 6월 20일(음) 계사, 8월 5일(양) ]

癸巳 吳越國文士朴巖來投.

계사 오월국(吳越國)의 문사(文士) 박암(朴巖)이 내투(來投)하였다.

< 고려사 >


[ 923년 미상(음) ] 

同光元年, 遣使廣評侍郞韓申一·副使春部少卿朴巖來, 而其國王姓名, 史失不紀.

동광(同光) 원년(923)에 광평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과 부사 춘부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을 보내왔는데, 그 국왕의 성과 이름은 역사에서 기록을 잃어버렸다.

< 『新五代史』卷74 四夷附錄3 高麗 同光 元年 >

: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923년)이다. 고려라면, 그 국왕의 성과 이름을 역사에서 잃어버렸다(而其國王姓名, 史失不紀) 라고 적을 필요가 있을까? 정작 오월국에서 본 박암은 반도에서 온 객에 해당한다. 이는 최치원이 고려의 격문을 작성해주었다는 날조, 상주의 아자개가 평화롭게 귀부했다는 날조에 해당된다. 도대체 왜 역사에서 지워졌는가? 그리고 중화인들은 그들의 역사날조 및 기록말살의 역겨움을 숨기면서, 정작 세계인에게는 자랑스러운 중화문명을 선전하고 싶은가? 그 이중성과 역겨움에 치가 떨린다.

감미현(甘彌縣)의 위치 문제.


[ 923년 ] 

○ 新五代史 卷七十四 四夷附錄 第三 高麗

高麗, 本扶餘之別種也. 其國地·君世見唐, 比佗夷狄有姓氏, 而其官號略可曉其義. 當唐之末, 其王姓高氏. 同光元年 , 遣使廣評侍 韓申一·副使春部少卿  , 而其國王姓名, 史失不紀.

 新五代史 - 四夷附錄 - 高麗

高麗는 본래 扶餘人의 別種이다. 그 나라의 地理와 君王의 世次는 『唐書』에 나타나 있으며, 다른 오랑캐에 비교하면 姓氏도 있고, 그 관직의 이름도 뜻을 대략 알 수 있는 것들이다. 唐 말엽에는 그 王의 姓이 高氏였다. 同光 원년(A.D.923: 高麗 太祖 6)에 正使로 廣評侍郞 韓申一과 副使로 春部少卿 朴巖 등을 보내 왔는데, 그 國王의 姓名에 대해서는 史官이 잃어버리고 기록하지 못하였다.

新五代史 卷七十四 . 四夷附錄 第三 高麗>

: 역사를 잃어버린다는게 가능할까? 역사가 지갑인가? 흘리면 잃어버릴 수가 있는가? 혹 작성하지 못할만큼 생소한 성씨였는가? 고의성을 의도적으로 숨길뿐. 중화의 가면은 두껍고 짙다. 


[ 미상 ]

史論曰. “新羅數窮, 道喪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羣盗投隙而作若猬毛然. 其劇者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本新羅王子而反以家國為讎, 至斬先祖之畫像, 其為不仁甚矣. 甄萱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禄, 包藏禍心幸國之危, 侵軼都邑虔劉君臣若禽獸, 實天下之元惡. 故弓裔見弃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不能敵之興, 而况·之㐫人豈可與我太祖相抗歟.”

「사론(史論)」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게 되었다. 이에 뭇 도둑이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의 털과 같았다. 그 중에서도 강한 도둑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두 사람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제 나라를 원수로 삼아 심지어는 선조의 화상(畵像)을 칼로 베었으니 그 어질지 못한 것이 너무 심하였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 일어나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심(禍心)을 품어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겨 신라의 도읍을 쳐서 임금과 신하를 마치 짐승처럼 죽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원흉(元兇)이다. 때문에 궁예는 그 신하에게서 버림을 당했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禍)가 생겼으니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비록 항우(項羽) · 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漢)과 (唐)이 일어나는 것을 대적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궁예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 삼국유사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 삼국유사의 저자 또한, 궁예와 견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안 좋았음을 알 수 있다. 전반적인 당대 고려의 사회 분위기 상으로도 평가가 좋지 않았으리라 추측한다. 그들에 대한 억울한 평가는 바뀌지 않았으리라.


[ 927년 12월 (음) ]

十二月 甄萱寄書于王曰, “昨者, 新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社稷丘墟. 是用, 先著祖鞭, 獨揮韓鉞, 誓百僚如皎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 憲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不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多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相金樂, 曝骸於美利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負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至,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彊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但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㕙獹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12월 견훤이 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지난번에 신라(新羅)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왕경(王京)으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鼈應黿聲]과 같은데, 이는 메추라기가 송골매의 날개를 쪼고자 달려드는 것[鷃披隼翼]과 같아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고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이로써 내가 먼저 〈동진(東晋) 때 흉노에 대한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 이남을 회복한〉 조적(祖逖)의 사례와 같이 채찍을 잡고[先著祖鞭], 〈진(陳) 정복에 앞장선 수(隋) 장수〉 한금호(韓擒虎)가 홀로 부월(斧鉞)을 휘두르는 것[獨揮韓鉞] 같이, 〈신라의〉 백관에게 밝은 햇빛과 같이 〈정의롭게 행동한다는〉 맹서(盟誓)를 받고, 6부(六部)에는 의로운 기풍을 유시(諭示)하였습니다. 뜻하지 않게 간신은 숨거나 도망쳐버리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고, 결국 경명왕(景明王)의 외사촌 동생[表弟]이며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였습니다.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을 있게 한 것은 이에 있습니다. 족하께서는 〈내가 알린〉 충고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수단을 써서 틈을 엿보다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쳐들어와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이 묶인 듯이 패배했고, 같은 달에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볕에 쪼이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포획한 자가 많았으며 쫓아가 잡은 자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다면 승부는 알 만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상서(班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였는데, ‘경(卿)과 고려(高麗)는 오랫동안 소통하고 좋아하면서 함께 이웃으로 맹약(盟約)을 맺은 것으로 안다. 근래 두 인질이 다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하였던 옛 관계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의 나라에 가게 하고 또 고려에는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화친하여 길이 평화를 아름답게 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고 〈신라〉 왕을 존중하며,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으므로 그 조유(詔諭)를 듣고서 곧 지시를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족하께서 싸움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고, 곤란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싸우려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조서를 베껴 보내드리니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번갈아 이기는 것[㕙獹迭憊]도 끝내 반드시 남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맞버티는 것[蚌鷸相持]도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迷復]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스스로에게 남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고려사 >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와 ≪고려사≫ 권1 태조 11년조에서는 3년(928)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성 3년이라면, 928년이 된다. 그런데 과연 천성 2년이 원래 기록일까? ]

二年校勘 185正月太祖荅曰. “伏奉吳越國通使班尚書所傳詔㫖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爰到制書, 尺素好音兼蒙教誨. 捧芝檢而雖増感激, 闢華牋而難遣嫌疑, 今托迴軒輙敷危衽. 僕仰承天假俯迫人推, 過叨将帥之權獲赴經綸之㑹. 項以三韓厄㑹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黄巾, 田野無非其赤土. 庻㡬弭風塵之警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於為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癸酉年維時陽月, 忽焉生事至乃交兵. 足下始軽敵以直前若螳蜋之拒轍, 終知難而勇退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辝指天作誓, ‘今日之後永世歡和, 苟或渝盟神其殛矣.’ 僕亦尚止戈之㱏期不殺之仁, 遂解重圍以休疲卒, 不辝質子, 但欲安民. 此即我有大徳於南人也. 豈期歃血未乾, 凶威復作蜂蠆之毒侵害於生民, 狼虎之狂為梗於畿甸, 金城窘忽黄屋震驚. 仗義尊誰似·之覇, 乗間謀唯看·之姧. 致使王之至尊枉稱子於足下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為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社稷. 以僕心無匿惡志切尊王, 将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主焚燒宮闕, 葅醢卿佐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珎寳則奪之相載, 元惡浮於·, 不仁甚於獍梟. 僕㤪極崩天誠深却日, 約効鷹鸇之逐以申犬馬之勤. 再舉干戈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激, 水攻則虎愽龍騰, 動必成功舉無虛發. 逐尹卿於海岸積甲如山, 禽雛造於城邊伏尸蔽野. 燕山郡畔斬吉奐於軍前, 馬利 伊山郡城戮隨晤於纛下. 拔任存 大興郡之日刑積等數百人捐軀, 破清川縣 尚州領内縣名之時直心䓁四·五軰授首. 桐藪 今桐華寺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收復寧遥. 必期泜水營中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成王一捷之心, 竟息風波永清寰海. 天之所助命欲何歸. 况承王殿下徳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舟禁諭戢難於青丘. 旣奉訓謀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㫖, 悉戢㐫機不唯副上國之仁恩, 抑可紹東海之絶緖. 若不過而能攺, 其如悔不可追.” 書乃崔致逺作也.

