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桂苑筆耕集』을 바탕으로 한, 崔致遠의 在唐前後의 시대적 배경과 道教的 사고관 이해

桂苑筆耕集을 바탕으로 한, 
崔致遠의 在唐前後의 시대적 배경과 道教的 사고관 이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卷17~20 내용을 중심으로 -

I.               머리말

II.             『桂苑筆耕集』권17~20 항목 분석
1. 
17 -고변 막부로의 투탁과 성공을 위한 노력-
2. 
18 -절도사 고변에게 보내는 서신-
3. 
19 -최치원의 중국생활과 지인 교류-
4. 
20 -최치원의 귀국 과정-

III.           『桂苑筆耕集』에 나타난 崔致遠의 道教的 인식

IV.          맺음말


I. 머리말 

 통일신라말기 최치원(崔致遠, 857-?)은 아버지인 최견일(崔肩逸)의 권유로 868년(경문왕 8년, 咸通 9년)에 입당유학하여 874년(경문왕 14년, 乾符 원년)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고, 876년(헌강왕 2년, 乾符 2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 821~887)에게 의탁하여 여러 글을 대필하였다. 그는 884년(헌강왕 10년, 中和 4년)에 신라 사신 김인규(金仁圭), 從弟 최서원(崔栖遠)을 만나 885년(헌강왕 11년, 中和 5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오랜 당나라 유학 생활끝에 신라에 복귀했고, 귀국 후에 在唐 당시 활동을 기초로 하여 『桂苑筆耕集』을 찬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치원의 『桂苑筆耕集』은 『三國史記』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작성한 자료라는 점, 신라말(新羅末)/당말(唐末)의 국제적 시대 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해외학계의 경우, 『唐書』나 『通典』의 내용을 보충하는 자료, 당대의 번진 체제, 종교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1)  국내학계의 『桂苑筆耕集』연구로는 "계원필경집의 문화사적 이해(남동신)", "계원필경집의 구성과 성격(장일규)", "신라 하대와 최치원(최광식)" 등의 저술이 있다. 그러나, 연구는 대부분 『桂苑筆耕集』을 통해 알 수 있는 당나라 말기 사회의 양상이나, 문학적 의의에 중심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최치원의 在唐 생활에 대한 더많은 고찰이 중요하다는 것이 현재 학술대회에서 지적되고 있다.2) 이렇듯 『桂苑筆耕集』에 대한 역사적, 문학적 관점을 중심으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모두 文集의 卷1~20 전체를 기준으로 한 연구이며, 각 卷에 대한 구체적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桂苑筆耕集』을 살펴보면, 卷1~16은 고변(高騈) 절도사를 대필한 글이나, 卷17~ 20은 최치원이 온전히 그의 의도에 의해 작성된 글이라는 중요한 의의를 가짐에도 이에 대한 개별적 연구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본 연구는 최치원의 『桂苑筆耕集』 卷17~20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겠다. 이를 위해 권17~20까지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고, 내용 중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추출하여 설명하고, 공통점을 정리할 것이다. 또 卷17~20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桂苑筆耕集』 에 자주 보이는 도교와 관련된 요소를 중점적으로 검토하겠다.  


II. 『桂苑筆耕集』권17~20 항목 분석

우선, 권17~20은 모두 최치원이 고변 막부에 투탁하면서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을 쉽게 알 수 있는 자료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권1~16은 시간의 순서가 아닌, 필서의 특성에 따라서 배치를 한 반면, 권17~20은 879년부터 885년까지 대체로 시간순서로 작성되어 있다는 차이점을 가진다.3) 최치원은 권17~19의 글을 고변 및 휘하 막료들의 신분과 사안의 경중을 구별하여 각각의 내용을 권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각 내용은 장・계 10수, 서・장・계 25수, 장・계・별지・잡서 20수, 장・계・별지・제문・시 40수로 구성된다. 이해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문학의 문체 분류상 장(狀)・계(啓)는 본래 주의류(奏議類)에 해당한다. 신하가 상급자에게 올리는 글을 주의류라고 한다. 서(書)는 서독류(書牘類)에 해당한다. 임금과 신하 사이, 친구나 친지 사이에서 주고받은 실용적인 개인 서신을 포함하는 글이다. 잡서(雜書)는 잡기류(雜記類)에 해당되며, 글을 쓰는 사람이 두루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제문(祭文)은 애제류(哀祭類)에 해당되며, 제사를 지낼 때 읽는 글이다. 그외 사부류의 시(詩) 그리고 별지(別紙)로 구성되어 있다.4) 권16의 「서주나성도기(西州羅城圖記)」,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 「구화수대운사소(求化修大雲寺疏)」, 「구화수제도관소(求化修諸道觀疏)」에서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고변의 글을 대신하면서도, 저자 본인과 관련된 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적극 주장한다. 이것은 卷16이후 卷17부터 최치원이 자체적인 자신만의 글을 작성하려고 하였음을 보여준다.

