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金國) 시조와 신라인(新羅人)의 관계(関係)

 금나라(金國) 시조와 신라인(新羅人)의 관계(関係)


완안 함보 (完顏 函普) : 941년 ~ 960년 (복간수 완안부 추장)

이름이 《대금국지》,《송막기문》에는 감복(龕福), 《흠정만주원류고》에는 합부(哈富)또는 함보(函普), 《신록기》에서는 긍포(掯浦)로 기술하고 있다.

원나라의 토크토아(Toqto'a)의 주도로 편찬된 정사(正史)인 《금사》(金史) 등에 등장하는 인물. 아우 보활리와 함께 9세기 신라 혹은 10세기 고려에서 살다 이주하여 복간수 유역의 완안부에 정착해 이후 일부 여진족 세력의 추장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의 5대 후손 완안 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한다.

100여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금나라가 세워지자 이후 1136년 금의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고, 1142년에는 그의 묘가 광릉(光陵)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듬해인 1143년에는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증시되었다. 


관련 기록들 :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이다. 고려에서 처음 올 때 나이가 이미 60여 세에 이르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신봉했으며, 고려에 남아 따라오지 않았다. 아고내는 말하기를 “후세 자손이 유능하다면 반드시 서로 만날 것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오직 아우 보활리(保活里)만이 시조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시조는 완안부의 복간수 물가에 거주했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했다. 그 뒤 호십문이 갈소관을 태조에게 바치며 귀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조상 세 분 형제가 서로 헤어져 떠나갔는데, 자신은 아고내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 금사 본기 제1 세기/ 국역 금사 1권 31~33쪽

호십문(胡十門)은 갈소관 사람으로 아버지 달불야는 요나라를 섬겨 태위가 되었다. (중략) 호십문은 족인들을 불러 모아 모의하여 말했다.
“우리의 먼 조상의 형제 세 사람이 함께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의 대성황제(大聖皇帝)의 할아버지는 여진으로 들어갔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남았다가 고려에서 요나라로 귀부하였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시조의 형 아고내(阿古迺)가 고려에 머물렀는데, 호십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열전 4 시조 이하 여러 아들, 종실/ 국역 금사 3권 83쪽

4년(1216년) 2월에 당시 상서성이 보고하였다.
“요동선무부사 완안해노가 말하기를, 참의관 왕회(王澮)는 일찍이 본조(本朝 금나라)가 고신(高辛 중국 한족의 시조인 황제(黃帝)의 후손인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을 계승하였으니 황제(黃帝 중국 한족의 전설적인 시조이자 신)의 후예라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서를 내려 유관부서에 물었고 장행신(張行信)은 보고하여 말하였다.
“시조실록(始祖實錄)을 살피건대 단지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일컬었을 뿐이고 고신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왕회가 말한 것을 돌아보건대 다만 광망(매우 잘못된)한 언어일 뿐입니다.”
황제(금나라 선종宣宗)는 그(장행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 열전 제 45 장행신/ 국역 금사 4권 214~215쪽

- 금사 (단국대학교 번역)

是月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更名旻國號金. 其俗如匈奴諸部落無城郭分居山野無文字以言語結繩爲約束. 土饒猪羊牛馬馬多駿或有一日千里者. 其人鷙勇. 爲兒能引弓射鳥鼠及壯無不控弦走馬習戰爲勁兵諸部各相雄長莫能統一. 其地西直契丹南直我境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以麩金貂皮良馬爲贄我朝亦厚遺銀幣歲常如此.

이 달에 생여진(生女眞) 완안부(完顔部)의 아골타(阿骨打)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旻)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그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었고 백성들은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또 문자가 없어서 입말과 결승으로 의사를 소통했다. 그 지역에는 돼지·양·소·말 등의 가축이 풍부했으며 준마가 많아 그 중에는 하루에 1천 리를 달리는 것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납고 용맹하여 아이 때부터 활로 새나 쥐 등을 쏘다가 커서는 활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서 전투기술을 익혀 강한 병사가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부락이 저마다 그 중에서 으뜸 간다고 다투는 통에 부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땅은 서쪽으로는 거란, 남쪽으로는 우리 영토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옛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 왔다. 입조해올 때마다 사금(砂金)·담비 가죽·좋은 말 따위를 예물로 가져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해마다 은화를 후하게 주곤 했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遁入女眞居阿之古村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初入女眞阿之古村娶女眞女生子曰古乙太師古乙生活羅太師.

혹자는, "옛날 우리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족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선조."라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애초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는,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했다. 고을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슬기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했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인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

- 예종 10년(1115) 을미년, 고려사 권14 사 세가

금(金)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나이가 이미 60여 살이었다...(후략)
- 《금사》 권1 본기1 <세기>(世紀)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 《송막기문》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 만주어: 하푸) 또는 함보(函普)는 원래 고려에서 왔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는 본래 신라로 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데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 나라가 종종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금나라의 황족들은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흠정만주원류고》卷7 <部族 完顔>


금사 기록 : 완안 함보는 고려인이다.

송막기문 / 금지 : 금 왕실의 선조는 신라인이다.