(천성(天成)?) 2년 417 정월에 태조는 답서를 보내어 말하였다.
“삼가 오월국의 통화사(通和使) 반상서(班尙書)가 전한 조서(詔書) 한 통을 받들었고, 겸하여 그대가 보낸 긴 편지도 받아 보았다. 사신이 이에 조서를 가지고 왔고, 그대의 편지에서도 아울러 가르침도 받았다. 조서를 받들어 읽고는 비록 감격을 더했으나 그대의 편지를 펴 보고는 의심스러운 마음을 없애기 어려웠으니 이제 돌아가는 사신에게 부쳐 나의 심중을 말하려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추대에 못 이겨서 외람되이 장수의 직권을 맡아서 천하를 경륜할 기회를 얻었다. 저번에 삼한(三韓)이 액운(厄運)을 당하고 모든 국토에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서 백성들은 모두 황건(黃巾)에 속하게 되고, 논밭은 적토(赤土)가 아닌 땅이 없었다. 난리의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하려고 하여 이에 스스로 선린(善隣)의 우호(友好)를 맺으니 과연 수천 리 되는 국토가 농상(農桑)으로 생업(生業)을 즐기고, 사졸(士卒)은 7, 8년 동안 한가롭게 쉬었다. 계유(癸酉)년 10월(913년)에 이르러 갑자기 사건을 일으키니 곧 싸움에까지 이르렀다.
그대가 처음에는 적을 가볍게 여겨 곧장 달려드는 것이 마치 당랑(螳螂)이 수레바퀴를 막는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물러감은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았다. 손을 모아 공손한 말로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길이 화목하며,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벌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도 또한 전쟁을 하지 않는 무(武)를 숭상하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인(仁)을 기약하여 드디어 여러 겹 포위했던 것을 풀어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했으며 볼모를 보내는 것도 거절하지 않고 다만 백성만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은 곧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 어찌 맹약(盟約)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흉악한 세력이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과 같은 독기는 생민을 침해하고 이리와 호랑이와 같은 난폭함은 기전(畿甸)을 가로막아 금성(金城)이 군급(窘急)해지고 황옥(黃屋, 왕실)을 몹시 놀라게 할 줄 어찌 생각했겠소? 대의에 의거해서 (周)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그 누가 환공(桓公)·문공(文公)의 패업(覇業)과 같으며 기회를 타서 (漢)나라를 도모하니 오직 왕망 동탁의 간악함을 볼 뿐이오. 지극히 존귀한 왕으로 하여금 몸을 굽혀 그대에게 자(子)라고 하게 하여 높고 낮은 질서를 잃게 하였으니 상하(上下)가 모두 근심하였다. 이에 원보(元輔)의 충순(忠純)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社稷)을 편안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의 마음에는 악한 것이 없고 뜻은 왕실(王室)을 높이는 데 간절하여 장차 조정을 구원하여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그대는 터럭만한 작은 이익을 보고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를 저버려 임금을 목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사르며 대신(大臣)들을 죽이고 사민(士民)을 도륙하였다. 궁녀(宮女)들은 잡아서 수레에 싣고 보물은 빼앗아서 짐 속에 실었으니 그 흉악함은 걸왕(桀王)·주왕(紂王)보다 더하고 어질지 못함은 경짐승과 올빼미보다 더 심하였다.
나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원한과 해를 뒷걸음질치게 하는 정성으로 매가 참새를 쫓는 듯한 힘으로 견마(犬馬)의 수고로움을 다하려 하였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두 해가 지났는데 육전에서는 천둥과 번개처럼 빨리 달렸고, 수전에서는 범과 용처럼 용맹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었고 일을 하는 데 헛됨이 없었다. 윤경(尹卿)을 해안까지 쫓았을 때는 쌓인 갑옷이 산더미 같았고, 추조(雛造)를 성 밖에서 잡았을 때에는 엎드린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燕山郡) 부근에서는 길환(吉奐)을 군문 앞에서 목 베었고 마리성(馬利城) 이산군(伊山郡)인 듯하다. 밖에서는 수오(隨晤)를 깃발 아래서 죽였다.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을 함락시키던 날에는 형적(刑積) 등 수백 명이 목숨을 버렸고, 청천현(淸川縣) 상주(尙州) 영내의 현 이름을 쳐부술 때에는 직심(直心) 등 4, 5명이 머리를 바쳤다. 동수(桐藪) 지금의 동화사(桐華寺)는 깃발만 바라보고 허물어져 흩어졌고, 경산(京山)은 구슬을 입에 물고 항복하였다. 강주(康州)는 남쪽으로부터 귀순해 왔고, 나부(羅府)는 서쪽에서 와서 귀속되었다. 공략한 지역이 이와 같았으니 수복(收復)될 날이 어찌 멀다 하겠는가.반드시 저수(泜水)의 군영에서 장이(張耳)의 첩첩이 쌓인 원한을 씻고 오강(烏江)의 기슭에서 한왕(漢王)의 일전 승리의 소원을 이룩하여 마침내 바람과 물결을 그치게 하여 길이 천하를 맑게 할 것이다. 하늘이 돕는 것이니 천명(天命)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물며 오월왕(吳越王) 전하의 덕이 먼 지역까지를 포괄하고 인(仁)은 약한 자들을 애무(愛撫)하던 지라 특히 대궐에서 조서를 내려 동방에서 난리를 그치라고 타일렀다.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받들지 않겠는가. 만약 그대도 이 조서를 받들어 전쟁을 그친다면 상국(上國)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방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물을 능히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었다.

삼국유사 >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 1. 최치원이 해당을 글을 지었다는 점은 이해가 안되며, 2. 청천현은 상주 영내의 현 이름인데, 기록 상 상주의, (고령가야의? 후사벌국의?) 아자개는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기록이 맞다면, 어째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였는지 이해가 불가능하며, 왜 피를 동반한 것을 암시하는 청진현의 점령과는 달리 아자개의 귀부가 평화롭게 기록되었나? 어째서 2년이라고 기록되었는지도 이해 불가능하다. 



인물 :

아자개(阿玆蓋) [이명: 아자개(阿慈介), 아자개(阿慈个), 아자개(阿字蓋), 원선(元善)]

남북국시대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인 호족.

아자개(阿慈介)·아자개(阿慈个)·아자개(阿字蓋) 또는 원선(元善)이라고도 한다.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후백제견훤조에 인용된 『이제가기(李磾家記)』에 의하면, 아자개는 신라진흥왕과 사도부인(思刀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구륜공(仇輪公)의 후손이라고 한다.

아자개의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며, 자식은 5남 1녀(혹은 아들 4형제)가 있었으니 장남이 바로 견훤(甄萱)이라고 한다. 『삼국사기』 권50 견훤전에서도 견훤의 아버지가 아자개로 되어 있다.
아자개는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세력이 봉기하자, 그도 885년(헌강왕 11)∼887년(진성여왕 1)에 사불성(沙弗城)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그 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918년(태조 1)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으나, 『고려사』 태조 1년 9월 갑오조에는 9월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바, 이 때문에 견훤은 아자개의 아들이 아니며, 양자는 출신 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세력이라는 견해도 있다.

「견훤(甄萱)의 가향(家鄕)에 대(對)하여」(김상기,『가람이병기박사송수기념논문집』,1966 : 『동방사논총』,서울대학교출판부,197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자개(阿玆蓋))]


견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이라고 하였다. 용기(龍紀) 원년 기유(889년)였다.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년)의 일이라고도 한다.