1. 卷17 -고변 막부로의 투탁과 성공을 위한 노력-

권 17

初投獻太尉啓

879년 10월 이후

再獻啓

879년 10월 이후

謝生料狀

879년 10월 이후

獻詩啓 附詩三十首

879년 10월 이후

謝職狀

879년 10월 이후

謝借宅狀

 

出師後告辭狀

879년 겨울 이후

謝令從軍狀

 

謝借舫子狀

 

謝許奏薦狀

880년 3월 이후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卷17에 수록된 글의 찬술 연표

이제 권17부터는 절도사 고변의 글을 대찬하는 것이 아닌, 최치원 본인과 관련된 글로 구성된다. 권17중에서 「초투헌태위계(初投獻太尉啓)」와 「재헌계(再獻啓)」은 고변 휘하의 막료로 나아갈 때 쓴 글이다. 「사생료장(謝生料狀)」에서 "뿌리가 잘린 쑥대처럼 떠돌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당시 그의 위태로운 심경을 전달하고 있다. 「再獻啓」에서는 “인간의 要路와 通津에는 눈을 열어둘 곳이 없고, 物外의 靑山과 綠水는 꿈속에서조차 돌아갈 때가 있다”고 고로를 토로하기도 했다.5)  최치원의 고변 휘하에 속할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최치원은 고위관료가 되기 위해 博學宏辭科를 위해 고시를 치렀다. 고시의 내용은 ‘試文 三篇’이었는데 詩, 賦, 議論 각 1편이었다. 박학굉사과를 ‘三篇’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三篇에 합격하기 위해 날마다 과업을 정해 공부하고 시와 부에 집중했다.6) 또 최치원은 고변의 막하로 들어가기 위해서, 고변이 將帥가 되고자 하는 웅지를 젊어서부터 『춘추』를 통해서 길렀음을 칭송하고 있다. 고변의 막부에 들어가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이는 친우 고운(顧雲, 850~894)이었다. 고운에 대해서 최치원은 그가 고변에게 올린 글이 길이 전해질 명문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따라서 최치원 자신이 紀德詩 30편을 지어 올린 문장력이 효력을 보았던 것이다.7) 고변에게 발탁된 후, 그의 휘하에서 감찰과 문헌을 담당하였다. 권17부터의 글은 최치원이 고변의 종사관으로 재임하면서 지은 글이다. 최치원의 高騈幕府로의 투탁과 성공을 위한 노력을 엿볼수 있다.

2. 卷18 -절도사 고변에게 보내는 서신-

권 18

賀破淮口賊狀

879년 겨울 이후

賀高司馬除官狀

879년 겨울 이후

謝職狀

879년 겨울 이후

長啓

881년 7월 이후

謝加料錢狀

 

謝衣段狀

 

謝借示法雲寺天王記狀

 

謝示延和閣記碑狀

882년 1월 이전

謝改職狀

882년 1월 이전

謝探請料錢狀 

885년 3월 이전

與恩門裴秀才求事啓

 

前湖南觀察巡官裴

882년 1월 이전

獻生日物狀 五首

 

端午節送物狀 二首

882년 1월 이전

謝新茶狀

882년 1월 이전

謝櫻桃狀 

 

謝冬至節料狀 

 

謝寒食節料狀 

 

謝社日酒肉狀

 

謝疋段狀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卷18에 수록된 글의 찬술 연표

권18의 「사직장(謝職狀)」, 「장계(長啓)」는 고변 휘하의 막료로 나아갈 때 쓴 글이다. 「長啓」를 참고하면, 당에서 포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박학굉사과의 합격을 필수로 요했고, 이때 최치원은 잠시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또, "특별히 상주하여 천거해 주셨는데, 그 진중한 말씀을 천자께서 들어주시어 외람되게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영광을 입게 됐습니다"8) 라고 한 것에서 그의 관직은 고변이 특별히 상주하여 얻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18은 대부분 상주문(上奏文)이거나 필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내용이다. 대개 고변에게 배려를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거나, 고변의 글을 보고 느낌 점을 서술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한편, 특이하게 고변에게 올렸으나 최치원의 은인을 위해 작성한 글도 존재한다. 874년 예부시랑(禮部侍郞)이던 배찬(裴瓚) 주관의 진사시(進士試)에서 합격한 최치원은 은인의 형제인 배료(裴璙)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때문에, 「與恩門裴秀才求事啓」와 「前湖南觀察巡官裴璙啓」에서 은인을 위해 고변(高騈)에게 啓을 올리기도 한다. 

