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사산비명 소개 -《고운집(孤雲集)》의 무여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과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을 중심으로-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명(四山碑銘)에 대해서 《고운집(孤雲集)》의 무여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과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을 중심으로 제가 쓴 소개글을 작성하고자 합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소개
-《고운집(孤雲集)》의 무여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과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을 중심으로-
I. 머리말
통일신라말기 최치원(崔致遠, 857-?)은 오랜 당나라 유학 생활끝에 신라에 복귀했고, 최치원이 신라에 귀국한 후 지은 가치가 높은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이라 부른다. 『계원필경집』이 당(唐)에서 이룩한 대표적 저술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한 이후에 남긴 대표적인 저술이다. 즉 당나라 활동 당시에 쓴 문집이 아닌, 신라에서 작성한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국사기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작성된 내용이며, 신라말기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낭혜 즉 무여(無染)가 입적하고 2년이 지난 890년(진성여왕 4년)에 비명을 찬술하라는 왕명을 받고 비문을 작성했고, 그 비문이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이다. 이 비명은 889년(진성여왕 3년) 농민봉기 이후에 찬술되었기 때문에 사회현실에 대한 고민이 잘 반영되어 있다.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는 지증대사가 882년(헌강왕 8년)에 입적하자, 헌강왕이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에게 명하여 작성된 비명이다. 최치원은 893년 진성여왕 무렵에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년)에 건립되었다. 「지증대사비명」은 「사산비명」 가운데서도 가장 일찍 찬술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늦게 완성되었다. 「사산비명」은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銘)」 ,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 을 일컫는 표현이다.
사산비명의「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 즉 지증화상비명(智證和尙碑銘)과,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즉 무여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나는 사산비명 중 무여화상비명(無染和尙碑銘)의 말미에 5언시가 언급되고, 최치원의 가장 찬사받은 작품 『추야우중』도 5언시로 구성된 점에 주목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유입된 한시(漢詩)문화가 5언시 초사(楚辭)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최치원이 작성한 사산비명은 현재 10여종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주해자와 주해시기가 가장 확실한 판본은 蒙庵(1783년), ≪海雲碑銘註≫(국립중앙도서관, 위창古 2102 47)이기 때문에 해당 판본을 기초로 이해된다. 무여화상비명과 관련된 연구로는 “남동신. (2002). 聖住寺 無染碑의 '得難'條에 대한 考察. 한국고대사연구, 28, 175-208”, 지증화상비명과 관련된 연구로는 “김복순. (2010). 최치원의 「지증대사적조탑비문」 비교 연구. 신라문화, 35, 157-234”과 “남동신. (2018). 譯註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 한국사론, 64(0), 227-281”이 있다.
Timeline:
2023.10.04.수 작성
2023.10.05.목 16:42(한국시간) 미세수정
2023.10.05.목 17:52 完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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