스스로 후백제왕이라고 일컫고 관직을 설치했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3년(900년)이요,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이다.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는 “견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비가기(李碑家記)≫ 351에는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작진(酌珍)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萱)이요,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蓋)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 제2기이 후백제 견훤 - 견훤의 출생과 계보 >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光州)현재의 광주광역시 일대이다. 북촌(北村)광주 북촌에 대해 ‘尙州 北村’의 오각(誤刻)으로 보기도 한다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당 소종(昭宗)의 연호 중 하나로 892년~893년에 사용하였다.원년(元年) 임자(壬子)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完山郡)현재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이다.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중국 5대 후당(後唐) 폐제(廢帝)의 연호이다. 청태 원년은 고려 태조 9년(934)이다. 그러나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한 기사는 본문의 뒷부분과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 청태 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원년(元年) 갑오(934년)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여 견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아들 금강이 즉위하여여기에는 금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검(神劍)’의 잘못인 듯하다. 본문의 뒷 부분이나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을 사랑하였으므로, 그의 형들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3형제가 난을 일으켜 신검이 왕으로 등극하였다고 나와 있다.천복(天福)중국 5대 후진(後晉) 고조(高祖)의 연호이다.원년(元年) 병신(936년)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一善郡)에서 싸웠으나 후백제(後百濟)가 패배하여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 제2기이 후백제 견훤 - 출생에 관한 이설 >

정명(貞明) 4년(918) 무인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여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 同光) 3년 겨울 10월(925년)에는 기병(騎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 383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태조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대적하였다.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태조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외생질 진호(眞虎)를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 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侍中 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 2천 5백 호로 하였다.
<삼국유사 - 제2기이 후백제 견훤 -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

본 조에 인용된 두 경우를 모두 견훤의 가계에 대해 기록한 ≪이제가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原文幷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1956). 그러나 경우를 나누어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이 견해는 ≪이제가기≫의 사료적 가치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견훤의 가계보(家系譜)로 해석하였는데, 앞에 인용한 것은 책이름이 ≪이비가기(李碑家記)≫로 견훤 선대(先代)의 기록이고, 뒤의 인용한 책이름은 ≪이제가기≫로 견훤 후대(後代)의 기록이라는 것이다(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한편, ≪이제가기≫를 고려 중말기(中末期) 사람으로 짐작되는 이제(李磾)의 사가보첩(私家譜牒)과 같은 기록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상기, 1974) 또한 고창군(古昌郡) 전투와 같은 고려 측 관점이 강하게 노출된 정보가 ≪이제가기≫에 담겨 있었을 리 없다고 하여 신뢰하지 않는 입장도 있다(이강래, 「≪삼국유사≫ 후백제견훤조의 재검토」,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본 조의 내용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신라시대에는 가은현이 상주 관내의 고령군(古寧郡)에 속해 있었으며, 그 지명이 가해현이었다가 경덕왕 때에 가선현으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가은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으로 삼았으며, 뒤에 공양왕이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겨 속하게 하였다. 신라시대의 고령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이며, 가은현은 상주와 함창 부근이었다고 비정된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2, 이회문화사, 2002). 이 지역에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견훤산성(甄萱山城)이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표고 약 400m의 속칭 장바위산을 에워싼 성벽 길이 약 1㎞의 석성이다. 산성의 안쪽에서는 기와편이나 토기편 등이 다량 출토되고 있어서 제법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주읍지(尙州邑誌)≫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하였으며,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산성뿐만 아니라 상주 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 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정영호,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1969).

정명(貞明)4년 무인에 철원경(鐵原京)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919년). 그는 태조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 同光) 3년 겨울 10월(925년)에는 기병(騎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까지 이르렀다.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자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해서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서 전년에 보낸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태조는 웃으면서 돌려보냈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월에 견훤은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니, 신라왕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삼국유사>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918) 또 사신을 오월에 보내 말을 바치도록 하니, 오월왕이 답례의 사신을 보냈다.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주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칭왕 이전의 관작 : 

    작위 :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 / 전주왕(全州王)(일본측 기록)

    훈위 : 상주국(上柱國)

    직위 : 서면도통(西面都統) -

        지휘병마제치(사)(指揮兵馬制置(使)) -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兼) 어사중승(御史中丞)

(견훤이 일본에 외교사신을 보냈을 때 일본은 견훤을 도통(都統) 견공(甄公)이라 칭했다. 《고려사》 <전라도 지리지>에선 서면도통(西面都統) 견훤이라고 기록했다.)

≪이비가기(李碑家記)≫ 왈,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

≪이제가기≫ ( 고려 중말기(中末期) 사람으로 짐작되는 이제(李磾)의 사가보첩(私家譜牒) ) 왈, 견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 8년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상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 [ <≪이비가기≫중三國史本傳출처> 1. 맏아들이 상보(尙父) (萱)이요, 2.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3.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蓋)요, 4.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5.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蓋)이다. ]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

≪고기(古記)≫ 왈,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光州)북촌(北村)‘尙州 北村’의 오각(誤刻)으로 보기도 한다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甄萱)이라 일컬었다.

: 우선, 이씨의 신라에서의 본격적인 등장은 7세기 들어서부터이다. 때문에 이씨 집안 이야기인 ≪이비가기(李碑家記)≫에 진흥대왕이 나왔다면, 그 기록이 거짓이거나 프로파간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제가기≫또한 마찬가지로, 아들이 4명이라 하였지만, 정작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아들이 5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4명이 5명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은 견훤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상주 출신 '아자개'를 견훤의 아들로 만들면서 조작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뢰성 있는 기록은 ≪고기(古記)≫이며, 자주빛은 '사벌', '사량'을 상징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당대 견훤은 상주 출신의 귀족의 후손이었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이씨 그리고 고려가 상주출신이라는 재료를 이용해서, 견훤에게 아자개의 아들이라는 거짓을 만든 기록이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자 백제 유민들이 호응한 이유로 견훤의 혈통을 꼽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는 얘기다. 《전주 견씨 족보》에 따르면 견훤은 의자왕의 맏아들 부여융의 9대손, 즉 의자왕의 10대손이었고,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 중에 세력이 있었던 사람은 견훤밖에 없어 왕위에 추대되었다고 한다.[44] 그러나 견훤이 실제로 백제 부여씨 왕실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견훤이 광주 일대 호족의 자제란 뉘앙스가 담긴 지렁이 설화도 대단히 의문시되는데 부여융 후손 전승 자체는 아예 그냥 현대 학자들 중에선 진지하게 거론조차도 되지 않는다. 

[44] 족보대로라면 굳이 백제의 대성팔족 중에 하나인 진씨와 같은 발음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부여융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부여 서씨의 경우를 보면, 원래 성씨였던 扶餘씨가 夫餘로 바뀌고, 이후 徐로 글자를 변형시켰을 것이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논거를 내세우지만, 견훤의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신라의 영토였던 상주 출신에, 본래 성씨도 이씨였다고 하니 부여융의 후손이라고 볼만한 근거가 영 부족하다. 그리고 족보의 특성상 과장이나 미화가 있을 수 있다.

(from 견훤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15. Retrieved 2022-06-15.

: 오히려, [44]의 扶餘씨가 夫餘로 바뀌고, 이후 徐로 글자를 변형시켰을 것이라는 논리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의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쪽이건 주장일 뿐, 굳이 여徐 씨의 입장이 더 논리적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 서술의 이유는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중화계들의 무의식적인, 혹은 약간의 눈치를 챈 스스로들이 만든 위작된 반도 역사의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국계들은 서세동점의 시대 이후, 과학의 발전으로 그들이 '올바르게 왜곡'해 왔던 동아시아 전통으로, 동아시아의 날조를 통한 중화 권력의 형태로 회귀하고자 하고 있고, 이것이 현대에 많은 중화계들이 역사에 신경을 쓰는 이유이다. 견훤이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유는, 견훤은 스스로가 상주 출신 귀족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 '보라색' 상징의 귀족은 신라, 부여, 백제와 모두 관련될 여지가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중국계 후손들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게 되더라도 외면하고 싶은 형태의 정보이다. 


..광평시랑(廣評侍郞) 한신일(韓申一).. 