『구당서(舊唐書)』 卷19上 「懿宗紀」에 따르면 함통 9년(868) 7월 서주(徐州)에서 발흥한 반란은 1년이 넘도록 강남(江南)과 회남(淮南)을 휩쓸었다. 이때, 서주(徐州) 세력이 사주(泗州)지역에 욕심을 가지고 점령한다. 반란군의 사주 점령에 대응하고자 서주(徐州)와 회남군(淮南軍)간의 갈등이 발생하고, 중화(中和) 원년(881년)의 갈등 중 회구(淮口) 전투에서 회남군(淮南軍)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桂苑筆耕集》 卷18의 「賀破淮口賊狀」은 회남(淮南)이 승리했을 때 최치원이 고변(高騈)에게 보내는 축하장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9) 또, 《桂苑筆耕集》 卷18 「謝示延和閣記碑狀」에 따르면, 高騈은 "보천(補天)하는 힘이 넉넉하시고, 봉일(捧日)하는 마음이 부지런하십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성을 옮기자는 안건을 발의하시고는, 대가(大駕)가 옮겨 올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공손히 제왕의 순유(巡遊)를 기다리면서, 엄연히 연화각의 장관(壯觀)을 이루었습니다(力贍補天,心勤捧日,遂啓遷都之議,佇聆徙蹕之期,恭候宸遊,儼成壯觀。)"라고 주장하는데, 그 목적은 "3년 동안 어가(御駕)의 행차를 앙망한 단심을 가지고...(敍三年望幸之丹誠…)"와 "한 조각 근왕의 충절을 설명할 때에는...(述一片勤王之忠節…)"이라는 표현으로 봐서는 편집의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高騈의 당나라 수도 이전 모색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는 데 참고할 자료로 평가된다.10) 이와같은 자료를 통해, 최치원이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3. 卷19 -최치원의 중국생활과 지인 교류-

권 19

上座主尙書別紙

 

賀除吏部侍郞別紙

 

賀除禮部尙書別紙

 

濟源別紙 

 

迎楚州行李別紙 二首

879 10월 이후

五月一日別紙

879 11월 이후

謝降顧狀 

 

與金部郞中別紙 二首

885 3월 이전

與客將書

 

謝宋絢侍御書

 

答裴拙庶子書

 

謝高秘書示長歌書

 

謝李琯書

 

謝元郞中書

 

謝周繁秀才以小山集見示書

880년 12월 이후

與壽州張常侍書

 

賀楚州張義府尙書

 

與假牧書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卷19에 수록된 글의 찬술 연표

권19는 자신의 진사시 좌주였던 배찬 등의 지인과 회남 절도사 고변 휘하의 여러 인물에게 보낸 20편의 장ㆍ계ㆍ별지ㆍ잡서(雜書)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권13과 권14에 보이는 인물과 중복되므로, 이 글은 지인이나 동료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쓴 글이다. 「하제예부상서별지(賀除禮部尙書別紙)」에선 배찬의 예부상서 역임을 축하하며 우호를 다진다. 「상좌주상서별지(上座主尙書別紙)」또한 배찬에게 올린 글인데, 여기서 "도는 오직 잡념을 씻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11)고 서술하며 그의 도교적 성향을 드러낸다. 또 「與金部郞中別紙」에서 그는 본래 인재는 巢父나 許由같이 은둔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2)

4. 卷20 -최치원의 귀국 과정-

권 20

謝許歸覲啓

884

謝行裝錢狀

884

謝再送月料錢狀

884년 8월 이후

謝賜弟棲遠錢狀

884

上太尉別紙 五首

884

山神文

884년 10~885년 3

陳情上太尉詩

885년 초봄

奉和座主尙書避難過維陽寵示絶句 三首

 

歸燕吟獻太尉 

 

酬楊贍秀才送別

 

行次山陽續蒙太尉寄賜衣段令充歸覲續壽信物謹以詩謝

 

留別女道士

 

酬進士楊贍送別

 

楚州張尙書水郭相迎因以詩謝

 

