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近東] 고대 그리스의 영웅 다나오스系 헤라클레스의 힉소스적 기원을 밝힌다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힉소스적 기원을 밝힌다

 : 다나오스-페르세우스-헤라클레스-스파르타 왕가 계보를 중심으로.


I. 머릿말
II. 다나오스와 그 후손들
III. 역사로서의 그리스 신화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IV. 성경과의 비교
V. 맺음말

I. 머릿말

  고대 그리스문명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학계에서 논의되는 두 정통론은 '자생론'과 북측 인도유럽어족의 '침입론'이다. 19~20세기 서양학자들의 입장에서 서양문명의 모태가 되는 그리스가 자생적으로 탄생했다는 생각이 탄생하였으며, 이게 '자생론'이다. 한편, 다른 주장으론 북쪽으로부터의 '침입론'이 있다. 발칸반도 북쪽의 인도유럽어권 사람들이 남침하고, 그리스의 언어적 구조가 갖추어졌다는 주장이다. 흑해 북쪽에서 형성된 Yamnaya culture의 언어권의 영향으로 본다. 언어학적으로 그리스어는 분명히 인도-유럽어에 속한다. 또, 자생론과 침입론이 학계의 정설로 논의되는 이유로는 그리스가 미개한 유색인종들의 문명일 수 없다는 우월이 깔려있다.

  그리스문명은 서양문명의 모태로 여겨지고 있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스스로 문명을 창작한 것이 현대 통설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저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문명은 미개하다고 생각한 오리엔트인들의 영향을 받아 건국했다. 그리스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미케네 문명’이 형성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오리엔트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예시가, 다나오스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다. 민족적 자긍심을 해칠수 있음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용감하게 이야기했다.


II. 다나오스와 그 후손들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본(Strabo, 63 BC/64 BC - c. 24 AD)은 아주 오랜 옛날에는 그리스가 이민족들(바르바로이)의 정착지였다고 밝히고 있다.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의 시대 전에(pro tōn Hellēnōn) 펠로폰네소스에는 이민족(바르바로이)이 살았다. 만약 전승들로부터 추론해 본다면, 옛날에는 그리스 전체가 이민족들의 정착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펠롭스는 프리기아(리디아)로부터 사람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로 왔고, 다나오스는 이집트로부터 왔고…" (스트라본, 7.7.1)

신화작가 아폴로도로스(기원전 2세기)는 청동기 시대의 신화만을 주로 다루는 인물이다. 그는 신화(神話)를 역사(歴史)가 아니라 이야기(物語)처럼 서술하지만, 그 내용이 유기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른 역사가의 기록의 경우, 그 내용이 유기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예를들어,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서술할때, "그리스 신화"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할 때마다, 역사가로서 신화를 단편적으로 짧게 서술할 뿐이다. 

“쌍둥이가 왕국의 문제에 관한 문제로 다투었고, 다나오스는 아이기프토스(이집트)의 아들들을 두려워하여, 아테나 여신의 충고로 배 한 척을 짓고는 딸들을 태우고 도망하였다. 로도스 섬에 닿자 그는 린도스에 아테나 여신상을 세웠다. 그곳으로부터 그가 아르고스로 가자, 그 지역의 왕 겔라노르는 왕국을 그에게 내주었다. 그 지역의 지배자가 되자 그는 주민을 자신의 이름을 따 ‘다나오이’라고 불렀다” (아폴로도로스, 2.1.4) 

즉, 쌍둥이 형제 아이기프토스(영어 표기는 ‘이집트’)와의 세력다툼에서 밀린 다나오스가 이집트를 떠나 그리스 땅 ‘아르고스’에 도래(기원전 1510/11년)하였고, 왕조를 건국한 것이다.

  다나오스는 아르고스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국한다. 미케네를 창건한 그(다나오스)의 후손으로는 5대손 영웅 페르세우스가 있다.1) 그런데 헤로도토스는 흥미로운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과거 자신의 역사책인 『페르시아 전쟁사』를 기술하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던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이집트의 켐미스(Chemmis)라는 도시에서 그리스의 영웅 페르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이집트인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을 목격한다. 그가 이집트인에게 축제를 개최한 이유를 묻자 답하기를 “페르세우스는 그 조상인 다나오스가 켐미스(Chemmis) 도시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나에(女)’와 제우스의 아들이 페르세우스이며, 다나에의 조상으론 ‘다나오스’가 있다.2)

(사진1. 힉소스系의 이동경로)
from: Martin Bernal, 『Black Athena, vol. II』, 「지도 XIV」.

