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형》에는 탁리(橐離)국, 《후한서》에는 색리(索離)국, 《위략》에는 고리(高離)국 - 중국인들의 역사왜곡 사례 -

 《논형》에는 탁리(橐離)국, 《후한서》에는 색리(索離)국, 《위략》에는 고리(高離)국 

- 중국인들의 역사왜곡 사례 -



기록에 따르면 부여인은 스스로를 망명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三國志魏書 東夷傳 夫餘 >>>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似也

하지만 이 뒤에 후술된, 

《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

이 기록을 통해, 부여가 고리의 후예라는 주장은 위략 저자에 의한 추측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한시대 《논형》에는 탁리(橐離)국, 《후한서》에는 색리(索離)국, 《위략》에는 고리(高離)국으로 기록된다.

여기서 탁리국의 발음이 점진적으로 고이(藁離 / 高離)에 가깝게 왜곡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論衡 / 09 >>> 夫后稷不當棄,故牛馬不踐,鳥以羽翼覆愛其身。昆莫不當死,故烏銜肉就而食之。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王欲殺之。( Link: https://zh.wikisource.org/wiki/論衡/09 )

後漢書 / 卷85 >>> 夫餘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初,北夷索離國王出行,其待兒於後妊身,王還,欲殺之。( Link: https://zh.wikisource.org/wiki/後漢書/卷85#高句麗 )

三國志魏書 東夷傳 夫餘 >>> 《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

三國志魏書 東夷傳 夫餘 >>> 《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鱉浮爲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 Link: https://zh.wikisource.org/wiki/三國志/卷30#夫餘 )

( Translation : "옛날 기록에는 북쪽에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왕에게는 시녀가 임신한 채가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시녀는 말했습니다. '닭알처럼 기운이 내려와서 제가 임신한 것입니다.' 이후 아이를 낳았는데, 왕은 그를 더러운 목욕탕으로 버렸습니다. 돼지가 코로 살피자 아이를 숨죽이고, 그 아이는 말의 코로 살피자 숨을 쉬었습니다. 왕은 이를 천자로 보았으며,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가 기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아이는 동명이라는 이름을 받고,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동명은 화살을 잘 쏘았는데, 왕은 그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까 염려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동명은 도망쳐 남쪽의 시엄수(施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쏘니 물위에 물고기와 거북이가 떠오르고 다리처럼 되었습니다. 동명은 물 위를 건너고, 물고기와 거북이는 사라져 추격하는 군대는 건널 수 없었습니다. 동명은 이후 왕의 남은 땅에 이주하였습니다." )



'고리/색리국/탁리'는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증거는 없지만 일부 기록에서 언급되는 국가입니다. 이 국가에 대한 기록은 '탁리', '색리', '고리'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탁'과 '색'은 모두 '고'를 잘못 쓴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왕충(후한)이 쓴《논형》에는 '탁리(橐離)', 《삼국지》의 주석 중 하나인 배인(裵駰)의 주석에 인용된 《위략》에는 '색리(索離)', 《후한서》에는 '색리(索離)',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 부여에 인용된 魏略》에는 '고리(高離)'로 나타나는데, '탁(橐)'과 '색(索)'은 모두 '고(藁)'를 잘못 쓴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 한국과 중국학계의 통설이다. 고리국에 관한 기록은 사서뿐 아니라 《수신기》같은 위진남북조대의 소설에서도 확인된다. 이를 통해 '소설'을 통해서도 강조하고 싶어하는 중국인들의 욕망을 드러낸다.

일주서(逸周書) 왕회 편에 나오는 고이(高夷)에 대해 4세기 초 진의 공조(孔晁)가 "고구려는 일명 구려라고 하는데, 옛날의 고이'라고 한 주석에 근거하여 나온 것이다. [박대재, 2005]

박대재. (2005). 古朝鮮의 ‘王’과 國家形成. 동북아역사논총, (7), 145-175. (Link)