酬吳巒秀才惜別二絶句

 

石峯

884년 10

潮浪 

 

沙汀 

 

野燒 

 

杜鵑

 

海鷗

 

山頂危石

 

石上矮松

 

紅葉樹

 

石上流泉

 

和友人除夜見寄

 

東風

885년 봄

海邊春望

885년 봄

春曉閒望

885년 봄

海邊閒步

885년 봄

將歸海東山春望

885년 봄

和金員外贈山淸上人

885년 봄

題海門蘭若柳

885년 봄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卷20에 수록된 글의 찬술 연표

권20은 귀국 관련 글과 시부(詩賦)로 구성되어 있다. 권20에는 40편의 계ㆍ장ㆍ별지ㆍ제문ㆍ시가 게재되었는데, 주로 884년 10월에 “회남에서 본국에 들어오면서 조서 등을 보내는 사신을 겸하여(淮南入本國兼送詔書等使)” 귀국길에 오를 때부터 885년 3월 귀국하기 직전까지 작성한 글로 구성된다. 최치원은 12세에 입당(入唐)하여 18년의 세월만에 귀국하는 것에 고변에게 감격과 감사를 전하였다.13) 이때 마중 온 사촌 최서원과 新羅國入淮海使錄事라는 職名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14)

「제참산신문(祭巉山神文)」은 최치원이 산동에서 풍랑으로 진입이 막히자 원활한 항해를 기원하며 쓴 제문이다. 「祭巉山神文」을 참고하면, 그는 김인규가 이끄는 신라 사신단과 함께 884년 揚州에서 출발하여 長江을 따라 대운하를 통해 북상하였다. 山陽과 楚州를 거쳐 淮河를 따라 황해로 진입하는 항로를 항행했다. 이후 산동반도에서 풍랑을 만나 이동하지 못하다가 해를 넘겨 885년에 귀국하였다.15) 이를통해, 9세기 신라와 당의 사신이 사용한 海路를 파악할 수 있다.16)


III. 『桂苑筆耕集』에 나타난 崔致遠의 道教的 인식

도교(道教)는 공맹(孔孟)의 유교에 비하여 많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중세 중국에서 학술적으로 도교라고 부르는 사상은 노자(老子)를 표준으로 하여, 장릉(張陵)까지도 연구대상에 포함되었다.17) 한반도에 어느시기부터 도교 사상이 도입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말엽에 渡唐留學生을 중심으로 수련적 도교가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 김인문전에서 "유가(儒家)의 책과 함께 노장(老莊)의 학설까지도 겸하였다"는 서술을 통해 알 수 있다.18) 이렇듯 도교는 신라사회에서 희귀한 소재가 아니라 보다 익숙한 소재였다. 그럼 신라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신라인 출신의 入唐留學生 최치원은 어떠한 도교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최치원은 어린시절 868년(경문왕 8)에 12살의 나이로 입당(入唐)하였으며, 낙양에 위치한 국자감 태학(太學)에서 공부하여 874년(경문왕 14) 7월 전에 예부시랑 배찬(裴瓚)에게 외국 유학생 손님인 빈공(賓貢)과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최치원은 당시 동아시아 문인들의 필독서였던 『문선(文選)』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문선(文選)』은 진(秦)・한(漢) 이래로 위진남북조시대 양(梁)・제(齊)까지의 시문을 총람한 것으로 여기에는 도교의 현학(玄學)이나 불교의 영향을 받은 시문들이 실려있다.19) 그는 884년(헌강왕 10) 10월에 당나라를 떠나 신라에 정착하고, 886년(헌강왕 12, 정강왕 元年) 1월에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진상하였다. 최치원이 入唐留學生 시절에 도교(道教)에 관한 이해를 갖추고 있었음은 필경집(筆耕集)의 "道는 본래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이니 진실로 琢磨의 이(理)를 끊은 것이다"20)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치원이 도교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桂苑筆耕集』의 다양한 서술에서 확인된다. 먼저, 권17에서 고변의 덕을 기리는 詩인 「朝上清」을 보면 "마음 整齊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上帝를 받드는 것은 어찌 仙道를 닦는 것이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함이지"라는 표현에서 도교적 사상이 돋보인다.21) 권18의 「헌생일물장(獻生日物狀)」에서 최치원은 고변의 생일에 海東人形蔘(:인삼) 등을 선물하며 호의를 산다. 여기서도 최치원의 도교적 사상이 드러난다. 그는 人蔘을 仙峯에서 왔다고 표현하며(況皆採近仙峯, 携來遠地), 스스로를 鰲峯 부근에 산다고 표현한다.22) 여기서 “鰲峯(鰲山)”은 『列子』 「湯問」의 삼신산 설화에 보이는 “仙峯(仙山)”과 같은 의미이다. 즉 봉래산 등의 해상 삼신산을 가리킨다. 글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인삼을 삼신산의 불로초와 연관 짓고 海東藥物로 부르고 있다.23) 권19에서 최치원은 그의 은인인 배찬에게 별지를 보낸다. 그 내용은 "賢人을 제자리에 임명한 것이 이미 오백년의 기한[五百年之期]에 맞을 뿐만이 아니요, 배움을 좋아하여 문하에 모여 드는 자들이 반드시 七十子의 숫자를 채울 것입니다"라는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24) 여기서 "오백년"이라는 표현은 도교적 관념에서 시기와 사회변화를 연결시켜 이해하는 개념으로, 오백년의 운세에 맞추어 흥복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글이다.25) 비슷하게 권18에도 최치원이 고변을 오백년 기한론을 인용해 칭송하는 장계가 있어, 高騈幕府의 도교적 성향과 최치원의 도교에 대한 이해가 일정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26) 최치원은 권20의 「留別女道士」라는 詩에서 "몇 년 동안 마고를 알아 매우 기뻤소(數年深喜識麻姑)"라고 표현하며, 주제의 女道士 즉 마고(麻姑)를 안 것에 기쁨을 표한다. 해당 표현을 통해 그가 도교(道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도사(道士)들과 교류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27)

