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近東] 이집트 제1왕조를 개창하는데 수메르인들이 도움을 주었는가?

이집트 제1왕조를 개창하는데 수메르인들이 도움을 주었는가?

: 이 글은 『오흥식. (2016). 이집트 제1왕조의 개창과 메소포타미아. 서양고대사연구, 44, 7-52』 논문에 대한 약요(略要)입니다.

I. 이집트 최초의 왕조 개창
II. 도상증거
III. 유물증거
IV. 문헌증거

I. 이집트 최초의 왕조 개창

  이집트 최초의 왕조는 어떻게 건설되었을까? 델타 하류 & 상류 지역. 기원전 30세기 정도에, 두 지역이 통합되면서 최초의 이집트 왕조가 건설된다. 개창한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두 주장이 양립하고 있다. 첫째, 이집트 최초의 왕조는 토착인이 아니라 수메르 사람들이 와서 개창한 것으로 추정하는 주장. 둘째, 이집트 토착민들의 역량이 축척이 되서 개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0세기 중반부터 이집트 토착민들의 역량이 축척되어 개창되었다는 주장이 강세를 이루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확실한 논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첫번째 주장에 대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집트학의 창시자 플린더스 페트리는 후대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가 되는 수사(엘람의 중심도시)의 선왕조 시대 아이콘은 수사(= 즉, 메소포타미아)의 것을 닮았다고 주장한다.
(제1왕조 이전의 왕조를 “先왕조”라고 부른다)
한편, 1980년부터 마이클 호프만에 의해 이집트의 제1왕조는 이집트 자체의 역량의 축척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주장이 보편화된다. 현대 정통론은 마이클 호프만의 주장이다. 즉, '메소포타미아의 도안을 닮았으나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게 그들 주장의 요지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도상 증거와 문헌적 증거들을 고찰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개창에 수메르인들이 관련이 있는 것이 전혀 가능성 없는 것은 아니다.

II. 도상증거

  도상증거를 살펴보자. 겔벨 엘 아라크 (겔벨: 산, 언덕 / 아라크: 테베 근처에있는 지역명) 돌칼의 앞면과 뒷면의 도상을 살펴보고, 제 1왕조 이전의 선왕조(제0왕조)(나카다3기, 3200-3000BC)의 나르메르 화장판에 세겨진 도상들을 비교하면 수메르의 도안과 매우 닮았다. 먼저, 겔벨 엘 아라크의 앞면의 도안과 뒷면의 도안을 살펴보자,
하마 송곳니로 제작된 겔벨 엘 아라크 손잡이의 뒷면에는 육상전투 그리고 해상전투를 그리고있다. 이것은 외부 침입자들의 배(꺾인 선두로 묘사된 배)를 사용하고, 이집트 전통의 선실이 있는 배 를 사용했음을 제시한다. 때문에 겔벨 아라크의 뒷면은 침략자 집단과 이집트 집단 사이의 전투를 묘사함을 알 수 있다. 또,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원통형 인장에 새겨진 배 도상은 뱃머리와 뱃꼬리가 확 꺾인 배의 모습이며, 이것은 침략자 집단이 메소포타미아 출신임을 드러낸다..
앞면의 도안을 살펴보자. 앞면에는 메소포타미아의 두 사자를 제압하는 사람이 묘사된다. 사자는 기온이 낮은 동물이며, 또 사람의 옷이 두툼한 것에서 추정된다, 열대지역의 존재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엘람의 수사에는 두 사자를 제압하는 도상이 있다. 때문에 페트리는 ‘겔벨 아라크’ 도안의 사자는 '수사'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리 上으론 ‘자그로스 산맥’의 西南, 수사(엘람의 중심도시)의 西南이 메소포타미아 평원이다.

