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중국신화계도 | 秦楚의 역사 | 秦이 당한 역사왜곡 | 道敎의 허구성 | 漢의 성질

방학동안 제가 Thread에 작성한 글을 옮겨서 작성합니다.

Thread란? 스레드(영어: Threads)는 미국 기업 메타 플랫폼스가 소유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및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이다. 사용자 간에 '스레드'이라는 형태의 메시지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from: 스레드 (애플리케이션). Wikiped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년 7월 6일 02:24 UTC. Retrieved from 2023년 9월 5일 12:20 UTC.


[#동양사] 中国神話〜春秋時代系図

秦의歴史問題:because, 伯益≠栢翳

2000년 동안 진나라인들은 왜곡 당한듯?


[#동양사] 진나라(秦)와 초나라(楚)의 역사

진나라의 시조 이전에 대해서는 소호(少皞)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진나라의 역사서 진본기(『秦本紀』)에는 전욱(顓頊)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가장 먼저 작성했기 때문에, 진나라인 스스로는 전욱(顓頊)의 후손으로서의 인식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들어, 진시황제의 양어머니는 초나라(楚) 사람이었고, 진나라 멸망과정에서 잠깐동안 초나라와 왕실이 부활한 이유도 진나라인들이 초나라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초나라 입장에서도, 진나라 대항 연합에서 가장 먼저 탈퇴한 국가는 초나라였다.

이렇듯 두 국가는 복잡미묘한 우호관계였으나, 현대 중국인의 조상집단은 이러한 숨겨진 이유와 전혀상관이 없었다. 이러한 복잡한 배경은 전혀 신경쓰지도 않는 중국인들이 두 국가의 전통성을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가끔 가짜들이 진(秦), 초(楚)라는 이름을 모방하는 것을 제외하면, 두 국가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점에서 중국인을 진나라, 초나라를 계승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양사] 진(秦)에게 적용된 역사왜곡

사서를 통해 진나라가 경험했던 중국인에 의한 다양한 역사왜곡을 확인가능하다.

'진본기'(『秦本紀』)에 따르면 진시황은 장양왕의 아들이다. 그러나 『여불위열전』에 따르면 장양왕의 첩은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장양왕에게 시집갔는데, 그때 낳은 아이가 진시황이다. '사기(史記)'는 진시황은 장남인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도록 유언했는데, 조고가 이사와 짜고 황제의 유서를 조작해 후해가 황위를 계승하도록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2009년에 발견된 '조정서'(『趙正書』) 죽간 내용과 모순된다. '조정서'의 발견으로 시황제의 죽음에 관한 '사기(史記)'의 기록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진시황제가 분서갱유를 통해 죽인 집단은 반란의 위험이 있는 타국의 귀족이 아니라 기록을 조작한 유가 집단이며,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중국인들의 진(秦)왕실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얼마나 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동양사] 도교(道敎)를 공부해보고 느낀 점

태극은 '노자'의 발명품일까요? 아니요 태극은 선사시대부터 존재하던 문양이며 그가 재창작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천전리(川前里) 암각화, 알렉세이 오크라도니코프의 아무루강 일대 암각화(탁본) 수집본, 아즈텍 마야 문명에서도 태극문양은 발견됩니다. 태극상징은 본래 태양을 상징하는 형태였으나, 중국에서 변형되어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거의 중국인들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노자의 정의에 의한 음양, 남자와 여자의 의미부여는 어디까지나 주장이란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의 사상에는 방중술로 신선이 된다거나 좀 이상한 사상이 많다고 느낍니다. 도교는 역사적 가치로서 공부하는 것이고 진심으로 공부는 하지 마세요. 궁금해서 공부해본 입장에서 왜 도교가 중국에서 사라졌는지 알 것 같습니다. 괴력난신 숭배 = 도교. 괜히 공부했어.😠


[#동양사] 한나라(漢)의 성질-1

전에 작성한 [#동양사] 글에 이어서 한나라의 건국에 대해서 한번 새롭게 글을 작성해보겠습니다. 한나라(漢)는 통일 진나라(秦)의 분열 이후 기원전 202년 탄생했습니다. 한나라는 중국문화권에서 덕(徳)의 의미를 설명할때 주로 등장합니다. 중국문화권에서 한나라의 건국자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의 전쟁에서 지속적으로 패배하지만 '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미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공이 온전히 '덕'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동양사] 한나라(漢)의 성질-2

당대 중국지역에 살던 민중의 지지는 '덕(徳)'과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당대 유력한 권력집단은 초나라(楚) 왕가, 공격받던 진나라(秦) 왕가, 진나라를 공격하던 항우(項羽) 집단과 유방(劉邦) 집단입니다. 이들 중에서 왜 유방 집단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것일까요. 진나라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가혹한 통치를 펼쳤기에 중국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는 그 민족집단에게 몰락했습니다. 초나라는 정통성을 가졌으나 진나라가 통일해둔 지역의 전체적인 주요 민족은 초나라(楚)를 지지하던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진나라와 조상이 같다는 점도 지지하지 않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제 중국 대중과 이를 구성하는 민족집단은 제요(堯)의 후손을 자칭하던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楚覇王項羽) 둘중에서 지지할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들 중에서 제순(帝舜)에게 제위를 양도한 전설이 있는 제요(帝堯)의 후손이 차선의 선택이라는 암묵적 인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중국 남부계의 입장에서도 제요의 유방(劉邦)은 허용 가능한 지지 대상입니다.

[#동양사] 한나라(漢)의 성질-3

이러한 중국 내부 민족집단들의 암묵적 합의의 결과로 유방(劉邦)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이것을 '덕(徳)'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로 단순하게 표현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나라의 국명은 본래 중국 남부에 있던 한수(漢水)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방의 인물묘사는 아주 특이합니다. 그는 팔이 매우 길다는 묘사가 있는데, 왜 황제에 대해서 이런 특이한 묘사를 한 것일까요. 사실 이것은 정치적 묘사입니다. 장비국(長臂國)의 전설은 본래 중국 남부의 전설이므로, 유방(劉邦)은 스스로의 외형 묘사를 통해 중국 남부민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입니다. 외형 묘사는 어느정도 사실이 포함되었겠지만, 정치적 목적의 과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유씨(劉氏)의 한나라는 주로 중국 북방의 그 민족으로 구성되며, 남부 민족의 지지도 받던 형태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기존에 중국이라는 개념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던 남월(南越) 지방이 한나라 시대에 안정적으로 흡수되었습니다.

[#동양사] 한나라(漢)의 성질-4

이런 배경에서 역대 황제의 면관에는 곤충의 상징성이 이용되었습니다. 산해경(『山海経』)에 따르면, 곤충은 3개의 흙에서 출합니다. 여와복희도(女媧伏羲圖)를 사용한 고창국(高昌國)이 스스로를 한인으로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다만 복희의 존재성에는 의문이 존재합니다. 왜냐면 본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삼황본기가 없었으나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 삼황이 역사에 포함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의 조작 역사를 고려하면, 그 삼황 중에 하나인 복희의 신뢰성은 매우 낮습니다.



: 위 내용은 2023-07-24 ~ 2023-07-31 기간동안 작성한 제 스레드(Thread) 게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작권 조항을 철저히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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