다나오스 왕가펠롭스 왕가에게 점점 세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펠롭스 왕가는 본래 ‘아카이아족’의 왕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의 ‘프리기아(히타이트에겐 ‘아하이와’라고 불리는 지역측)'에서 히타이트에게 밀려나 펠로네소스 반도로 이주해왔다.3) 아폴로도로스의 글에 따르면, 그리스인은 “아카이아족 + 이오니아족 + 도리스족 + 아이올로스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스트라본, 헤로도토스 같은 다른 그리스 역사가들은 “오직 도리스인만을 진짜 그리스인”으로 취급하고, “아카이아족은 헬레네스가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4) 그렇다면, 아가멤논(펠롭스 후손)이나 헤라클레스(다나오스 후손)는 순수한 그리스인(도리스족)은 아닌 것이고, 때문에 『일리아드』에서 호메로스(BC800년대)는 ‘그리스 민족주의자’로서 아킬레우스의 전적을 돋보이게 이야기한다. 트로이 전쟁에서 활약한 대영웅인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북부(Phthiotis)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고, 델피(Delphi) 북쪽에 살던 이들이 도리스인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본래 페르세우스의 증손자로 미케네의 왕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펠롭스의 외손자이자, 페르세우스의 손자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왕권이 넘어간다.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 사후 그의 아들들이 사는 아티카(아테네)로 공격 원정을 떠났으나 사망한다. 에우리스테우스가 사망한 후, 헤라클레스 가문을 두려워한 미케네인들은, 前왕의 외삼촌 아트레우스를 추대한다.5) 즉, 아트레우스는 펠롭스계 아카이아족이다. 그리하여, 다나오스 왕가는 점차 펠롭스 혈통에게 잠식되고, 다나오스系의 본거지였던 ‘아르고스’에서도 쫓겨난다.6)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후손들은 미래에 다시 그리스의 왕좌를 되찾는다. 헤라클레스는 한때 권좌에서 쫓겨났던 도리스인의 왕, 아이기미오스를 복위해주었던 적이 있다. 은혜를 잊지않은 도리스족 왕 아이기미오스는 헤라클레스의 장남, 힐로스에게 호의를 보답한다. ‘힐로스’를 양자로 삼고, 왕위도 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재탈환을 원했고, 헤라클레스의 4대손 때, 결국 도리스족을 이끌고 ‘아르고스’ 왕가를 되찾는다. 이것이 기원전 1120년 “헤라클레스 왕가의 귀환(hē Hrakleidōn kathodos)” 사건이다. 헤라클레스의 아버지는 제우스가 아닌, 암피트리온이라는 인간남자이며, 페르세우스의 증손자였다.7)8)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세우스의 불명확한 부계가 아닌, 모계(다나에)를 추적하여 이집트 계통임을 논증해낸다.


III. 역사로서의 그리스 신화 
-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기반으로 -

  그리스의 “신화”는 청동기시대의 역사를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신화(Mythologia)와 역사(Historia)를 잘 구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신화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청동기 시대의 역사를 의미했다. 디오도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BC1120년 이후부터 “역사(historia)를 시작했다”고 하며, BC1120년 이전은 “신화(mythologia)의 말”이라고 한다. 실제로 19세기 고고학의 거두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은 『일리아드』의 트로이-미케네 이야기를 실제한 신화시대 역사로 믿었기 때문에 유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키메의 에포로스는 통사通史를 쓸 적에 옛 신화mythologia의 이야기들은 지나쳐버렸고 헤라클레스 후손들의 귀국hē Hrakleidōn kathodos 후에 발생한 사건들의 기사로 역사historia를 시작하였다." (디오도로스, 4.1.1-2)

다나오스 신화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그리스 아르고스를 발굴하여 지층별로 보면, 기원전 1500년경부터 유물들(ex.아가멤논의 데스마스크)이 화려해진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더 신빙성있게 만들고 있다.9)

힉소스 수도 아바리스의 발굴 및 연구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힉소스는 언제 이집트에서 쫓겨났을까? 『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의 연대표에 따르면 힉소스 수도 ‘아바리스’가 이집트 테베의 제17왕조 파라오 아모세(제18왕조의 개창자)의 아모세22년~아모세18년(기원전1532~1528년) 사이에 정복되었고 힉소스는 이때 쫓겨났을 것이라고 한다.10) 이는 비문 『파로스 연대기(Marmor Parium)』가 말하는 다나오스(기원전1510/11년)의 도래연도와 거의 일치한다. 또, 힉소스 이주자들은 여정 과정에서 로도스 섬에 아테네 신전을 건설했다고 한다.11)12) 그 신전은 1000년 뒤 후대에도 신전터가 남아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만큼 튼튼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로도스에 만들려면 오래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바리스 유적의 조사결과는 문헌증거와 교차검증되어 신뢰성이 있다.13)