이번에는 나르메크 화장판을 보자.
 이 유물은 제0왕조(나카다 3기, 3200-3000BC)의 지도자 나르메르의 화장판이다.
화장판의 앞뒷면의 꼭대기에 왕명의 사각형인 세레크(serekh)가 있다. 왕의 이름은 “나르메르(Narmer)이다. 5왕조부터 “카르투쉬”가 등장하며, 그 이전에는 “세레크(serekh)”를 사용한다. 5왕조부터 下이집트는 백합&독수리(새매=호루스)가 상징이었다. 

(1.연꽃 도상) 
上이집트는 연꽃과 코브라뱀이 상징이다. 수사에서 발견된 엘람 원통형인장의 연꽃은 본래 동물에 대한 영웅의 지배력을 나타내다가, 인간에 대한 권력자의 지배력을 나타내게 된다. (그림16)을 참고時 나르메르 화장판의 연꽃 도상을 둘러싼 직사각형은 왕궁이나 신전의 정면을 대단히 간단하게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2.새매 도상) 
이집트에선  나카다 2기부터 새매 도상이 나타난다. 나르메르의 수호신 새매가 마치 소를 다루듯이 적의 코를 줄로 꿰어 발로 잡고 있고, 앞면 두번째 단에는 새매가 나르메르의 기치로 사용된다. 세레크(serekh)는 ‘(신전이나 왕궁의) 건물정면을 의미한다. 
또, 세레크 위에 새매 도상은 (그림 24)의 나르메르 공적패와 연관된다. 나카다2기의 초기 도안(그림 26)에는 메소포타미아형 배의 끝단에 새매가 앉아있다, 마찬가지로 우트나피쉬팀의 도시 메소포타미아 슈르파크에서 초기왕조 2기(2750/2700~2600BC)의 원통형 인장(그림 25)에도 배의 끝단에 새매가 앉아있다.
“나르메크” 왕의 이름은 사각형 세레크 안에 작성된다. 이 관행은 제1왕조, 제2왕조에도 지속된다. 제3왕국(고왕국)부터 타원형 카르투시 안에 작성한다. BC3000년전, 초기왕조의 제1, 2왕조와 그 뒤의 고왕조 3,4,5,6,7왕조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나르메르의 이름이 사각형 모양의 세레크에 작성되던 것이다. 고왕국부터 세레크는 신전을 나타냄으로 변경된다. 이집트 도상의 세레크 속에는 댄(1왕조의 4대 파라오)이라는 명칭이 확인되므로 한번 더 확신된다. 
‘나르메크 화장판'에는 상이집트의 지배자가 쓰는 백색 왕관이 새겨져 있는 데, 수사의 원통형인장도 안에서도 백색왕관의 도상이 도안의 첫단, 약간 왼쪽에 있다. 사무엘 마크는 “백색 왕관은 원래 수사나 메소포타미아의 관(冠)이었던 같다”고 보았다. 기원전 3000년 전에, 상이집트의 백색 왕관과 하이집트의 적색왕관이 있었다. 상하 이집트가 통합되면서, 이 두 개의 왕관도 상하이집트를 나타내는 이중왕관으로 합쳐졌다.
또 주목할 것은 백색 왕관을 쓴 인물의 뒤에 초승달 기치를 든 사람이 있다(그림 33, 그림 35)는 점이다.
 겔벨 엘 아라크의 도상에 있는 백색 왕관을 쓴 선왕조의 파라오(그림 34, 그림 36, 그림 37)
두 목을 얽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들도 세겨져 있다. 나르메르 화장판의 우르크 Jemdet Nasr(3100-2900BC)의 두 마리의 사자가 목을 얽고 있는 도상. 이 둘은 유사성을 가진다. 

