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東史] 튀르크인과 이슬람사

튀르크인과 이슬람사

- 중동에 등장한 튀르크인들이 이슬람 세계에 끼친 변화와 그 역사를 살펴본다 - 

  I. 머릿말
  II. 튀르크인들의 등장과 십자군 시대의 활동
  III. 삼제국시대의 오스만 제국
  IV. 오스만의 쇠락과 해체
  V. 맺음말



I. 머릿말

  갑작스레 등장한 튀르크인들은 아랍세계에 격동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기존의 권력을 가지던 Shia종파가 몰락하고, Sunni종파가 다시 패권을 잡았다. 그러나 튀르크의 전성기는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끝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II. 튀르크인들의 등장과 십자군 시대의 활동

  튀르크인들의 Selçuk는 중앙아시아의 Oghuz에 속한다. 이란 북부의 카스피해 부근에서 발흥한 Selçuk는 당시 이미 무슬림으로 개종한 상태에서 1040/41년에 Dandanagan에서 Ghazna족을 격파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Selçuk가 Baghdad로 갈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튀르크인들의 침입 이전, 중동세계는 동서가 모두 Shia파가 차지한 Shia Century였다. 동쪽의 부예조(Buyid, 945~1055)는 바그다드를 점령한 12이암 Shia파였고, 서쪽의 파티마조(Fatimid, 969~1171)은 카이로를 점령하고 ‘알아자르’ 대학을 건설한 7이맘 Shia파였다. 그러나 부예(Buye)조는 셀주크에게 멸망했고, 파티마(Fatima)조는 1171년 셀주크의 장수 살라딘에게 패배하며 멸망했다. 셀주크는 Shia Century를 종식한 Sunni의 대전사였다.

  그러면, 그 Shia Century를 깨트린 유목민 왕조들을 살펴보자. 먼저 셀주크 튀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이동하여 아랍세계 동쪽의 부예조(Buyid)를 격파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쿠르드인의 아윱 조는 본래 셀주크의 장군인 Zanggi의 부하였다. 아윱 조는 파티마조(Fatimid)를 1171년에 격파하고 이집트를 점령했다(:아윱朝가 정식으로 술탄이 된 해는 1171년이지만, 실질적 지배는 1169년부터이다. 살라딘의 아버지 이름이 Ayyub이므로 Ayyub朝로 정의한다).

셀주크는 1071년 Manzikert(만지케르트)에서 비잔틴의 로마누스4세를 무찌른다. 만지케르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가장 동쪽 지역이다. 본래 비잔틴과의 분쟁을 걱정한 Al-Arsman이 못들어가게 했으나, 그의 사후 점진적으로 Turk인들이 진입한다. 1095년 십자군 전쟁이 진행된다. 그리고 1187년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서 탈취한 유명한 장군이 바로 아윱조의 살라딘이었다. 그는 민사작전을 중시하고, 그는 전술에서 적의 후회를 보장하고 민간피해를 예방했다. 그는 신사적으로 전투하였다.

아랍세계의 유목민 왕조는 한차례 큰 위기를 맞이한다. 바로 더 강대한 유목민 세력인 몽골군의 침입이다. 그러나, 맘루크(Mamluk) 왕조는 1260년 아인잘루트(Ayn Jalut) 전투에서 몽고(Mongol)를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III. 삼제국시대의 오스만 제국

  삼제국 시대의 아랍세계는 오스만-사파비-무굴 제국으로 구성되며, 보통 “화약 제국 시대(Gunpowder Empires)”라고 한다. 각 민족구성은 다음과 같다. 사파비는 Selquk-Osman에서 나온, 투르크 Confederation에서 나온 집단이다. 무굴도 엄밀히 따지면 몽골-튀르크 집단이다. 또 삼제국 시대에 존재했던, 티무르 왕국은 사파비&무굴과 갈등을 일으켰다. 오스만 튀르크는 삼제국 시대의 패자(覇者)였다. 튀크크는 1453년에 비잔틴을 패퇴시키고, 1517년에 맘루크를 패퇴시켰다. 오스만의 지배는 1924년까지 이어졌다.