한신일(韓申一)

○ 후당(後唐) 때 고려에서 광평 시랑(廣評侍郞) 한신일을 파견해 왔는데, 한신일은 서사(書史)에 통달하였다.

    돌아갈 때에 임해서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고는 새로 조공(朝貢)으로 바쳐 온 임려장(林慮漿)을

    직접 내려 주었다. 《청이록(淸異錄)》

    [주D-001]임려장(林慮漿) : 술의 일종이다.



..춘부소경(春部少卿) 박암(朴巖)..

박암수(朴嵓叟)

○ 동광(同光) 연간에 고려의 사신이 왔는데, 부사(副使)로 온 자는 춘부 소경(春部少卿) 상주국(上柱國)

    박암수로, 문아(文雅)하여 중조(中朝)의 현사(賢士)와 같은 기풍이 있었다.

    그가 이미 떠난 뒤에 아전이 그가 묵던 관사를 청소하다가 쓰다 남은 초 반 토막을 얻었는데,

    그 끝에 붉은 글씨로 전문(篆文)을 새기기를, ‘광제수(光濟叟)’라고 하였다.

    수(叟)는 이 초를 명명한 것이다. 《청이록(淸異錄)》

    살펴보건대, 《오대사(五代史)》에 이르기를,

    “당나라 장종(莊宗) 동광 원년(923, 태조6)에 고려에서 광평 시랑 한신일을 정사(正使)로,

     춘부 소경 박암(朴巖)을 부사로 보내왔다.” 하였다. 암수(嵓叟)는 바로 박암의 자(字)이다.

[주D-001]춘부 소경(春部少卿) : <해동역사 제68권 인물고 2 고려: 한신일, 박암수, 김행성> 원문에는 ‘部少卿’으로 되어 있는데, 《청이록(淸異錄)》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古寧伽倻(고령가야) :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1. 고령 = 가야인들x 신라 병합이후 사용한 언어. 경상북도 상주 출토 유물은 4세기 이전에 신라화. 고령가야계 주장 함창김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고로왕 백진(42~156), 마종왕(156~220), 이현왕(220~254)를 끝으로 병탄되었다. 

* 경상북도 고령군 = 대가야(반파국?), 경상북도 상주 = 고령가야?

* 병풍산 고분군 참고


[ 최언위 ]

崔彦撝, 初名愼之, 慶州人. 性寬厚, 自少能文. 新羅末, 年十八, 游學入唐, 禮部侍郞薛廷珪下及第. 時浡海宰相烏炤度光贊, 同年及第. 炤度朝唐, 見其子名在彦撝下, 表請曰, “臣昔年入朝登第, 名在李同之上, 今臣子光贊宜升彦撝之上.” 以彦撝才學優贍, 不許. 年四十二, 始還新羅, 拜執事省侍郞·瑞書院學士.

太祖開國, 挈家而來, 命爲太子師傅, 委以文翰之任. 宮院額號, 皆所撰定, 一時貴遊, 皆師事之. 官至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 惠宗元年卒, 年七十七. 訃聞, 王痛悼, 贈政匡. 謚文英. 子光胤·行歸·光遠·行宗.

최언위(崔彦撝)는 초명(初名)이 최신지(崔愼之)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를 잘하였다. 신라 말 나이 18세에 당에 가서 유학하였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廷珪) 아래에서 급제하였다. 이때 발해(浡海) 재상(宰相)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광찬(光贊)이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오소도가 당에 조회하러 왔다가 자신의 아들 이름이 최언위 아래인 것을 보고 표문을 올려 청하기를, “신이 옛날에 본조에 들어와 급제하였는데,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습니다. 지금 신의 아들 광찬(光贊)도 마땅히 최언위 위에 올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 42세에 비로소 신라로 돌아와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郞 瑞書院學士)에 임명되었다.
태조가 개국하자 〈최언위는〉 집안을 이끌고 왔다.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임명하였고, 문한(文翰) 임무를 맡겼다.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짓고 정하였고, 당시의 이름난 가문들은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관직은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 元鳳大學士 翰林院令 平章事)에 이르렀다. 혜종(惠宗) 원년(944)에 죽었고, 나이는 77세였다. 부음을 듣고 왕이 슬퍼하며 애도하였고, 정광(政匡)에 추층되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아들은 최광윤(崔光胤)·최행귀(崔行歸)·최광원(崔光遠)·최행종(崔行宗)이다.

<고려사 열전 권제5 > 제신(諸臣) > 최언위  >


김행성(金行成) ] 

김행성(金行成) // 아들 김종민(金宗敏), 김종눌(金宗訥)

○ 태평흥국(太平興國) 원년(976, 경종1)에 고려의 왕 왕주(王伷) -살펴보건대, 고려 경종(景宗)의 휘이다.- 가 그 나라 사람 김행성을 파견하여 국자감(國子監)에 취학하게 하였다. 2년에 김행성이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김행성은 여러 차례 승진하여 전중 승(殿中丞)이 되었다. 왕치(王治) -살펴보건대, 고려 성종(成宗)의 휘이다.- 가 오래도록 그를 고려로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는데, 김행성은 스스로 중국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늙은 부모가 있는 몸으로 해외에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그리워하면서 녹봉(祿俸)을 보내 줄 수 없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이에 화공(畫工)으로 하여금 부모의 화상(畫像)을 그리게 해 정침(正寢)에다가 화상을 걸어 놓고는 그의 아내인 사씨(史氏)와 더불어 곁방에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식사를 올렸는데,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순화(淳化) 초에 안주 통판(安州通判)이 되었다가 병이 들었다. 안주 지사(安州知事)인 이범(李範)이 동료 관원 몇 사람과 병문안을 가 보니 김행성의 병이 이미 위독하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 김행성이 외국인으로서 조정의 관원이 되어 군정(郡政)을 보좌하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 없으니 비록 눈을 감더라도 참으로 남은 한이 있을 것입니다. 두 아들 종민과 종눌이 모두 어린데, 집마저 가난한 데다가 의지할 만한 친척도 없으니, 머지않아 구렁에 뒹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김행성이 죽었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기르면서 개가(改嫁)하지 않을 것을 맹서하고는 신발을 삼으면서 생활하였다. 이범이 이런 사실을 아뢰자, 조서를 내려서 김종민을 태묘 재랑(太廟齋郞)에 보임하였으며, 안주 고을로 하여금 달마다 그 집에 돈 3민(緡), 쌀 5곡(斛)을 지급하게 하고, 장리(長吏)가 명절 때마다 문안하게 하였다. 《송사(宋史)》

[주D-001]이에 …… 그리게 해 : 원문에는 ‘令工國其像’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令工圖其像’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순화(淳化) : 송(宋)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존속 기간은 990년에서 994년까지이다.



추가 참고자료 :

국사관논총

後百濟 甄萱의 對日通使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건국되어지는 시기 전후의 한·일관계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는 後百濟王 견훤의 使者가 日本에 갔던 일이다.

여기에 대한 기사가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아 일본측의 사료에 의해서 고찰해 볼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양국사정을 고려해 볼 때 유추는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이미 알려진 대로 견훤은 신라말의 혼란한 틈을 이용, 스스로의 힘을 축적하여 백제의 故土를 회복하고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표방하고 자칭 後百濟王이라 칭하며 完山에도 읍하고 設官分職하였다.

당시 견훤으로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하나는 내적인 문제로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인데, 이는 그가 일어난 지역의 역사적 연고를 이용하여 전술한 대로 후백제왕이라 칭한 것을 둘 수 있다. 또 하나는 외적인 문제로 인접국으로부터의 승인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吳越에 使者를 파견하고,註 038 이어서 일본에도 使者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견훤이 일본에 사자를 파견한 것은 전시대인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가 비교적 잘 이루어져 왔으며, 후백제가 백제를 이었다는 역사성을 내세워, 당시 어수선한 후삼국의 상황에서 국내외적으로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여받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견훤의 후백제 使者는 두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다.