송막기문과 금지의 기록이 금사 이전의 기록이다. 또, 금사 [열전 제 45 장행신]에서 중국인 출신의 참의관 왕회(王澮)는 "일찍이 본조(本朝)가 고신(高辛)의 후손인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을 계승하였으니 황제(黃帝)의 후예" 라는 방식으로 늘 중국인들이 행하듯 역사 날조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의도적 오해와, 의도성을 희미하게 보임으로써 발뺌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는 방식은 금나라에게도 행해졌고, 이는 지속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서, 송막기문과 금지의 금 왕실의 선조는 신라인이지만, 기록의 왜곡으로 인해서 선조는 고려인이다라는 기록으로 변경된 것이다. 먼 미래의 날조의 포석을 두기 위함이다. 서구에 체스가 있다면, 중국에는 바둑이 있으며, 바둑은 하나하나의 포석을 통해 최종적인 승리를 목표로 한다. 중국인들에게는 이 승리가 날조의 완전한 성공이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중국에서 실시한 완안(完顏)씨족에 대한 Y-하플로그룹 분석에 따르면, 완안의 다수의 하플로(33.33%)는 O-MF303032이며, 하플로 O-CTS713에 포함되는 집단이다. (링크)

자료 출처: Wan Yan23Mofang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05. Retrieved 2022-06-05.

그리고, haplo O-CTS713은 haplo O-47z(O1b2)의 하위 하플로 그룹이다. 과거에 어떠한 역사가 발생하였는 가는 명백하다.


그리고 추가 참고 자료를 통해서 고찰해보면, 당대 '여진족'이라는 집단은 이전 말갈 민족과 요나라에게 멸망한 발해 민족의 융합체이며, 이 발해의 발해-일본 무역루트를 승계했기 때문에, 이들 집단이 '도이의 난(刀伊の入寇)'이라고 기록되는 해양 해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만주족의 하플로에서 19% 정도 발견되는 하플로 O1b2에서 확인됩니다. (단, 만주의 랴오닝성과 내몽골의 접경 지역의 만주족에게서는 2%의 비율만 나타난다). 

신라(BC57~935)가 멸망한 뒤, 고려(918~1392) 치하에서 반도 동부 해안에 있던 옛 신라계(系)들은 고려에게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옛 振國(=발해)의 후예들과 반도 동부 해안을 통해서 교역하고, 성장을 지원했을 것입니다. 완안씨는 이 과정에서 이동한 시조입니다.

발해의 이름은 당나라가 부른 명칭일 뿐입니다. 그들의 정식국호는 진국이었으며, 일본에게는 고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국명은 정체성 정치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당나라는 진국이라는 명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추후 미래에 중화의 외연확장을 위해서 고의적으로 '발해'라는 명칭을 기록합니다. 반대로 진국은 미래의 중화날조를 방지하고 반도와의 연계성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 '진국'을 국명으로 사용합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고, 금나라의 대표적인 명장은 사묘아리(斜卯阿里)와 완안종필(完顔宗弼)입니다. 이 중, 완안종필은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종필(宗弼)'은 한식 이름이고, 여진식 본명은 '올출(兀朮)'입니다. 그래서 완안올출이라고도 불립니다. 사묘아리의 작호는 한국공(韓國公)입니다. 완안종필의 작호는 윌국왕(越國王)입니다.  

동부해안을 통해서 고려(918~1392) 치하의 옛 신라계와, 요나라 치하의 여진족(말갈족+발해족)은 교류를 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는 '윤관의 여진정벌', '강동6주', '동북9성' 자료 참고. 라고 추정합니다.(작성 중...)

하지만 어처구니 없는 점은, 현대 김씨의 Frequency of Y haplo in Korean surname Kim에서는 O1b系 비율은 28.8%에 불과하며, 하플로 C2b가 21.2%를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재미있게도 김씨 중에서는 haplogroup L이 0.5% 존재합니다. 해당 하플로는 인도 서북부에 분포합니다). 해당 하플로 C2b는 흉노족의 유전자이며, 이들은 신라 초기 혹은 중기에 존재하던 하플로가 아닙니다. 이들은 당나라 시대에 신라 왕조가 김씨라는 소문을 듣고 적극적으로 이민을 온 가짜들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신라 김씨 흉노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집단입니다. 

자료 출처: 47z M128NaverBlog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08. Retrieved 2022-06-08.

이러한 김씨들 사이의 섞이고 달라붙음으로 인해서 박씨들은, 흉노 김씨들이 박씨들과 신라 고대를 평가절하하고 공격함에 대해서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씨들은 이러한 섞임으로 인해서 친일적 발언이나, 친중국적 발언을 해도 섞임에 의한 보호를 받지만, 섞임의 비율이 비교적 낮은 박씨들은 그러하지 못하고 있네요. 또 구분 안되는 김씨 전체에 대해서 반격을 한다면, 이는 고대 김씨까지도 평가절하하고 공격하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에게 칼을 찔러넣는 경우가 될 뿐입니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자 하는 흉노 김씨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추가 참고 자료:

1.

刀伊の入寇

from: 刀伊の入寇Wikipedia(JP)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07. Retrieved 2022-06-07.

2.
1019年 刀伊の入寇が起こる

from: 刀伊の入寇が起こるBlog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07. Retrieved 2022-06-07.

3.

『刀伊の入寇』に見る危機対応 事態決する「地方の創意」

from: 『刀伊の入寇』に見る危機対応 事態決する「地方の創意」毎日新聞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07. Retrieved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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