(1)오스만튀르크(1299~1922)는 메흐메트2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이래, 줄곧 전성기를 누렸다. 무슬림 법학파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그 4가지 중 '하나피'가 오스만의 지원으로 크게 성공한 학파이며, 때문에 4개 학파중 가장 세력이 크다. (2)사파비(1501~1722)는 이란의 시아파 무슬림을 만든 국가이다. 그들은 이란어 계통의 사람들로, 쿠르드인들(페르시아인이 아니다)이었다. 사파비는 본래 Sunni파였으나 경쟁자 오스만 튀르크가 Sunni파이므로 왕조는 민중들을 Shia파로 강제개종시켰다. (3)무갈(1526-1857)도 튀르크어 계통으로, 종교적으로 좀 더 개방적인 특징을 지닌다.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하며 오늘날 인도&파키스탄이 된다. 

중간시대와 삼제국 시대(1000-1500 & 1500-1800), 이 800년의 역사는, 무력에 의한 팽창과 평화적 팽창(수피 교단의 확장)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중간시대는 유목민 이동으로 인한 인구변동이 잦았는데, 북아프리카에서는 유목민 왕조가 형성되고(무와히둔, 1130), 그 때문에, 학자 이븐 칼둔은 “아싸비아(: 유목민족의 단결된 사회구조가 정복왕조를 만든다는 학설)”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유목민 왕조가 탄생한다는 최초의 '사회학' 가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삼제국시대의 패권도 영원할 수 없었다. 강력한 세력의 프랑스 나폴레옹이 1798년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고 7월5일에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다. 카이로의 대피라미드 앞에서 무갈과 싸우는데, 나폴레옹은 30명 손해를 보았던 반면, 무갈은 3000명의 손해를 입은 프랑스의 대승리였다.


IV. 오스만의 쇠락과 해체

  오스만의 쇠락은 오스트리아의 빈[Wien; Vienna(EN)]공격을 실패한 것이 전환점이었다. 1529년 쉴레이만 1세는 제1차 오스트리아 빈 포위공략에 실패하였다. 1683년 메흐메트 4세는, 제2차 오스트리아 빈 포위공략 실패하였고, 패배 후 체결한 1699년 카를로비츠(Karlowitz) 조약은 오스만제국이 약자의 입장에서 서명한 최초의 조약이었다. 이제 튀르크는 변방에서 치고나오는 유럽에게 밀리기 시작한다. 

오스만 튀르크는 본래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본래, 지중해는 무슬림의 허락 없이는 지날 수 없었으나, 레판토 해전의 패배로 해상 재해권마저 뺴앗긴다. 레판토 해전과 비엔나 포위의 실패로 결국 오스만은 크게 추락한다. 이제 오스만은 “유럽의 병자”로 불리운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은 무슬림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나폴레옹의 알렉산드리아 침략은 역사적으로보면, 프랑스 혁명이 유럽밖으로 수출하려던 최초의 시도였다. 즉, 무슬림 지역을 유럽과 연결하려던 최초의 시도이다. 오스만은 1820년대부터 프랑스의 새로운 군대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그러나 프랑스식 물건이 들어오면서, 프랑스식 사상도 들어왔고 무슬림세계에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전통적 중세 이슬람 사회의 기반이 붕괴한다. 예를들어, 이슬람의 정의의 원(Daire-i adliye)의 군대-종교-군주간의 선순환구조는 완전히 파괴된다. 서양이 들어오며 전통적인 이슬람 불문법 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Daire-i adliye은 10세기에 등장한 체계로, 오스만 튀르크 시대에 크게 퍼진 개념이다. 그 내용은 "세상은 신의 정원 = 신은 법으로 다스린다 = 법은 왕의 행정력 = 왕은 군대가 지탱 = 군대는 돈으로 부양 = 돈은 주민이 내는 세금 = 주민은 정의를 따름 = 정의는 세상의 행복 (순환관계 형성)"을 의미한다. 설명하자면, 왕은 법학자들을 후원하는데, 이슬람의 법학자는 신들의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이슬람에서 법학자(종교인)은 민중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다. 일상적인 행위들조차 율사에게 물어봐서 당위성을 확보해야 하는 이슬람법의 지배하에 있었다. 때문에, 그런 일반 민중들의 일상에 친근한 존재(=법학자)들을 무력을 상징하는 군대의 지도자인 왕이 후원하여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런데, 서양사상이 들어오며 기존의 이슬람식 불문법 체계가 무너진다. 때문에, 이슬람 사회의 기반이 흩어지고, 전통적인 중세 이슬람 세계의 기반이 붕괴되었던 것이다.