최치원이 도교사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을 증명하는 증거는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를 풍류(風流)라고 하고, 교화를 행하는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적혀 있는데,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한다.28) 여기서 최치원이 표현한 삼교(三敎)란 유교-불교-도교의 3개 사상을 의미하며 그의 도교적 일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술 장치이다.29) 이 기록에서 「난랑비(鸞郞碑)」는 난랑이란 화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난랑(鸞郞)"은 다른 기록에선 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난랑비(鸞郞碑)」의 찬술시기를 화랑의 정치・사회적 활동이 두드러졌던 진성왕 즉위(887년) 이후부터 효녀지은(孝女知恩) 사건의 진성왕 중반 사이로 보는 추측이 있다.30) 또는 난랑을 진흥왕대 최초의 화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31) 만약에 정말로 "난랑(鸞郞)"이란 이름의 화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난(鸞)"이라는 한자를 굳이 화랑 또는 찬술자가 이용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본인은 적어도 비문이 작성되던 시기에 도교적 의미의 "난(鸞)"이 신라사회에서 이해되고 있던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도교적 맥락에서 난(鸞)이란 한자는 중국의 전설적인 ‘난새’를 의미하는 뜻을 가진다. 뜻을 나타내는 鳥(새 조)와 음을 나타내는 䜌(어지러울 련)이 합쳐진 형성자이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난도(鸞刀)는 옛날의 칼인데, 종묘(宗廟)에 사용하니, 종묘에서 지금의 칼을 사용하지 않고서 옛날의 칼을 사용함은 옛날의 일을 닦아 계승한 까닭이다"라고 하며, 《시경(詩經)》의 「신남산편(信南山篇)」에는, "그 난도를 잡아 그 순색(純色)의 희생(犧牲)을 고(告)한다"고 하였다. 《예기(禮記)》 「절해장(節解章)」은 "반드시 난도가 있는 것은, 그 난령(鸞鈴)의 소리가 궁성(宮聲)과 상성(商聲)이 조화(調和)된 후에 희생(犧牲)을 베게됨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32) 여기서 난도는 중국 고대 상나라(商) 시대에 사용되던 방울달린 칼 모양을 한 제사용 도구를 의미한다. 한국사의 신화적 시조로 기억되는 단군(壇君)과 달리, 역사적 실체가 있던 기자(箕子)를 잠깐 살펴보자. 기자라는 인물은 상나라 제을(帝乙)의 동생이기 때문에 신라인들도 상나라의 도교적 제의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예를들어,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경>(詩〈經〉)』·『상서(尙書)』·『예〈기〉(禮〈記〉)』·『〈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라고 하여, 삼경(三經) 중 주역(周易)보다도 상나라 전통과 연관있는 시경(詩經)과 상서(尙書)를 중시한 것이 의심된다.33) 때문에 난(鸞)을 호칭(呼稱)으로 삼을 정도로 도교적 개념을 중시하던 어떤 화랑 ‘난랑’(驚郞)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이해가 녹아있던 신라사회와 어린시절 또는 당나라 귀국후 마주한 최치원은 도교적 의의에 자연스레 충분히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후대 『海東傳道錄』 『海東異蹟』 『靑鶴集』 등 도교사서(道教史書)에 의하면, 최치원은 한국 도교의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고려-조선시대 한국인들에게 기억되었다.34) 이는 그의 일생에서 도교적 사상의 일면이 다분(多分)히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IV. 맺음말 

