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東史] 이슬람(Islam)의 역사성

이슬람(Islam)의 역사성

- 기원이 신화에 쌓여 있는 다른 종교와 달리, 이슬람은 태동의 역사가 명백히 드러나는가? - 


역사적 무함마드의 연구는 그전에 역사적 예수 연구가 선행되었기에 진행될 수 있었음을 우선 주지해야 한다. 슈바이처 박사(Albert Schweitzer)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1906)와 《사도 바울로의 신비(Die Mystik des Apostels Paulus)》(1931)를 통해 연구를 시작하나 후, 역사적 예수 연구는 탄력을 받는다. 이런 연구에 집중하던 서양학계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무함마드 연구는 매우 평탄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에 의한 이슬람교 탄생은 ‘꾸란(Quran)’이라는 명백한 동시대성을 가지는 사료에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명백한 무지의 산물이다. 1851년 어네스 르낭(Ernest Renan)이 이슬람은 타종교와 달리 완전히 역사속에서 탄생했다는 착각을 했으나, 문제는 꾸란에 적힌 글(Text)는 문맥(Context)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드러난다.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 최소 150년 이후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무함마드라는 인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좋은 사료이다. 그러나, 똑같은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거나, 그 사건이 나온 시대나 맥락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료가 자체가 부족한 역사적 예수 연구와는 다른 의미로 난해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꾸란은 역사책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무함마드 연구에서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자료가 필요하지만, 1982년에 사우디가 발굴을 잠깐 금지하기도 하며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난관에 봉착한 것은 서양학자뿐만이 아니라 이슬람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무함마드 언행록이 발전하는 것이다. 꾸란이 7세기 중반에 편찬된 후, 800년대가 되면, 무함마드 언행록이 등장한다. 다만, 무함마드 이후 200년 정도 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 사실성은 꾸란(Quran)보다 낮다. 

그러면 역사적 무함마드의 삶을 개관해보자. 기록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코끼리의 해의 월요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코끼리의 해란, 메카에 코끼리 군단이 공격해왔으나 돌맹이가 내려와서 공격을 물리친 해를 의미한다. 실제로 아브라하(Abraha)라는 장수가 공격해왔으나 실패한 사건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건이 542년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570년경에 태어났다는 다른 기록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또 꾸란은 메카에서 태어난 유복한 집안 출신임을 주장하지만, 이는 후대의 창작으로 추정된다. 당시 무함마드의 하신 가문은 주도적인 부족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슬람교의 초기 전도는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졌으며, 무함마드가 부유한 가문에게 전도하지 않음을 지적하는“무함마드가 하느님 말씀 가져왔다. 왜 도시의 지도자들에게는 안내리십니까?” 라는 표현이 꾸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메디나 출신의 아미나(Amina)이다. 아버지는 태중에서 이미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6살때 돌아가신다. 또 8살에는 키워주시던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아부 탈립(Abu Talib)이라는 숙부의 보호하에 자란다.

그러다, 25세쯤, 카디자(Khadijah)라는 여성 비즈니스맨의 종업원으로 발탁되며, 과부인 그녀가 40살일때, 둘이 결혼한다. 꾸란에도 “고아였던 너를 내가 돌봐주지 않았느냐, 가난했던 너를 부유하게 만들지 않았느냐, 방황하던 너를 인도하지 않았느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표현되는 방황은 다른 기록들을 참고할때, ‘우상숭배’를 의미하던 것으로 해석된다. 즉 그는 주변의 다수 사람들처럼 다신교를 숭배한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 카디자의 나이가 40세라는 표현은 종교적 표현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40은 구약성경 홍수 얘기에 비가 40일간 내리고, 모세가 시나이 반도에서 40년을 방황하며, 예수가 40일간 사탄에게 시련을 받고, 무함마드가 40세에 예언자가 되기 때문에 종교적 의도로 조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그녀는 40세에 6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40세쯤 히라산 동굴에서 종교체험을 했다고 한다.

그럼 당대 다신교 사회에게 무함마드가 내세운 신앙의 매력적인 점은 무엇이었는가? 이에대해, 몽고메리 와트(W.M.Watt)는 기록 상의 무함마드 따랐던 이들의 명단을 연구하고 결론을 낸다. 그는 무함마드를 따르던 이들은 사회적 약자. 여성들이나 젊은이들이었으며, 무함마드의 무슬림 운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종의 사회적 움직임(socialist movement)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추측한다. 즉, 이슬람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종교로서 기능하며 신앙의 매력적인 점을 알린 것이다. 아랍기록에 따르면, 무함마드 이전 아랍사회는 여성들에게 혹독했다. 여성들은 상속권에서도 제외되고, 여성은 상속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상속권제도를 변경하여, 여성에게도 상속권한을 준다. 변화에 따라 재산은 남성의 절반분을 주는데, 서양이 여성 상속권을 19세기 넘어가서 주는 것과 명백히 비교된다.

그러나 메카에서 활동한 무함마드의 초창기 신앙운동은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진 않는다. 그런데 메디나에서 아우스족, 카자르족 사이에 싸움이 발생하고 그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무함마드가 하킴(Hakm)으로서 초청을 받아 메카(Mecca)에서 메디나(Medina)로 622년 옮겨간다. 그리고 무함마드에게 위기감을 느낀 메카인들이 무함마드를 공격하지만, 무함마드는 624년의 바드르 전투, 625년의 우흐드 전투, 627년의 칸다끄 전투를 모두 이겨내면서, 628년 후다이비야 조약으로 상호간의 평화를 만든다. 630년 조약을 어기고 잠깐 메카측에서 공격을 하지만, 이미 상호간의 세력균형은 메디나에 기울어 있었고, 무함마드는 630년 메카에 무혈입성한다. 그리고 그는 632년 사망한다. 그는 후대 이슬람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꾸란을 만들었고, 오늘날까지도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있다.



【참고자료】

1) 에스포지토(박현도, 송영은 공역), 『이슬람의 모든 것』, 바오, 2020.

2) John L. Esposito - What Everyone Needs to Know about Islam, Seco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1).

3) 박태식, 주원준, 박현도 공저, 『신학의 식탁』, 들녘, 2019.

4) 박현도, 「이슬람교의 이해」 강의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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