오스만은 독일에게서 많은 기술적 도움을 받았다. 때문에 독일이 훈련시킨 오스만 해군이 독일 요청에 따라서 1차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했던 것이다. 이런 기술적 도움 덕분에, 영국은 갈리폴리 해협에 상륙하여 북상하려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결국, 1차세계대전(1914-1918) 패전으로 오스만은 결국 해체된다. 

1919년 파리박람회에서 전후질서를 토의하는데, 1920년 San Remo에서 세브르(Sevre) 조약으로 Mandate(위임통치령)가 만들어지고, 오스만의 영역을 영국과 프랑스가 피자 자르듯 차지한다. 그리고, 1921년 조약에 분기탱천한 튀르크의 영웅 ‘무스타프 케말 파샤’가 앙카라를 중심으로 반란을 시작한다. 튀르크인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전쟁을 하고, 1923년에 Lausan조약을 통해 오늘날 튀르크 땅을 얻는다. 전세계 외교역사에서 들어본적 없는 완벽한 승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1923년 10월에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공식적으로 오스만을 끝내고 터키 공화국의 건설을 선언한다. 오스만의 칼리파제도도 이때 끝난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튀르키예는 (1)서구적으로 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목표한다. (2)아랍적인 영향을 모두 없앤다.


V. 맺음말

  튀르크는 Shia Century를 끝낸 Sunni파의 대전사이자 대리인으로 아랍 세계에서 기능했다. 그럼 이런 투르크-무슬림 체계 下의 무슬림 세계가 확장을 멈춘 계기는 무엇이었나? 732년 Poitier 또는 Tours 이 지역 어디에선가, 스페인을 점령했던 이슬람 군대들이 약탈을 위해 북진했었다. 이 약탈군들은 파리(Paris)에 가깝게 진군했으나, 프랑크 왕국의 장군 샤를 마흐텔(Charles Martel)이 막아낸다. 이 전쟁을 두고, 에드워드 기븐(E. Gibben)이 『The Rise & Fall of Rome Empire』에서 평하기를 “여기서 무슬림 군대가 이겼다면 프랑스와 영국을 무슬림이 점령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유럽-중동 관계사를 중심으로 볼 때 매우 큰 사건이었다.

  튀르크는 아랍의 시작부터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칼리파 제도의 계승자였다. 실질적인 정당성을 가졌던 칼리파는 바그다드가 몽골에게 점령(1258년 압바스 칼리파)을 당하며 끝어졌으나, 후대 맘루크가 꾸라이시 부족의 후계를 칼리파의 후계자로 제시한다. 그리고 오스만에게 맘루크가 멸망(1563년)하고, 1570년 아랍인으로서 마지막 칼리파인 무타와키 3세가 오스만 왕조에게 칼리파를 양위한다. 그러나 그 길던 칼리파의 전통도, 무스타프 케말 파샤가 터키 공화국을 개국하면서 칼리파 제도를 완전히 폐지한다. 튀르크가 이슬람과 완전히 일치되어 활동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참고자료】

1) 에스포지토(박현도, 송영은 공역), 『이슬람의 모든 것』 (바오, 2020).

2) John L. Esposito, 『What Everyone Needs to Know about Islam』 Seco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1).

3) Marshall G. S. Hodgson, 『The Venture of Islam, Volume 1: The Classical Age of Isla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4) 박태식, 주원준, 박현도 공저, 『신학의 식탁』 (들녘, 2019).

5) 박현도, 「이슬람사」 강의록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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