첫번째의 사자는 922년에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견훤의 사자는 輝嵒이란 자로서註 039 牒狀과 聘物을 가지고 대마도에 도착했다고 하였다.註 040 견훤의 사자의 도착은 바로 島司에 의하여 大宰府를 거쳐 京都에 보고되었다. 京都에서는 여러 가지 논의를 거쳐 그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菅原淳茂로 하여금 返牒을 작성토록 하였다.註 041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 견훤의 사절을 ‘新羅人到來’註 042라 하고 그 返牒도 주 41)에서처럼 신라에 답하였다. 이에 대하여 中村榮孝는,

오랫동안 신라의 통치가 계속되고, 그 땅의 사정에 어두웠던 시대였지만 이보다 앞서 견원이 吳越의 책봉을 받아 ‘新羅西南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檢太保·後百濟王’註 043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신라의 지방관에 의한 遣使로 받은 것에 틀림없다

고 하였다.註 044 또한 返牒의 글 가운데 ‘都統甄公’이라 하는 것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하였다.註 045

그러나 吳越의 책봉 文案에도 분명히 ‘後百濟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이전에 신라의 지방관리가 독자적으로 他國에, 특히 일본에 使節을 파견한 예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견훤의 사자를 신라의 사절로 보았다는 것은 무리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당시 일본에서 한반도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견훤의 사자를 통하여 한반도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며, 後百濟王이란 칭호에 대하여도 알아 보았을 것이고, 使臣자체도 그 자신이 새로 건국한 後百濟의 사절임을 밝혔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견훤의 사자를 신라의 사절로 보아서 거절하기 보다는 당시의 일본국내사정에 의하여 거절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일본은 遣唐使도 폐지되고, 遠來의 客이 있어도 “所惠土宜 有憚容納 旣恐交於境外 何留物於掌中 然而遠志難拒 忍而依領”註 046이라 하여, 통교의 거부에 다다르는 道程이었으며, 쇄국의 情態였던 것이다.註 047

두번째의 사신파견은 929년에 행하여졌다. 이때 張彥澄 등 20인이 大宰府와 對馬島守 經國에게 보내는 書狀과 信物을 가지고 갔다. 이때는 특히 그해 정월에 대마도에 표류한 표류민을 일본측에서 돌려보내준 데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아울러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국교를 희망하였던 것이다.註 048 그러나 일본에서는 역시 견훤을 신라인으로 보고 그의 사자를 거절하였다고 하였다.註 049 그러나 견훤이 2차의 사신을 파견하기 전에 표류민을 호송하고 왔던 일본사신 가운데 하나가 먼저 일본에 도착하여 당시 견훤을 만났던 사정을 보고하는 가운데 ‘全州王甄萱 撃并十州 稱大王’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일본내에서는 이미 한반도의 사정과 견훤의 입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1차 때와 같은 이유로 거절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그때까지 계속된 일본국내의 사정때문 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출처 :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kn&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kn_029_0060_0020_0020&position=-1#kn_029_0060_0039_comment )


만운재

밀양에 있는 만운재(萬雲齋)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8왕자 가운데 장남인 밀성대군(密城大君)으로 밀성(密城) 박씨(朴氏)의 상조(上祖)인 박언침(朴彦枕)을 경모(景募)하여 후손들의 결의에 의하여 홍문관 시독(弘文館 侍讀)을 역임한 교리(校理) 창번공(滄樊公) 박해철(朴海徹)이 1927년에 창건한 단층팔작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6칸 측면 2칸의 집이다. 

경내에는 밀성대군과 그 아들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박욱(朴郁), 박욱의 아들이며 고려 개국공신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를 지낸 박란(朴瀾)등 3위를 모신 경덕단(景德壇)이 있고, 외삼문(外三門)은 앙경문(仰景門)이라고 해서 단층맞배지붕 목조와가로 정면 9칸, 측면 2칸이다. 

부속건물로는 만운재를 창건한 박해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경초재(景肖齋)와 정당(正堂)인 유경각(유敬閣), 영정각(影幀閣)등도 있다.

(출처 : https://www.miryang.go.kr/tur/EgovCultureDetail.do;jsessionid=F02B745F0276EA8900672EFC9EAD3442.was1?mnNo=30304020000&searchKeywordTo=502&nmtIdx=972&searchCondition=&searchKeyword=&pageIndex=2 )


외교문서를 통해 본 후백제와 일본의 외교 양상

후백제 견훤이 922년과 929년에 일본에 使者를 파견하여 通交하려는 뜻을 전한 ‘牒’을 국가 간의 외교문서라는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후백제와 일본 사이의 通交가 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일본 측의 배경과 후백제 견훤의 對日外交의 목적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922년 후백제 사신이 대마도를 거쳐 大宰府에 와서 ‘牒’과 ‘方物’을 바친 내용이 『本朝文粹』의 ‘大宰答新羅返牒’으로 전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견훤은 ‘一千年之盟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백제의 선례에 따라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朝覲의 禮는 陪臣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명분으로 후백제와의 첫 통교를 거절하였다. 이에 견훤은 929년에 다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기록은 『扶桑略記』에 전한다. 그러나 후백제 사신에 대한 태정관의 조치는 지난번과 같이 사신 일행을 추방한 것이었다. 후백제의 922년과 929년의 對일본 통교가 실패로 끝난 일본 측의 배경은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맞아 자국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지향한 일본 조정이 후백제와의 通交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율령제 도입 이후에 외교의 원칙이 된 ‘爲人臣者 無外交’를 내세워 返牒의 수신자를 ‘新羅’로 하면서, 후백제 견훤의 通交를 공식적으로 거절하였다. 한편, 견훤의 일본에 대한 사신 파견 목적은 전주 定都 이후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吳越등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922년에 일본에 使者를 파견하여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국제적으로 후백제를 하나의 국가로, 견훤을 왕으로 인정받고자 한 절차였다. 일본에 대한 929년의 2차 사신 역시 927년에 신라 景哀王을 시해한 것을 계기로, 신라와의 君臣 관계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후백제의 왕이 되고자 한 것이었다. 이제 견훤은 신라의 신하가 아니라, 후백제왕으로서 일본에 공식 사절을 보낸 것이다. 견훤은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아시아 교섭에 있어서 지역 권력에서 벗어나 공식적인 국가 권력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출처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295088


대중국외교

후삼국기 중국과의 외교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唐이 멸망한 후 五代의 혼란한 시기로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국 과의 관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189) 후삼국 중에서도 특히 견훤 이 중국과의 외교에 적극적이었다. 후백제는 吳越과 後唐, 북쪽의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견훤은 특히 오월과 일찍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견훤이 오월왕에게 사신을 파견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900년이 처음이다.190) 900년은 후백제가 전주로 천도하여 본격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던 해였다. 견훤이 이 때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전주천도의 사실을 전하고 오월왕으로부터 이를 공인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에 대해 오월왕은 보빙사를 파견하여 견훤에게 ‘檢校大保’의 직을 제수하였다고 한다. 견훤의 지위가 중국으로부터 공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런데 견훤이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이미 오월과 사신교환이 있었다. 900년 오월왕이 보빙사를 보내면서 ‘검교태보의 직을 加授하고 다른 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라고 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견훤이 오월에 처음 사신을 파견한 것은 892년 경으로 추측된다. 견훤은 892년 광주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이라고 했는데, 이 때 견훤은 오월왕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제수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918년 8월에도 견훤은 오월에 사신을 보냈다.191) 그 목적은 당시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사정을 오월에 알리는 등 신생 고려와의 대중국 외교에서 우선권을 잡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927년 12월에는 오월국의 사신 班尙書가 후백제에 와서 고려와의 화해를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였다. 이는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제거한 지 3개월 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오월왕의 서신은 후백제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고, 아마도 견훤측의 외교정책의 소산이라고 생각된다. 즉 견훤은 경주 침공 후 고려측의 반발을 오월왕의 서신을 통해 무마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192)