IV. 성경과의 비교

  모세는 출애굽기(1:8-11)을 기준으로 하여, 기원전 13세기 사람이라는 해석이 정통론이다. 그러나, 그리스 출신 지식인 루카가 작성한 기록(사도행전 13:17-21)에 ‘바울로’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이것을 근거로 모세의 출애굽 연도 계산해보면, 출애굽의 연도는 기원전1540년이 된다.14)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타향살이할 때에 그 백성을 들어높이셨으며, 또한 팔을 높이 들어 거기서 그들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을 인내로 대해 주셨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서는 일곱 민 족을 멸하고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시었으니 약 사백오십 년 동안이었습니다. 그 뒤 사무 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이 왕을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키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그들을 위해 세워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3:17-21)

: 최초의 판관은 여호수아(모세 바로 다음의 지도자), 최후의 판관은 사무엘이다. 그리고 유명한 삼손도 판관이었다. 독립 왕국을 건국하자 사울 때부터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서에 따르면 사울 다음의 왕 다윗의 재위 기간은 40년이니, 출애굽부터 다윗의 통치 끝에 이르는 기간은 40+450+40(사울)+40=570년이다. 솔로몬이 기원전 970년에 즉위하였으니, 출애굽의 연도는 기원전 (970+570=)1540년이 된다.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 그때 쫓겨난 이들은 다나오스-카드모스-모세이다”(디오도로스, 40.3.2)라고 기록하였다.15) 대략 1530년경에 이들 3인이 활동한 것이다. 그럼 다나오스는 어떤 민족에 속할까. 연구에 따르면, 서부 셈족이라는 것이 주류학설이다. 도리스족의 침입으로 헤라클레스의 후손이 세운 국가가 스파르타이다.16) 때문에 기원전 2세기경 유다의 마케베오 가문 출신 대사제 요나단이보낸 국서에는 스파르타를 형제로 부르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 기원전 3세기경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기원전 309~265)가 유다 대사제 오니아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스파르타인과 유대인을 모두 ‘아브라함’의 후예로 지칭한다.

“대사제인 나 요나단과 나라의 원로들과 사제들과 그 밖의 유다 온 국민이 스파르타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마카베오 상』(12:6-9)

“스파르타의 왕 나 ‘아레오스’가 유다의 대사제 ‘오니아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스파르타인과 유다인은 서로 형제이고 두 민족이 다 ‘아브라함’의 후예입니다.” 『마카베오 상』 (12:19)

즉 도리스족을 이끌고 온 도리스족의 왕가는 힉소스系 ‘서부 셈족’이었다.17) 또 同時期 누이동생 ‘에우로파’를 찾아서 그리스에 정착한 페니키아 왕자 카드모스는 ‘페니키아계 힉소스’였고, 다나오스는 ‘유다계 힉소스’였다. 


V. 맺음말

  서구가 그리스 문화를 허구로 몰아간 태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어로 된 대표적인 그리스 역사서, 윌리엄 밋퍼드(W. Mitford)가 저술한 방대한 분량의 『The History of Greece』(1784~1804)에 따르면, “근거있는 몇몇 고대 그리스 전승. 그리스에 설립된 이집트 식민지들을 언급하고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처음 서구학계는 그리스의 오리엔트적 기원에 대해, 거의 긍정하는 역사 기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00년대 이후, 역사적 기조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럼 왜 서구학계는 부정하는 기조로 바뀌었을까?

유대계 영국인 Martin Bernal(1937~2013)의 『Black Athena』에 따르면, 대내적 원인은 프랑스혁명이며, 대외적 원인은 제국주의였다. 그래서, 인종주의와 엮어서, 미개한 유색인종들이 그리스 문명의 최초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수용불가능했다. 초기 그리스문명에서 미케네 문명의 기초를 유색인종들이 세웠다는 주장을 서양학계는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18)