逸周書 (四庫全書本) / 卷07 >>> 北方臺正東髙夷嗛羊嗛羊者羊而四角 〈高夷東北夷髙麗句〉 獨鹿卭卭距虛善走也 〈獨鹿西方戎卭卭獸似距虚負厥而走也〉 孤竹距虚 〈孤竹東北狄距虚驢騾屬〉 不令支 𤣥模 〈不令支皆東北夷𤣥模黒狐也〉 不屠何青能 〈不屠何東北夷〉 東胡黄羆山戎菽 〈山戎東北夷戎菽荳藥也〉 其西般吾白虎 〈次西般吾北狄近西〉 屠州黑豹 〈屠州狄之别也〉 禺氏騊駼 〈禺氏西北戎夷騊駼馬屬〉 大夏兹白牛 〈大夏西北戎兹白牛野獸〉 犬戎文馬而赤鬛縞身目若黄金名古黄之乘 〈犬戎西戎逺者〉 數楚毎牛毎牛者牛之小者也 〈數楚北戎〉 匈戎狡犬狡犬者巨身四尺果皆北嚮 〈匈戎北戎〉 ( Link: https://zh.wikisource.org/wiki/逸周書_(四庫全書本)/卷07 )

일주서(逸周書) 왕회 편에 나오는 고이(高夷) 또한 중국계 민족들의 조작 욕망이 첨가되어있다.






부여국의 시조로 알려진 "동명"은 고리국의 영품리왕으로부터 탈출하여 부여 지역에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이 설화는 고구려의 추모왕이 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도주한 이야기와 유사한데, 이 이야기가 영향을 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이에는 여러 이상한 왜곡들이 첨가되어 있음 또한 추측됩니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자면,


북이(北夷) 고리국 왕의(영품리왕 추정) 시비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죽이려 하니, 시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달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로 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자 돼지 우리에 던져두었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으니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두어 말이 밟아 죽이도록 하였으나, 말이 또한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이 하늘의 아들[天子]인가 여겨, 그 어미가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았기에 왕은 나라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풀어버리니 추격하던 병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했을 때, 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고, 버렸으되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고, 성장하자 왕이 죽이려 함에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어 주었다. 이는 천명이 그 죽음을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돼지와 말이 목숨을 구해줘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된 것이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는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 《論衡 권2 <길험>편


옛 기록(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의 아들(天帝子)이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각주: 요나라(大遼) 의주(醫州) 지역에 있다.) 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을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각주: 아래에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 권 제1 <紀異> -북부여조-


《주림전》(珠琳傳) 제21권에 쓰였으되, “옛날 영품리왕(寧禀離王)의 몸종이 태기가 있어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아이를 낳으면 귀히 되어 반드시 왕이 되리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몸종이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기운이 뻗쳐 내렸으므로 내가 아이를 밴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그가 아들을 낳게 되매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덥히고 마굿간에 버린즉 말이 젖을 먹여서 죽지를 않고 필경은 부여왕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각주: 이것은 동명제(東明帝)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 《삼국유사》 권 제1 <紀異> 에서 -珠琳傳-을 인용함. (+여기서 언급되는 珠琳傳이 무엇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당(唐) 고종 총장 원년(668)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牟頭婁)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泉男産)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開國),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었고(開都), 위엄이 해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힘이 蟠桃(전설속의 이야기)의 속()을 제(制)하였으니,

: <연남산 묘지명> 금석문 中

洛阳(Luoyang)에서 발견된 연남산 묘지명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은 조선사람이다.

from: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6-03-06. Retrieved 2010-12-17.






고리국의 위치는 부여 북부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청동기 문화를 형성한 반농반목 문화권과 후에 부여의 전신이 되는 서단산(쓰퇀산) 문화권, 그리고 송눈평원(현재의 송원시 일대/하얼빈 시 서남쪽) 지역의 백금보-한서2기문화권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합니다.

고리국을 고구려와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는 건국 이야기가 유사하며, 두 국가가 '고리', '고구려', '구려', '고려' 등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 중 하나로 고주몽이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계승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고구려의 명칭은 고주몽의 성인 '고'와 '고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한 '고리'는 '골(짜기)', '고을', '마을' 등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음의 유사성을 들어서 고리국과 고구려를 연결시키는 방식을 사용하며, 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음의 유사성을 들어서 연결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 인물이 이병도인데, 가져다 붙이기 아니냐는 평을 받는다. 또한 고리국의 실체를 고구려로 인정하면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가 무한루프에 빠지게 된다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는 고리에서 부여가 나왔다는 전설과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다는 전설, 그리고 '고리=고구려'라는 전제를 합치면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동명성왕의 건국 이전부터 고구려라는 민족 집단이나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高麗(고려) 등의 여러 이름으로도 기록됩니다. 즉 '탁리/색리/고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여러 이름들 중 하나로서 고주몽(高朱蒙)이 부여의 시조 동명왕을 계승하고자 고리에서 이름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동이족 * 고이족 관련 주장:

- 중국 "고구려인 조상은 중국 고이족"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3041212828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고구려가 중국 황제족의 후손 중 하나인 고이족의 후손이고 고구려가 현토군의 영역 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지방정권'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동북공정의 논리이자 표현법"이라고 지적했다.)