 이처럼 견훤은 일찍부터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특히 892년의 무진주 도읍과 칭왕, 900년의 전주천도와 국가체제 정비, 918년의 고려 건국, 927년의 경주 침공과 경애왕 살해 등 국내외의 중요한 정치적 변수가 있을 때마다 오월과의 외교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의 지위를 공인받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한편 후백제는 후당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후당과의 외교기록은 두 차례 보이는데, 925년 12월과 936년 정월에 각각 후당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193) 기록상으로는 925년이 처음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후당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892년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을 정하면서 오월과 함께 후당에게도 사신을 보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후당이 925년 견훤에게 사신을 보내 “檢校大尉兼侍中判百濟軍事의 관직을 제수하고 그 밖의 持節都督…食邑二千五百戶의 직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고 하였는데, 후당이 이전에 제수했다고 하는 ‘지절도독’운운의 직함은 견훤이 892년 자서했다고 한 직함과 그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한편 936년 정월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견훤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신검이 한 일이었다. 신검정권에서 후당에 사신을 보낸 목적은 후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신검이 그 사실을 후당에 알리고 아울러 자신의 지위를 후당으로부터 공인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후백제는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927년 거란왕은 裟姑·馬拙 등 35인의 사신을 후백제에 파견·來聘했다고 한다.194) 35인에 달하는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거란에서는 후백제와 친선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전에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낙타와 말 등을 바친 것과 같이195) 많은 물건을 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견훤은 중국과의 외교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오월과의 외교가 그 중심이 되었다. 특히 오월이나 후당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국내에서의 권위를 강화하고 나아가 후삼국간의 관계에서도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생각된다. 결국 후백제의 대중국정책은 정치·외교적인 목적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후백제는 일본과도 외교관계를 맺고자 노력하였다.196) 그런데 일본과의 외교기록은 국내의 사서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고 일본측 기록에만 보인다.

 견훤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922년 6월이 처음이었다. 견훤은 사신 輝巖(函)으로 하여금 書狀과 信物을 갖고 대마도에 도착케 하여 일본정부와 통상할 것을 원하였다. 이에 대마도의 島司는 이 사실을 京都에 보고했으나, 경도에서는 견훤이 신라의 신하(陪臣)라 하여 사사로운 외교를 거절하고 다만 식량을 주어 돌려보냈다 한다.197) 그런데 이 때 견훤이 파견한 사신을 ‘新羅人到來’라고 표현한 것이라든지, 견훤을 ‘新羅 陪臣’이라 한 것이라든지, 견훤에 보내는 서첩을 ‘答新羅返牒’이라 한 것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는 견훤을 신라의 지방관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견훤을 ‘都統甄萱’이라 칭한 것으로 보면 견훤 스스로가 신라의 지방관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은 이미 892년에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이라 하였고 이후 오월과 후당과의 외교에서도 이러한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다.

 7년 후인 929년 정월에는 耽羅와 해초를 교역하던 후백제의 상선이 대마도의 下縣郡에 표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對馬島守 坂上經國은 通社長 岑望通과 檢非違使 秦滋景 등 사절을 파견하여 이들 후백제의 표류민들을 全州에 데려다 주고198) 견훤을 만나 島守의 書狀을 전하였다. 비록 京都정부에서는 견훤과의 통상을 거절했지만 대마도에서는 견훤과의 통상을 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도수의 사절단은 그 해 3월 25일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귀환하여 견훤을 “全州王 甄萱이 數十州를 격파하여 大王이라고 칭하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들 대마도수가 파견한 사절이 견훤을 만난 때는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고 이어 왕건을 公山桐藪에서 대파하여 한창 그 세력이 강성하던 때였다.

 그런데 견훤은 대마도 사신이 돌아간 뒤 바로 같은 해 5월 17일 張彦澄으로 하여금 20인의 사절단을 이끌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표류민 송환에 대한 답례와 아울러 경도정부와의 통상을 바라는 書狀을 전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앞서 922년 輝巖을 보냈을 때와 마찬가지 이유를 들어 후백제와의 통상을 사절하고 이들 견훤의 사신들에게는 식량을 주어 귀국케 하였다.199)

 이처럼 견훤은 일본과의 외교에도 노력을 기울여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일본정부와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한 일본측의 소극적인 자세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일본과의 외교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견훤의 대외인식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견훤이 일본과 통교를 맺고자 한 것은 정치적·외교적 목적보다는 이들과의 해상무역이 더 큰 관심이었을 것이다.

189) 신라말 고려초의 대중관계를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李基白,<高麗初期에 있어서의 五代와의 관계>(≪韓國文化硏究院論叢≫1, 1960 ;≪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2). 金庠基,<新羅末에 있어서의 地方群雄의 對中통교>(≪黃義敦古稀紀念論叢≫, 1960 ;≪東方史論叢≫, 서울大 出版部, 1974).≪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5년 2월.

190)≪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192)≪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冊府元龜≫권 972, 外臣部, 朝貢 5, 淸泰 3년 정월. ≪五代史≫권 7, 後晉, 天福 원년 정월.

195) ≪高麗史≫ 권 1, 世家 1, 태조 5년 2월.

196)후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中村榮孝,<後百濟王および高麗太祖の日本通使>(≪日鮮關係史の硏究≫上, 吉川弘文館, 1965) 참조.

197) ≪扶桑略記≫권 24, 裡書, 延喜 22년 6월 5일. ≪本朝文粹≫권 12, 牒 答新羅返牒.

198) ≪扶桑略記≫권 24, 醍瑚天皇 下, 延長 7년 5월 17일. 대마도 사신이 후백제인을 데리고 金州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金州는 全州의 誤記라고 생각된다.

199) ≪扶桑略記≫권 24, 醍瑚天皇 下, 延長 7년 5월 21일.


汉语词典  (汉语词语拼音 汉语解释)

光济叟

拼音:guāng jì sǒu

注音:ㄍㄨㄤ ㄐ一ˋ ㄙㄡˇ

结构:光(上下结构)济(左右结构)叟(上下结构)

词语解释:

    烛的别名。

引证解释:

    ⒈ 烛的别名。

    宋陶穀《清异录·器具》:“同光年, 高丽行人至。副使春部少卿上柱国朴嵓叟,文雅如中朝贤士。既行,吏埽除其馆舍,得餘烛半梃,其末红印篆文曰‘光济叟’,叟盖以命烛也。”

网络解释:

    光济叟  烛的别名

    宋 陶谷 《清异录·器具》:“ 同光 年, 高丽 行人至。副使春部少卿上柱国 朴嵓叟 ,文雅如中朝贤士。既行,吏埽除其馆舍,得馀烛半梃,其末红印篆文曰‘光济叟’,叟盖以命烛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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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국(上柱國)

정의 : 고려시대의 정2품 훈직(勳職).

내용 : 흔히 벼슬은 관(官)[職과 官]·작(爵)·훈(勳)으로 구별된다. 이 가운데 훈은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명예직으로, 상주국은 바로 이 훈에 해당된다.

고려시대의 훈직은 상주국과 주국(柱國)의 두 가지가 있었다. 문종 때 상주국은 정2품으로 주국은 종2품으로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는 폐지되었다. 고려는 상주국·주국 등의 훈직을 일반 신하에게는 거의 수여하지 않았다.
『고려사(高麗史)』를 통하여 확인되는 사례는 예종 때 최홍사(崔弘嗣)·이오(李0xF849), 충렬왕 때 김방경(金方慶) 등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는 봉작(封爵)을 수여하면서 반드시 훈직인 상주국을 수여해주고 있어 대조가 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조(高麗朝)의 왕족봉작제(王族封爵制)」(김기덕,『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52,1986)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상주국(上柱國))]