독일의 루터가 『신약성경』을 원전 '코이네-그리스어'에서 직역하여 독일어로 변환한 것은 서구지성사의 큰 전환점이다(성경의 신약은 코이네-그리스어, 구약은 히브리어로 적혀있다). 때문에, 서구에서 독일어와 그리스어는 프로테스탄트의 언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라틴어는 카톨릭의 언어라는 관념이 유럽에서 팽배하던 사고이다. 예를들어, 서구에선 지식인들은 모두 라틴어를 알고 있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도 라틴어로 적혀있다. 영어-독어는 과거에 속어에 불과했다. 신약성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영어-독일의 실질적 사용자들이 히브리어를 이해하던 유대인을 탄압하는 역사적 흐름으로 이어진다. 사실, 서구의 성경에 대한 적극적 이해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도 성경이 그들 조상의 기록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이해를 시도하였고 또 그게 가능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유럽이 신약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끌어올린 것도 이러한 언어적, 계보적 배경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을 문화적 측면에서 막아내기 위해 독일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8세기 신고전주의(Neo-Hellenism)라는 문화적 영역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방어하고자 했는데,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공격(1798)로 「로제타 비석」을 얻으며, 학문적 성과를 축척하고 있었다. 때문에 독일에선 고대학(Altertumswissenschaft)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당시 독일 '하노버' 공작의 영향을 받고 있던 영국도 고전학(Classics)이라는 학과를 확립하였다. 현대의 서구 고전학도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확립된 것이다.

결국, 정치만이 아니라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조차, 정치적-역사적 맥락과 배경에서 발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구학계의 태도는 유럽중심주의에 의해 발생했다. 1800년대 제국주의에 물든, 서구사회는 백인종의 우월감을 고대 그리스문명에 바탕하는 것이 일종의 지지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저자들의 저술을 따른다면, 그리스의 지배자는 서구인들이 열등하게 보고있던 유색인종이 되어버린다. 1800년대 유럽에선 프랑스혁명과 제국주의 발호가 나타나던 시기이고, 때문에 인종주의가 부각되었다. 대내적 요인과 대외적 요인이 병립할 뿐만아니라, 영향력이 합쳐져 큰 파급력을 낳았던 것이다.


(사진2. 아르고스 티린스 미케네 등지를 다스린 다나오스 왕가 계보도) from: 그리스 로마 신화 -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계보, <Blogspot>, 2019-10-17,  <https://yranidr.blogspot.com/2019/10/perseus-heracles.html>(15:53)




[각주]

1) 오흥식, 「아르고스 왕 다나오스와 그 후손들」, 『서양고대사연구』 12(2003) 및 오흥식,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 『서양고대사연구』 27(2010) 참고.
2) 한때, 아크리시오스가 점을 처봤다. 그는 외손자에게 죽을 운명이다는 점괘를 얻는다. 그(아크리시오스)는 후손이 외동딸 다나에(다나오스’의 여성형 어미형) 뿐이었다. 외동딸을 가둬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하였으나, 제우스가 황금비(金雨)로 변신해서 그녀를 임신시키고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그래서 왕은 다나에&페르세우스를 나무상자에 넣어 바다로 보냈는데, 어부가 되살린다.
3) 송문현, 「트로이 전쟁-전승과 증거 사이」, 『서양고대사연구』 21(2007), pp.42-45.
4) 스트라본(7.7.1)의 글에서 펠롭스, 다나오스가 활약했던 시대를, 곧 미케네 그리스의 시대를 “그리스인의 시대 이전pro tōn Hellēnōn”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미케네 그리스사를 그리스인의 역사라고 보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헤로도토스(1.56.3)도 도리스족의 침입이라는 사건을 다루면서 “헬라스인(그리스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도리스족이라는 이름을 취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5) 要:아르고스 - 아티카 - 미케네, 모두 미케네 문명권이었다.
6) "에우리스테우스는 원정을 떠나면서 외삼촌 아트레우스에게 미케네의 통치를 위임하였다. 아트레우스는 크리시포스를 죽인 죄로 아버지에 의해 추방되어 이곳에 와 있었다. 에우리스테우스가 아티카에서 헤라클레스 가문에 의해 살해되어 귀국하지 못하자, 헤라클레스 가문을 두려워한 미케네인들은 아트레우스를 힘 있는 자라고 생각하였고 아트레우스 또한 대다수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 있었다. 아트레우스는 그들의 간청으로 미케네와, 에우리스테우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나라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펠롭스 가문이 페르세우스 가문보다 더 커졌다." (투키디데스, 1.9.2).
7) 오흥식,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영웅숭배」, 『서양고대사연구』 24(2009), pp.135-145.
8) 그리스의 영웅들이 대게 최고신 제우스의 아들인 까닭을 알 수 있다. BC600년대 창작된 족보책인 「신통기」에 따르면, 제우스가 도리스족의 주신이다. 미케네 문명권의 따뜻한 곳에서는 제우스를 주신으로 섬긴 곳이 없다. 그리스 민족(도리스족)의 주신, 제우스를 주신으로 하여 남쪽에 있던 신들을 하나의 신화로 엮었고, 헤라클레스 같은 뛰어난 인물들을 제우스의 혈통으로 조작한다. 동방의 여러 이민족들과 북방의 도리스족으로 구성된 그리스인들을 하나의 혈통으로 엮어내려는 노력을 한것이 「신통기」라는 책이다.