III. 유물증거

  쿠쉬 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적 유물이 발견된다(1907년). 조지 라이즈너(George A. Reisner)는 나일강의 제1폭포 ~ 제2폭포 사이에서 기원전 3800년 ~ 기원전 2800년까지 (제2왕조 시기까지)의 소위 ‘A-Group Culture’를 형성한 집단의 유물을 발견한다. 쿠스툴(Qustul)에서 발굴된 향로에 세겨진 도상은 메소포타미아와 연관되어 있었다. 쿠스틀에 상이집트의 도상 (동시에 메소포타미아의 도상들)과 비슷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아라비아 반도를 둘러서, 홍해로 들어가서 나카다와 테베 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접촉의 경로를 살펴본다. 하이집트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수사'적 도상이 없으므로 주로 나일강 삼각주가 아닌, 남부 홍해를 통해 테베에 직접 전해졌다고 본다. 
그런데 홍해의 서안 쿠세이르(Quseir)와 상이집트의 나일강변 콥토스(Koptos)를 연결하는 함마트 와디 계곡에는 선왕조 시기에 새겨진 수많은 선박 암각화가 새겨져있다. 그중에는 메소포타미아 형의 배들도 있고(그림 45), 이로 미루어보아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배로 페르시아만을 빠져나와 아라비아 남단의 연안 항로를 따라 홍해 입구로 들어서서 북상한 후 쿠세이르에서 함마마트 와디를 거쳐 상이집트 콥토스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마이클 호프만의 반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첫째, 배들의 모양이 유형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특히 '이물 및 고물의 굴곡의 정도는 배마다 다른 것 같다'고 보았다. 
둘째, 이러한 암각화가 산악지대인 동부사막에만이 아니라 나일강의 서안에서도 발견되었다. 
셋째, 왕조기와 고전기의 이집트는 정기적 기지로 홍해에 항구를 유지하며 함마마트 와디를 항로로 사용하였지만 암각화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홍해에서 50여 마일 떨어진 내지에 있는 것이고 모두 홍해가 아니라 나일강으로 나일강으로 직접 배수되는 계곡들에 있다.

나카다1에 속하는 유물들이 나온 유적지들은 모두 상이집트 북쪽의 마트마르Matmar로부터 남쪽의 쿠바니야(Kubbaniya), 코르 바한(Khor Bahan)에 이르는 지역에 속하였는데, 나카다2의 문화는 북과 남으로 확장되어 북쪽으로는 삼각주의 동부 변경인 민샤트 아부 오마르(Minshat Abu Omar)에까지,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A Group’에 직접 접하게 된다. 나카다2의 끝 무렵(c3200) 또는 나카다3의 초에, 하이집트의 토착 물질문화인 마아디(Maadi) 문화는 사라졌고 상이집트와 나카다 문화의 인공물(특히 도기)로 대체되었다. 나카다 도기의 분포와 확산으로 보아, 상이집트가 주도하여 상·하 이집트가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IV. 문헌증거

  다시 다른 문헌증거를 살펴본다.
성경에 따르면, 셈(셈족), 야멧(백인), 함이 있었고, 이들 중 함에게는 구스, 이집트, 리비아, 가나안(페니키아)이라는 인물들이 있었다. 여기서 구스는 이집트 남쪽의 쿠쉬를 의미한다.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봤더니, 함마마트 와디에 수메르의 배가 있는 것을 봐서, 수메르의 배들이 이를 통해 들어왔겠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제1왕조를 개창할 적에 어떻게 이동했을까? 성경의 구스의 경로를 따랐을 것이다. 
제1왕조 개창 세력은 홍해를 따라서 함마마트 와디까지, 또 이집트 남쪽 쿠쉬에도 별개로 홍해로 들어가지 않고 아프리카의 뿔 근처에서 육상하여 북상을 통해 쿠쉬에 정착한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BBC에서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만든 고고학자 데이비드 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구스가 해협을 통해서 아프리카의 뿔에 도착하여 쿠쉬에 도달했을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친다. 
함(Χάμος)(하무스)의 네 아들 가운데 구스(Χουσαῖος)의 이름은 세월이 흘렀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다스린 에티오피아인들(Αἰθίοπες)은 오늘날 스스로를 구스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구스가 어떻게 이집트 남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1914년 아노 포에벨(Arno Poebel)은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 니푸르에서 수메르어로 기록된 수메르 왕명록을 발굴한다. (마치 아가멤논처럼 절반정도는 역사적인 사실성 있는 인물이 길가메시이다) 네모난 벽돌에 역대왕들을 적어둔 왕명록을 발견한다(우르크 뿐만아니라 다른 도시도 포함).