[신비의 고대왕국 .7] 사벌국의 흔적을 찾아서

병풍산 능선따라 늘어선 800여기 고분…옛 영광 간직한 채 말이 없네

상주 사벌면 일대 위치 → 낙동강 인접 → 비옥한 토지 쌀생산 → 진한 12국 중 가장 부강 → 국가체제 성립

기록·유적 그리 많지 않아…도굴·농경지 확장 등으로 고분군 파손…사벌국 '국인' 추정 인장마저 분실

1914년 촬영한 병풍산 고분군 전경. 유리 원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북쪽으로 소백산맥이,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상주. 어디를 가던 간에 넓고 기름진 평야가 자리해 있어, 상주는 예로부터 경상도의 대표적 곡창지대였다. 이 같은 지리적 배경으로 상주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사회가 발달했다. 비옥한 토지로 사람들이 모였고, 다른 지역보다 일찍 부족국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농업으로 부흥한 사벌 
삼한시대에 상주를 호령했던 고대국가 사벌국(沙伐國).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사로국의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한다. "첨해왕(沾解王) 3년(249년) 장군 석우로(昔于老)가 사벌국을 멸해 신라에 복속시켰다. 같은해 사벌국이 갑자기 백제에 귀속되자, 다시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멸했다"고 한다. 한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이때 사벌국을 정복한 신라가 행정관청인 주(州)를 설치했다고 전한다. 사벌국을 두 번이나 정벌한 석우로는 신라 10대 내해왕의 아들로 249년 왜구를 막다 전사했다. 이뿐이다.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벌국은 어떤 나라였고, 영향권은 어디까지였을까. 당시의 주변환경을 토대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농업이 번성한 나라였다는 정도뿐이다. 그리고 유적 등을 통해 사벌국의 중심지가 상주시 낙상동, 사벌면 금흔리 성안산, 화달리의 둔진산, 소산 등 남북 1.7㎞, 동서 2.2㎞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계에서는 최대 영역권을 상주 외서·은척면, 문경 산양·영순·산북면, 예천군까지로 보고 있지만 논란이 적지 않다. 
사벌국은 낙동강과 인접해 비옥한 평야에서 생산한 쌀과 다양한 농산물을 주변국가와 교역해 경제적 부를 쌓아, 진한 12국(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에 지금의 대구·경주 지역에 분포한 12개의 소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계는 사벌국이 부족국가형태에서 멸망까지의 시기를 기원전 2세기경에서 4세기대로 보고 있다. 또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과 낙랑군의 성립 등 불안정한 국제정세가 농경사회를 '사벌국'이라는 국가체제로 발전시키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벌국은 신라에 패망한 뒤에도 삼국통일이 이뤄지기까지 전략적 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중요 곡창지 중 하나였던 사벌주는 경제·정치적으로도 수도인 경주와 버금가는 대세력집단이 존재했음을 짐작게 한다. 
신라는 1세기 후반에 부산·울산으로 진출하고, 가야와 항쟁하고 2세기 초반에는 실직국 등 동해안 일대를 공략하며 본국(本國)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여기에다 백제와 맞닿아 있는 사벌국을 복속시킴으로써, 백두대간 이북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신라 제14대 유례왕(재위 284∼298) 10년 사벌주의 부유한 민가 80여호를 사도성으로 옮겼다는 내용을 보면 신라에 편입된 후에도 상당기간 토착세력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져가는 흔적들 
고문헌뿐만 아니라 유적에서도 사벌국을 증명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사벌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병풍산이다. 병풍산 정상에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머물렀다는 토석 혼축의 병풍산성(또는 아자개성)이 있고, 산 능선을 따라 800기가 넘는 대형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고분 대부분은 수풀에 뒤덮이고, 도굴되면서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다. 병풍산성의 특징은 두 개의 봉우리를 연결, 가운데 골짜기를 막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벽내부는 흙을 채우고, 외곽은 어른 머리만한 돌로 쌓았다. 전체 길이가 1천700m인 산성 외곽은 1천900년 전의 웅장했던 사벌국의 모습을 가늠키에 충분했다. 산성내부에는 당시 건물들을 짓기 위해 만든 주춧돌 10여개가 남아 있다. 
병풍산과 사벌국의 연관성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병풍산 밑에 사벌국 고성이 있고, 신라 말 후백제 왕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했다. 사벌국(지금의 병풍산 일대)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직경이 10~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13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고"고 전한다. 

병풍산에서 직선거리로 2㎞가량 떨어진 사벌면 금흔리 성안산에는 상주에서 가장 오래된 이부곡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사벌국과 그 이전의 강대한 세력들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 정상(해발 170m)에 위치한 이부곡토성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경사면과 계곡을 U자 형으로 감싸안은 모습이다. 특히 정상에서는 상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성 아래에 동천과 병성천이 감싸고 돌아 자연적인 방어선이 구축돼 있어, 사벌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재는 2∼3m높이의 토성 흔적만 몇 곳 남아있을 뿐이다. 문제는 사벌국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고분 등 수많은 유적이 일제시대 도굴과 농경지 확대 등으로 대부분 파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1957년 상주시 은척면 하흘리에서 사벌국의 국인으로 추정되는 인장이 발견됐지만 서울로 감정을 보내는 과정에서 분실됐고, 예천군의 사벌왕비릉주변에서 발견된 지석도 사라졌다. 
김상호 상주시청 담당은 "병풍산성 일대에서 출토된 금관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며 "이 금관은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출토된 어떤 왕관보다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고 말했다. 또 "그 형식이 경주에서 출토된 왕관과 같은 것으로 미뤄보건대 아마도 사벌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국력의 창출지였고, 삼국통일 이후에도 왕경에 버금가는 신라 최대의 도시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전사벌 왕릉의 전설 
신라 경명왕의 둘째? 아니면 사벌국 왕릉? 
상주 사벌면과 상주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병풍산. 이곳에서 시골길을 따라 2㎞가량 가면 둔진산 남쪽 기슭인 사벌면 화달리에 높이 4.5m, 폭 16m규모의 거대한 고분이 나타난다. 
고분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삼층석탑과 상산박씨 문중의 재실 등이 있는 것 만으로도 고대왕릉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바로 전 사벌왕릉(傳 沙伐王陵)이다. 이 왕릉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전(傳) 사벌왕릉은 정사에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만 두가지 전설을 통해 사벌왕릉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병풍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사벌왕릉"이라고 전해진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 박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됐으나 백제의 공격으로 고립되자 사벌국을 세워 11년간 다스리다 견훤의 침공으로 패망해 묻혔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사벌면 화달리 달천부락에 사벌왕릉이라 칭하는 능이 있으며, 사벌왕은 신라 경명왕의 둘째로서 상산박씨의 비조"라고 기록돼 있다.

from [신비의 고대왕국 .7] 사벌국의 흔적을 찾아서영남일보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15. Retrieved 2010-06-30.


상주 박씨(尙州 朴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 상주 박씨(尙州 朴氏)의 시조인 박언창(朴彦昌)은 신라 경명왕 박승영(新羅 景明王 朴昇英)의 다섯째 아들로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ㆍ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후 본국과의 교통이 단절되자 후사벌국을 창립하여 시조가 되었다. 박언창(朴彦昌)의 12세손 박여(朴侶)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본관 : 상주(尙州)는 경상북도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상산(商山)이라고도 한다. 상산(商山)은 경상북도 서쪽에 위치하는 상주(尙州)의 옛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나 185년(신라 벌휴왕 2, 고구려 고국천왕 7)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불국)으로 독립해 오다가 신라 첨해왕 때 정벌되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君主)를 두었다.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 때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개칭되었다가 경덕왕 때 와서 상주(尙州)로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쳐 고려 성종(成宗) 때 귀덕군(歸德郡)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고려 현종 3) 다시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쳐서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가 조선이 개국하여 관찰사(觀察使)를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상주목이 상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0년 상주군(尙州郡)으로 개칭되어 함창군(咸昌郡) 일원이 편입되었다.

from 상주 박씨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15. Retrieved 2022-04-12.


총정리 :

*진성여왕 (김씨)(재위: 887년 ~ 897년)

(887년) 아자개 전, 헌강왕(憲康王) 11년(885)-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칭 사불성(沙弗城)의 장군.

(889년) 진성여왕 3년에 사벌주[사벌주(沙伐州) 또는 상주(尙州)]에서 원종·애노(元宗·哀奴)의 난

(889년) 견훤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 (견훤 원년)

(891년) 궁예 전, 진성왕 즉위 5년 즉 대순(大順) 2년 신해(891)에 죽주(竹州) 006의 도적 괴수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기훤이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며 예우하지 않았다. 선종은 속이 답답하고 스스로 불안해져서 몰래 기훤의 휘하의 원회(元會), 신훤(申煊)과 결연하여 친구가 되었다.

(892년) 견훤 :신라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 (견훤 무진주 점거)

아마도 '검교태보'를 더하다는 문장과 관련 있는 글. 

이때에 북원(北原) 064의 도적 양길(良吉)이 강성하여 궁예가 스스로 투탁하여 휘하가 되었는데, 견훤이 이를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892년) 궁예 전, 경복(景福) 008 원년 임자년(892)에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의탁하였다

*효공왕 (김씨)(재위: 897년 ~ 912년)

(900년) 오월 사신이 견훤에게 '검교태보'를 더하다.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일컫고. 