9) 프랭크 스터빙스, 『케임브리지 고대사』 제3판 (1975, 최신판) 「미케네 문명의 대두」,
원저: Frank H. Stubbings, The Rise of Mycenaean Civilization,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2 part1, 
1975), p.636.
10) Ian Shaw(editor),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p. 185.
11) "지금으로부터 1247년 전, 에렉토니오스가 아테네의 왕이었을 때, [다나오스에 의해 마련된] [최초의 50노]선船이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 항해하였고, 다나오스의 딸들, 나머지 사람들에 의해 제비로 뽑혀진 [], [], 헬리케, 아르케디케는 [린도스의 아테나 신전을 창건하였고] 로도스 섬 린도스에 있는 [] 곶串에서 제물을 바쳤다." (『파로스 연대기』 9번째 사건).
12) 【파로스 연대기】는 그리스인이 대리석에 세겨 남긴 연대기 자료로 매우 소중한 비문 자료이다. 파로스섬에서 발견된 【파로스 연대기】는 BC264년 또는 BC263년에 제작되었다. 따라서 1247년전이면, 1511년 또는 1510년 전이다.

13) 중왕국에서 신왕국으로 넘어가는 혼란기를 만든것이 “힉소스의 침입”이다. 힉소스는 나일강 서안에 있는 오아시스들을 연결한 육로를 통해 上이집트 남쪽의 누비아의 쿠시(Kush)인들과 동맹을 맺어 원주민의 거점인 상이집트의 테베를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17왕조의 테베 왕 카모세는 누비아 북쪽을 장악하는 등 쿠시인들을 고립시켰고, 마침내 그의 동생 아모세 왕은 아바리스를 함락하고 제18 왕조를 개창한다. 이집트 델타 지역을 힉소스는 침입 후 100년간 지배했다. 
14) 오흥식, 「모세와 다나오스」, 서양고대사연구 37(2014), pp.11-18.
15) "그 땅의 원주민들(이집트인)은, 만약 그들이 외국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어려움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곧 외국인은 나라 밖으로 쫓겨났고, 그들 중 가장 두드러지고 활동적인 자들은 힘을 합해,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그리스와 그 밖 지역의 해안에 이르렀다 한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뛰어난 자들이었고, 그들 중에는 다나오스와 카드모스가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오늘날 유다라고 불리는 곳으로 물러났는데, 그곳은 이집트로부터 멀지 않으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그 식민지는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지도되었다." (디오도로스, 40.3.2) 
16) 오흥식,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영웅숭배」, 『서양고대사연구』 24(2009), pp.146-148.
17) 오흥식, 「스파르타 왕가의 힉소스적 기원」, 『서양고대사연구』 16(2005), pp.48-49.
18) Martin Bernal, 『Black Athena』 Volume I, pp.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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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Martin Bernal - Black Athena_ The Afroasiatic Roots of Classical Civilization Volume I_ The Fabrication of Ancient Greece 1785-1985-Rutgers University Press (2020).
2. Martin Bernal, Black Athena: The Afroasiatic Roots of Classical Civilization, vol. II: The Archaeological and Documentary Evidence (Rutgers University Press, 1991).
3. 파로스 연대기(Marmor Parium),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등 LOGOS(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 검색 사이트)에서 참고한 자료들.
4. 송문현, 「트로이 전쟁-전승과 증거 사이」, 『서양고대사연구』 21(2007). 
5. 오흥식,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영웅숭배」, 『서양고대사연구』 24(2009).
6. 오흥식, 「아르고스 왕 다나오스와 그 후손들」, 『서양고대사연구 12(2003).
7. 오흥식,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 서양고대사연구 27(2010).
8. 오흥식, 「스파르타 왕가의 힉소스적 기원」, 서양고대사연구 16(2005).
9. 오흥식, 오리엔트문명사 강의록 참고.
10. 그리스 로마 신화 -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계보, <Blogspot>, 2019-10-17,  <https://yranidr.blogspot.com/2019/10/perseus-heracles.html>(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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