위 글은 『桂苑筆耕集』에서 드러나는 도교적 성격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최치원이 도교사상만을 탐닉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유교-불교-도교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삼교(三敎)를 아울러 균형을 잡았다. 최치원은 唐나라에서 도교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고 그에 따라 도출되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도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진 못하였고 어디까지나 사상적 이해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35) 그의 도교에 대한 태도는 황소(黃巢)의 난(亂) 당시 諸道行營兵馬道統이던 高騈의 영향이 크다고 추측된다. 『구당서(舊唐書)』와 『계원필경집』에 따르면, 고변은 열렬한 도교신자였고, 또 불교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묘사된다. 고변(高騈)은 휘하에 呂用之, 諸葛殷, 張守一와 같은 방사(方士)들을 폐장(嬖將)으로 두고 있었는데, 呂用之 등의 도교 방사들에게 惑하여 仙敎에 빠져 군무(軍務)에 힘쓰지 않고 출정(出征)하라는 명을 거역하면서 날마다 신선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심지어, 따로 호화로운 도원(道院)을 건설했다고하는데 고변은 이러한 일 등으로 인해, 최치원이 귀국한 뒤 2년 만에 실권을 뺏기고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36)  반면에 다른 중국측 연구에 따르면, 고변에 대한 악의적 평가는 억울한 면이 있다. 당나라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은 도교를 탐닉한 사람으로 인정되지만,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참고할때 고변이 회남에서 한 일은 실제로는 일종의 개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당시 고변의 군대는 서부 국경을 지키던 베테랑 장군 및 군사들로 구성되었고, 반란의 지도자인 황소(黃巢, 820~884)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당나라는 몰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변의 목표는 몰락하는 당나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개혁을 이끄는 사람들은 여용지(呂用之)가 이끄는 도교 방사(方士) 그룹이었고, 그들은 하류층과 밀접하면서도 양주(揚州, 양저우) 주변의 소금 매매를 독점하던 집단이었다. 그러나 여러 현(縣) 사이의 갈등은 결국 개혁의 실패를 가져왔다.37) 두 경우 중 어떠한 해석이더라도 최치원의 입장에서 도교 사상은 종교적으로 열중할 만큼 가치있는 사상이 될 수 없었다.

한편, 『桂苑筆耕集』 卷15 「天王院齋詞」에서 최치원은 舍利佛과 觀音菩薩에게 부처의 가피력으로 혼란한 당시 상황을 수습하도록 축원했다.38)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신라에 정착하면서 도교적 사상이 융합된 불법(佛法) 이해가 진행되어는데, 이는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나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 등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39) 또, 『桂苑筆耕集』에선 "공자의 생도가 된 것을 기뻐한다"고 하거나, 공자의 문하에 들기를 평소에 염원했음을 밝히고, 스스로 "末儒"나, "尼父의 生徒"라고 자처하였다.40) 동시에 『예기(禮記)』를 인용하며 불교와 유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삼교(三教)가 체제를 달리하지만 결국 한가지 뜻을 담았음을 강조하였다.41)

그렇기에 최치원은 유자(儒者)를 자처하면서도 마음은 불교와 노장사상을 수용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에 심취하면서도 유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이상을 통해, 최치원은 도교 사상에 대한 실망을 가지고 신라로의 귀환 후 불교의 신비주의적 기록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동시에 그는 유자(儒者)로서의 입장도 지키며 삼교(三敎)의 균형점을 가졌다. 후대의 유학자(儒學者)들조차 "(崔致遠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특별히 그 獨行의 뜻을 세운 것은 百世의 스승이 된다"42)고 평가한 것은 이러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


각주

[1] 남동신「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의 문화사적 이해」『진단학보』 112(0) (한국사학회, 2011), 185.

[2] 張日圭「최치원 학술대회의 성과와 과제」『신라사학보』 53 (신라사학회, 2021), 171.