(901년) 천복(天復) 072 원년(901) 견훤이 대야성현재의 경남 합천군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01년) 궁예 전, [그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날 신라가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깨뜨렸다. 그런 까닭에 평양 옛 도읍은 무성한 잡초로 꽉 차 있다.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일찍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흥주(興州)현재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이다 부석사(浮石寺)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 왕의 초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다. 그 칼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904년)효공왕 8년에 사벌주의 30여 성(城)이 이미 후고구려에 침탈. 궁예 전, <삼국사기> 왈, 상주尚州 등 30여 주현을 쳐서 가졌다.

(??) 사벌주 본군(本郡)의 바로 옆인 고령군(古寧郡)의 가야유민들이 고령가야를 세워 반기

(910년) 개평(開平) 075 4년(910) 견훤 금성(錦城)현재의 전남 나주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노하여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써 그곳을 포위 공격하여 10일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912년) 건화(乾化) 077 2년(912)에 견훤 궁예 덕진포(德津浦) 078에서 싸웠다.

*신덕왕 (박씨)(재위 : 912년 ~ 917년 7월)(장인=제49대.헌강왕, 따라서 거의 40대에 사망 추정)

(??) 박언창(朴彦昌)('신라 54대 경명왕'의 5번째(상주박씨, 신증동국여지승람) 혹은 2번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의 아들)이 사벌대군에 봉해져서 사벌주에 부임 

(916년)(또는 918년=거짓사벌국 건국 

*경명왕 (박씨)(재위 : 917년 7월 ~ 924년)(태자: 912~917)

(917년)(또는 919년=거짓)에 박언창은 연락이 두절된 본국에서 자립해 후사벌왕(後沙伐王)이라 칭

(918년) 철원경 민심 이반, 궁예 실각, 왕건 등장.

(918년) 아자개 왕건에게 귀부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918)조에 “갑오일에 상주 반란군의 두령 아자개(阿字蓋)가 사절을 시켜 귀순하여 왔으므로 왕이 의례를 갖추어 그 사절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甲午 尙州賊帥阿字盖遣使來附 王命備儀迎之)”라 하여 918년 7월임.

(918년) (918) 또 사신을 오월에 보내 말을 바치도록 하니, 오월왕이 답례의 사신을 보냈다. 중대부(中大夫)를 더하여 주었는데,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920년) [정명] 6년(920)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 080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신라 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태조가 군대를 출동시켰다. 견훤이 이를 듣고 물러났다. 견훤은 우리태조와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경남 金海郡 進禮面 新安里·松亭里에 걸쳐 있는 토성, 즉 進禮山城을 가리킨다(김윤우, 「신라말의 구사성과 진례성고」, 《사학지》 22, 155~160쪽). 《삼국사기》 권36 주석 132 참조. 今西龍, 이병도, 신호철은 경남 청도로, 이재호는 전북 무주에 비정하였다. 《삼국사기》 권36 지리지 전주조에는 무주의 경덕왕대 군현 이름으로 進禮郡이 보이고 있으나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명왕 4년조에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으로 진군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무주설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828쪽).

*경애왕 (박씨)(재위 : 924년 ~ 927년)(상대등: 917년 8월 ~)

(924년) 동광(同光) 2년(924) 가을 7월에 아들 수미강(須彌强)신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聞韶城)현재의 경북 의성군 금성면이다. 두 성의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曹物城)《고려사》 세가  《고려사절요》의 태조 7년조 그리고 《고려사》권92 朴守卿 傳는 曹物郡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북 선산의 금오산성, 금릉군 조마면, 의성 등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정구복)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성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지키고 또 싸웠으므로수미강이 손해를 보고 돌아갔다.

(924년) 견훤조 (924) 8월에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흰 말(驄馬)을 바쳤다. 고려사》 世家와 《고려사절요》 太祖 9년 조에는 절영도의 驄馬로 기록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829쪽).

(925년) 10월에 견훤-왕건 전투. 12월에 견훤은 거서(居西) 384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동광] 3년(925) 겨울 10월에 견훤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니 태조도 또한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더불어 겨루었다. 그때 견훤의 군사가 매우 날래서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는 임시방편으로 화친하여 그 군사를 피곤하게 하려고 편지를 보내 화친을 청하면서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인질로 보냈다. 견훤도 또한 인질로 사위 진호(眞虎)를 보냈다.

(925년) 견훤조 (925) 12월에 거창(居昌) 등 2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925년) (925) 사신을 후당에 보내 제후국을 칭하도록 하였다. 후당에서 책명하여 검교태위(檢校太尉) 겸 시중(侍中) 판백제군사(判百濟軍事)를 주고, 전례대로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 백제왕(百濟王) 식읍 이천오백 호로 하였다.

(926년) [동광] 4년(926)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이를 듣고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하여 곧바로 왕신을 감옥에 가두었다. 또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낸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흰 말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태조가 웃으며 그것을 돌려 보냈다.

(927년)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월에 견훤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산양현(山陽縣))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니, 신라왕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927년 9월) 천성(天成) 091 2년(927) 가을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빼앗아 그를 불태웠다. 진격하여 신라 고울부(高鬱府)현재의 경북 영천시이다를 습격하였다. 신라 근교에 닥치니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927년)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에 천성(天成) 2년(927)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취(攻取)하여 불태운 기록이 보이는데, 근품성은 견훤의 출신지로 알려진 상주의 속현이다. 고향 지방에 대한 처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 견훤의 출신지가 상주라는 점과 아자개와 견훤이 부자간이라는 점은 의문점이 많다. (박경자, 「甄萱의 勢力과 對王建關係」, ≪숙대사론≫ 11·12합본, 1982).

*경순왕 (김씨)(재위: 927년 ~ 935년)

(927년) 태조는 정예의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견훤 공산(公山)현재의 대구 팔공산이다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 김락(金樂)과 숭겸(崇謙)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대목군현재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이다.을 빼앗았다.

(929년=거짓) 경순왕 원년(927), 박언창 사망.  ( 전 사벌왕릉(傳 沙伐王陵) : 1. 신라 54대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 박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됐으나 백제의 공격으로 고립되자 사벌국을 세워 11년간 다스리다 견훤의 침공으로 패망해 묻혔다. 혹은 2.신증동국여지승람 왈 "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병풍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사벌왕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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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언창 피살 이후, 아들 박욱은 망명

    박언창의 아들 박욱 = 고려 개국공신 (족보상: 朴昱, 타 기록상: 朴郁)

    朴郁은 밀양 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경명왕의 첫째 아들 밀성대군 박언침의 아들

     (박욱) 후손인 견(甄)을 중시조 화.

    (견훤이 아니라 '진'씨의 진훤일수도 있다. 견훤의 인질이었으나 죽은 사위는 진호(眞虎)이다. 당대 중국의 '견' 한자 발음은 '진'에 해당된다. '진' 발음은 '眞' 과 같다. 한국에서 '진' 발음은 '辰' = '眞' = '秦' 이 서로 같아서 구분되지 않는다.)

    박욱의 아들 = 박양유(朴良柔). 박양유는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고 기록된 인물. 

    즉, 상주 박씨: 경명왕 -> 朴彦昌(박언창) -> 朴昱(박욱) -> 甄(견 또는 진) 

    / 밀양 박씨: 경명왕 -> 박언침 -> 朴郁(박욱) -> 朴良柔(박양유)


2년씩을 높여서 기록한 중국계 한국인들의 날조와 달리, '경순왕 원년에 사망한 박언창 기록'과 '건국 후 11년에 멸망이라는 글을 참고해서, 날조를 고쳐서, 날조 년도보다 2년씩 낮추면 합리적인 타임라인(Timeline)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사벌대군 박언창의 재위기간을 917년 - 929년 으로 함은 중화계의 박씨에 대한 무시가 사상 기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계속 왜곡되어야만 조선이 중화계의 역사라는 날조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작성 중... 

(2022.06.15 01:55)

(2022.06.16 22:11)

(2022.06.18 21:58 마지막 작성)


#상주박씨 #밀양박씨 #경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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