그리고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한 가설이 메스키안그카시(우르크)가 성경의 구스라는 仮説이다. 대홍수 이후 우르크의 첫째왕 메스키안그카시가 성경의 구스라는 주장이다. 수메르학을 창시한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아노 포이벨은 Shumer(영어식 표기로는 ‘Sumer’이지만 설형문자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면 ‘Shumer’)가 성경의 Shem에 해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American Journal of Semitic Languages 58(1941), pp. 20-26에서 수메르어의 발음에 관한, 그리고 수메르어가 셈어로 어떻게 표기되었는가에 관한 짤막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글을 게재하였고, 그의 제자 노아 크레이머가 자신의 책에 그를 소개하였다(아시리아, 동부인들이 동부 셈족에 해당된다).
데이비드롤은 우르크의 둘째왕 엔메루-카르를 <창세기>의 구스의 아들 니므릇으로 보았다. 근거는 (1)대홍수 후 두번째 세대의 이름이 같고 (2)둘 모두 사냥꾼의 별명이며 (3)사냥꾼 엔메루Enmeru와 니므롯Nimrod은 모음제외時, nmr & nmrd이기에 그 이름도 비슷하다. (4)<창세기> 니므릇의 영역과 엔메루는 같은 지역을 다스렸다. 그의 나라는 시날(수메르) 지방인 바벨과 에렉(ךֶרֶ֫א,ְΟρεχ, Erech)(즉, 우르크)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from:「창세기」 10:10). 즉, 엔메르 & 니므롯 동일 説을 기반으로 한다.

히브리어로 Erech는 수메르어로 어떻게 표기하나? 포이벨의 표기법(p.40)에 따르면 발음은 Uruch, Uruk였을 것이다. 
<수메르 왕명록>에 수록된 우르의 첫 번째 왕조의 왕으로 Mesh-Ki-Ang-Nanna가 있는데, 우루크 왕 엔메루카르의 아버지 Mesh-ki-ang-kasher와 두 왕의 이름의 앞부분이 같은 것으로 보아 ‘메스키안그’를 별명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Mesh-ki-ang-kasher 중에서 Kasher가 순수한 이름일 것이다. 수메르어 Kasher가 셈어로 표기된다면 수메르어의 단어 끄트머리 –er은 묵음이니 히브리어로 Kash, Kush로 표기 될 수 있겠다. 
<수메르 왕명록>에는 메스키안그카시에 관해 짤막한 설명이 붙어있다. “메스키안그카시는 바다로 들어갔다가 산으로 나왔다. (수메르 왕명록 제3단 4-6행)” 메스키안그카시는 육로를 택하여 북쪽을 향해 출발할 것이 아니라, 해로를 택하여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출항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 ‘아프리카의 뿔에 상륙 하여 일부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하고 일부 사람들은 이집트의 남쪽, 쿠시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주장된다.
 아라비아남단부, 아프리카의 뿔 북쪽 지역의 지명들은 구스의 아들들의 이름과 같다. 그 지역의 시조가 된 것. 
구스(Kush)의 아들은 스바(Seba), 하윌라(Havilah), 삽다아(Sabtah), 라아마(Raamah), 삽드가, 라아마의 아들은 세바(Sheba)와 드단(Dedan)이었다 (from:「창세기」10:7).


【Timeline】

23.10.22 오후 5:56 게시일

23.12.26 오전 1:17 미세수정 (:단락 형식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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