[3]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권1 ~ 16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황제 칭송 및 축하황제 칙지에 감사 및 황제에게 요청조서에 대답인물 추천 및 조서 대답전황 보고 및 인물 추천물품 하사에 대한 감사상공(相公칭송고위직 인물의 관직 제수에 대한 축하각 절도사 및 지방 장관 편지편지10 감사 편지11 군사 관련 포고문 및 경고문12 휘하 인물 위로 및 편지13 휘하 인물 처분 통보 및 관직 제수 요청 편지14 휘하 인물 처분 통보 편지15 제사 제문16 제문 기().

[4] 손종흠·안대회『한국한문학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 및 동방한문학회 편『한국한문학의 이론산문』 (보고사, 2007) 참고.

[5] 『桂苑筆耕集 17 「再獻啓」 "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

[6] 『桂苑筆耕集 17 獻詩啓 “課日攻詩 虞訥之詆訶無避 積年著賦 陸機之哂笑何慙 俟其敦閱致功 琢磨成器”.

[7] 『桂苑筆耕集』 卷17 「獻詩啓」 "某啓:某竊覽同年顧雲校書獻相公長啓一首、短歌十篇,學派則鯨噴海濤,詞鋒則劍倚雲漢。備爲贊頌,永可流傳。… 附七言紀德詩三十首,謹獻司徒相公。… 惟將志業練春秋 早蓄雄心剗國讎 二十年來天下事 漢皇高枕倚留侯".

[8] 『桂苑筆耕集』 卷18 「長啓」 “遽蒙念以慕善依仁 特賜奏薦 重言天應 忝獲超昇 若非九重倚賴於功名 十道遵承於法令 則其恩命亦豈肯許”.

[9] 陳志堅、「唐末中和年間徐泗揚兵爭之始末——崔致遠《桂苑筆耕集》事箋之一」『魯東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5 (浙江大學歷史系, 2008), p.21. "中和元年的冲突中、淮口之定性的役。《桂苑集》卷18破淮口》是淮南战胜时崔致本人致高状:某昨日窃聆淮口报、今月八日、诸军势杀戮狂者。以徐州党、偶因聚、敢致喧......太尉相公雄振、妙略潜施......遂使淮山境、成虎豹之威、泗水孤城、免作鲸鲵淮泗诸军已合势击退了徐州的".

[10] 党銀平「新羅文人崔致遠桂苑筆耕集的 文獻價値」『신라사학보』 4 (신라사학회, 2005), 184~185.

[11] 『桂苑筆耕集』 卷19 「上座主尙書別紙」 "道惟滌慮,德以潤身".

[12] 『桂苑筆耕集』 卷19 「與金部郞中別紙」 "某仰審格言 窺性行 人能弘 道 賢臣以致堯舜先 世實須才 後士以效由是恥 然倜致堯舜之大猷 不介尊讚".

[13] 『桂苑筆耕集 20 謝許歸覲啓.

[14] 『桂苑筆耕集 20 謝賜弟栖遠錢狀.

[15] 『桂苑筆耕集 20 祭巉山神文 "去歲初冬 及東牟東 屬以滄流尙遠 玄律將窮 浪形匌㔩而鷁難浮艦 風響而鵠恐辭籠 遂艤刳木 聊安斷蓬".

[16] 최광식「新羅 下代와 崔致遠」『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38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7), 20.

[17] 『弘明集』 「滅惑論」 "案道家立法,厥品有三:上標老子,次述神仙,下襲張陵。"

[18] 『三國史記』 「金仁問傳」 "㓜而就學、多讀儒家之書、兼莊·老·浮屠之說。"

[19] 최영성「최치원의 도교사상 연구」, 『도교문화연구』 8 (한국도교문화학회, 1994), 9.

[20] 『桂苑筆耕集』 卷15 「中元齋詞」 "伏以道本名。固絶琢磨之理。"

[21] 『桂苑筆耕集』 卷17 「七言紀德詩」 "齊心不倦自朝眞、豈爲修仙欲濟人".

[22] 『桂苑筆耕集』 卷18 「獻生日物狀」 "某居近鰲峯및 「物狀」 "況皆採近仙峯携來遠地儻許成功於藥臼必願捐軀如能入用於蓬 壺可知實腹 誠慙菲薄 冀續延長".

[23] 김성환「在唐 新羅人의 도교 활동과 羅唐간의 상호적 仙遊에 관한 연구」『동양철학』 (36) (한국동양철학회, 2011), 129.

[24] 『桂苑筆耕集』 卷19 賀除吏部侍郞別紙.