지안 고구려비 관련 자료 :

- ‘지안 고구려비’는 언제 만들어 졌나? 또 논란…,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582583.html2013-04-12 19:47.

- 中 “지안 고구려비,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642477, 2013-04-12.

- [기고문]고구려사 문제, 단호하고 당당히 대처하자, 박흥신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https://www.mofa.go.kr/www/brd/m_4095/view.do?seq=302250&srchFr=&srchTo=&srchWord=&srchTp=&multi_itm_seq=0&itm_seq_1=0&itm_seq_2=0&company_cd=&company_nm=, 2004-01-28, 



중국 고구려 세계유산의 현황과 활용 -박물관 및 기념 조형물을 중심으로-, 조법종, 우석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비석머리의 조형물인 양은 자연 순박하고, 고개를 들고 바라보며 자태는 풍만하고 건장하여 중국고대 서한시기 중화민족 북방고구려민족의 웅대한 시대풍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4)

4) http://www.yahqq.com/blog/blog.asp?blogid=1345&viewid=2887

고구려시조비의 내용을 북방민족 신화와 연결된 사각양으로 묘하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어 고구려역사 왜곡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2010년에는 박물관 외부 상단 대형 기념품센터 건축현장 맞은편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비에 제호를 각석하여 이수 부분에 위치하였던 산양 모습을 떼어내 박물관 앞으로 옮 기고 대신 새로운 이수인 용모양과 삼족오를 조합한 상징물로 교체하여 “고구려시조비”라 는 내용으로 재설치하였다.

고구려가 중국 高夷族의 후손이며 중원의 소수민족으로 중국내 고구려 정권을 주몽이 새 웠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고착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산양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여 고구려를 고이족의 후손임을 암시적으

로 표현하여 고구려가 중국내 소수민족중의 하나인 북방민족이며 주나라시기부터 이미 고 구려의 선조인 고이족이 중원민족에게 복속되어 있었다는 식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설명문 내용을 보면

“嗛羊은 4가닥의 뿔을 달고 있는 양으로 고대 북방의 양이다. 《逸周書》에 기원전 1035년 주성왕의 성주대회시 고이가 공헌품으로 중원에 바친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일주서의 실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逸周書》王會解 “北方台, 正東高夷兼羊. 兼羊者, 羊而四角. ”注:“高夷, 東北夷高句驪.”關于高夷卽后來高句麗5)

사료에 언급된 高夷에 대해 후세 학자들이 고구려로 세주를 달고 있는 내용을 활용하여 중국학계에서는 고이와 고구려를 연결지어 고구려가 고이후손이라는 논리를 강조하고 있 다. 이미 이 논의는 국내학계의 비판과 문제점 지적이 진행되었다.

5) (《東北通史》 上冊第77, 78頁, 社會科學戰線出版社)

from : 고구려 유산의 현황과 활용 그리고 전망 - , 고구려발해학회 2014년 정기학술대회 





예(濊)에 대한 추가 자료 :

북명(北溟):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후대에 오늘날의 강릉을 치소로 하여 명주(溟州)가 두어졌음을 감안하면, 동해안의 강릉 이북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동예(嶺東濊)가 거주하던 지역이다.

예왕(濊王)의 도장: 한(漢)을 위시한 중국 왕조가 영동 지역의 예족 우두머리에게 내린 도장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예(濊)조에는 정시(正始) 6년(245)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이끄는 위(魏)군이 당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영동예(嶺東濊)를 정벌하자 불내후(不耐侯) 등이 항복하였고, 8년(247)에 이들이 조공을 바쳐오니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참고로 지난 1966년에 경북 영일군 신광면 마조리(현 주소는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흥곡리)에서 「「진솔선예백장」명 동인(「晉率善穢佰長」銘 銅印)」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동해안을 따라 예족이 광범위하게 분포하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평가된다(강종훈, 2020, 『사료로 본 한국고대사』, 지성과인성, 62~64쪽). 본 기사는 아마도 이같은 상황을 반영하는 어떤 전승에 토대를 두고, 위에 소개한 『삼국지』 기사를 참고하여 부회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예왕지인(濊王之印)’은 『삼국지』 권30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에서 부여가 예의 땅에서 건국된 나라임을 거론하면서 언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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