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東史] Shia파와 Sunni파의 분열 (Islamic history)

 Shia파와 Sunni파의 분열 (Islamic history)


680년 카르발라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아(Shia)파를 이해해야 한다. 시아파의 어원은 아랍어 Shiat Ali 즉, “알리를 따르는 당파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럼 알리는 누구였나? 알리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이다.무함마드는 630년 메카 순례를 마치고 나오며 “알리가 내 후계자다”라는 표현을 했고, 때문에 3대 칼리파인 우스만 이후, 4대 칼리파가 된다. 그런데 우스만이 이집트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음이 알리에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비(非)알리파가 등장한다. 아마도 예언자 무함마드의 어린 아내였던 아이샤와 알리의 비우호적인 관계가 비알리파의 등장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알리는 즉위부터 문제가 많았다. 알리의 전대 칼리파였던 우스만은 이집트 병사들의 불만으로 인해 656년 살해당했는데, 이 죽음에 대해서 알리(Ali)에게 불만을 가졌던 파벌이 알리가 우스만 살해를 사주한 것인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다. 때문에 657년 무함마드의 어린 아내였던 아이샤와 탈하(Talha), 주바르(Zubayr)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 전투를 ‘낙타의 전투(Battle of Camel)’이라고 한다. 첫번째 반란은 실패했으나, 두번째 반란이 발생하는데, 다미스쿠스의 총독이었던 무아위아(Muawiva)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유프라테스강 인근 시핀(Siffin)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무아위아 군대와 알리 군대의 전투를 ‘시핀 전투’라고 한다. 그런데, 전황 불리하게 진행되자 반란을 일으켰던 무아위아 측이 창끝에 코란을 걸고 알라께 중재를 맡기자며 중재를 요청한다. 때문에, 알리(Ali)측이 주춤하면서 알리의 세력에 균열이 생긴다. 

그가 이런 협상을 진행했던 것은, 연속적인 반란의 위협을 안정시키기를 바랬거나, 당시 신생 종교인 이슬람교의 지위가 불안정했기에, 종교의 권위를 빌린 무아위아의 협상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때 무아위아와 정당하게 전투하지 않은 알리(Ali)에게 불만을 가진 것에서 유래한 이슬람 종파, 카리지(Khariji)파가 등장한다.

알리의 첫째 후계자 핫산은 급사했으며, 알리의 두번째 후계자는 ‘후세인’이 된다. 본래 시핀 전투의 협상 때, 무아위아는 다음 무슬림 지도자를 양도하기로 약속했었으나, 무아위아는 죽기전에 기존 관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에게 권력을 세습한다. 그리고 우마야 왕조(661~750년)가 그에 반기를 든 후세인과 72명을 카르발라(현재의 이라크 땅)에서 죽인 사건이 680년 발생한다. 중요한 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슬람교의 중요한 양대 정파인 수니(Sunni)파와 시아(Shia)파로 분열이 일어났나는 점이다. 이슬람력 1월 10일마다 시아파는 '아슈라'라는 행사로 그 사건을 매번 기억한다. 


【참고자료】

1) 에스포지토(박현도, 송영은 공역), 『이슬람의 모든 것』, 바오, 2020.

2) John L. Esposito - What Everyone Needs to Know about Islam, Seco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1).

3) 박태식, 주원준, 박현도 공저, 『신학의 식탁』, 들녘, 2019.

4) 박현도, 「이슬람교의 이해」 강의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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