[25] 이성호「최치원의 기록에 나타난 오백년 기한설과 도통론」『역사와경계』 103 (부산경남사학회, 2017), 10.

[26] 『桂苑筆耕集』 卷18 「端午節送物狀」.

[27] 최영성「최치원의 도교사상 연구」, 『도교문화연구』 8 (한국도교문화학회, 1994), 12.

[28] 『三國史記』 「新羅本記 眞興王」 "崔致遠鸞郞碑序曰、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生。"

[29] 張日圭, 2005, 「최치원의 삼교융합사상과 그 의미」『新羅史學報』 4

[30] 송은일. (2008). 최치원의 「鸞郞碑銘」 찬술과 그 의도역사학연구, 34, 6..

[31]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乙酉文化社, 63.

[32] 『朝鮮王朝實錄』 「世宗實錄 卷128 「五禮 / 吉禮序例 / 祭器圖說 / 鸞刀」 "《聖宋頒樂圖》云《禮記》‘鸞刀古刀也用於宗廟。 宗廟不用今刀而用古刀修古之故。《詩》 《信南山》曰: "執其鸞刀以啓其毛。《禮記節解》曰: "必有鸞刀者取其鸞鈴之聲。 宮商調和而後斷割也。"

[33] (壬申 … 辛未年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서기석 전문(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34] 최영성위의 논문, 5.

[35] 『桂苑筆耕集序』 徐有榘(서유구, 1764~1845) "若其居幕數載。知高騈之不足有爲。呂用之,諸葛殷等之誕妄必敗。超然引去。去三年而淮南亂作。則又有似乎知幾明哲之君子".

[36] 최영성「최치원의 도교사상 연구」, 『도교문화연구』 8 (한국도교문화학회, 1994), 13~14.

[37] 山根直生唐朝軍政統治的終局與五代十國割據的開端」『浙江大學歷史系(人文社會科學版) 34 (浙江大學歷史系, 2004),pp.80-81.

[38] 장일규「최치원의 유불인식과 그 의미」『한국사상사학』 19(0) (신라사학회, 2002), 53.

[39] 한정호「최치원의 해인사 인연과 기록에 관한 고찰 -해인사의 기록자 최치원」『가라문화』  31(0)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2022), 82-87. … 「신라가야산해인사결계장기(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 "여기에는 신라(新羅) “시라(尸羅)”에서 비롯됐다고 했으며나라의 명칭을 시라라 한 것은 실로 바라제(波羅提)가 법을 일으킨 곳이어서 이며산을 가야(迦耶)라 한 것은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과 같아서이다", 「증희랑화상(贈希朗和尙)」 "빈공(斌公)이 피안(彼岸)에 금성(金聲)을 떨쳤지만 가야(伽倻)에서 부처의 자취 이은 것과 같으랴".

[40] 桂苑筆耕集 19 「賀除吏部侍別紙」 "今遠人稱尼父生徒 光輝無比", 17 「獻詩啓」 "每嘗窺再之牆", 18 「謝示延和閣記碑狀」 "誰料末儒", 19 「賀除吏部侍別紙」 "今遠人稱尼父生徒 光輝無比".

[41] 장일규「최치원의 유불인식과 그 의미」『한국사상사학』 19(0) (신라사학회, 2002), 41~42.

[42] 『孤雲集』 「孤雲先生事蹟」 西嶽志 “以靑松黃葉之句 爲密贊麗業 則必史傳之陋耳 見幾高蹈 終於隱晦 迹不染麗代之 世 其特立獨行之義 又可謂百世之師”.


≪参考 文献≫

••••••••••••••••• 【史料】 •••••••••••••••••

『桂苑筆耕集』

『孤雲集』

『三國史記』

『弘明集』


•••••••••••••••• 【단행본 및 논문】 ••••••••••••••••

党銀平, 마중가 역, 『최치원 신연구』 (한림대학교출판부, 2004).

동방한문학회 편, 『한국한문학의 이론- 산문』 (보고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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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3학년도 2학기 역사글쓰기(HIS4031) 강의를 통해, 2023년 12월 13일에 제출한 논문 과제 자료입니다. 작성과정에서 피드백을 해주신 조범환 교수님(曺凡煥, 한국고대사 1998), 그리고 박단 교수님(Universite de Paris 1 (Pantheon-Sorbonne), Ph.D. 1995)께 감사드립니다.

 

『桂苑筆耕集』을 바탕으로 한, 崔致遠의 在唐前後의 시대적 배경과 道教的 사고관 이해 by Jaehyun Park is licensed under CC BY-ND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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