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東史] 이슬람 사회에 끼친 서구의 영향

이슬람 사회에 끼친 서구의 영향

I. 머리말
II. 1차세계대전 이전 이슬람 사회와 근대주의
III.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슬람 사회
IV. '이슬람 원리주의'의 등장
V. 맺음말

I. 머리말

  이슬람의 근대 시작점은 어디일까? 바로 1798년 나폴레옹의 알렉산드리아 침략이라 할 수 있다. 150명의 학자와 3만5천의 병사로 몰타 점령한 나폴레옹은 1798년 7월1일 이집트에 상륙, 7월3일 알렉산드리아 점령, 7월 27일 피난민들 앞에서 전투하여 맘루크 군을 상대로 완벽하게 승리한다. 1801년까지 프랑스가 이집트를 지배했으나, 1802년부터는 영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오스만 튀르크의 이슬람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되고, 결국 1920년 산 레모(San Remo)에서 협상을 통해 중동 전역을 서구 열강들이 피자 자르듯 나누게 된다.

II. 1차세계대전 이전 이슬람 사회와 근대주의

  나폴레옹의 알렉산드리아 침략(1798)은 흔히있던 침략이 아니라, 한 시대의 흐름이었다. 무슬림들은 서구 문화가 이슬람 문화를 압도하자,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학자들이 등장한다. 그중 유명한 인물이 근대론자였던 자말 앗딘 알아프가니(Jamal al-din al-Afghan, 1838~1897)이다.

그는 수피가 근대 이전 무슬림사회에게 부정적 영향을 크게 끼쳤다고 보았다. 수피는 집단을 이루며 수행을 하던 사람들이다. 서양의 수도회처럼 세상과 떨어지진 않았으며, 속세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다. 수피는 주로 영적 파워를 지녔다는 인물을 중심으로 교단을 형성하고, 인물에 대한 기복 신앙을 가졌다. 하느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꿈꾸는 사람들이었기에 초현실적인-현실도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학자 자말 앗딘 알아프가니는 이런 초현실주의-현실도피적인 태도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슬람은 현세와 사후, 모두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하는데 수피들은 이세상은 뒷전이므로 문제가 있다는 논리로 수피를 비판한다. 자말이 보기에, 수피들은 삶속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초현실적 태도를 가졌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서양문물을 수용하기를 원한 근대론자였으나, 서구중심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서양문화는 본래 이슬람문화권에서 전해졌기 때문에, 아랍의 문화를 다시 가져오는 활동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자말 앗딘 알아프가니는 이슬람은 삶의 모든 것, 총체적 삶을 사는(Total way of life) 종교임을 주장한다. 즉, 이슬람은 성역-속세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법의 종교가 아니므로,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차이점을 가진다. 

III.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슬람 사회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오스만의 전력을 얕보았다. 갈리폴리 패전 이후, 오스만을 얕보았음을 깨달은 영국은 메디나의 존장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sein)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1915년 7월~1916년 3월까지 이집트에 있던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멕마흔(Hendy Mcmahan)은 후세인과 편지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랍 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을 영국이 돕기로 약속한다. 다만, 영국은 모순되는 3가지 약속을 진행하고 있었다. 각 약속은 ①후세인-멕마흔 서한(1916), ②소아시아 협정(1916), ③벨포어 선언(1917)으로, 그 약속이 실제로 실행될 가능성은 낮았다.

1919년 파리박람회에서 전후질서가 한차례 협상된 후, 1920년 산 레모(San Remo)에서 옛날 오스만의 통치령 즉 아랍 영역을 서구 열강들은 위임통치령(Mandate)으로 분할한다. 그래서 프랑스가 시리아(Syria)와 레바논(Lebanon) 지역을 통치하고, 영국이 요르단(Trans Jordan)과 팔레스타인(Palestine)을 통치하도록 중동 지역을 분할한다.

IV. '이슬람 원리주의'의 등장

  1922년 독립한 이집트에선 수에즈 운하의 권리를 여전히 프랑스-영국이 가지고 있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이집트인들에 의해 1928년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이 탄생한다. 명목상으론 독립 왕정 국가였으나, 영국 군대가 주둔하고, 수에즈 운하의 이익도 빼앗기던 이집트 민중들은 많은 불만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 중 21살의 하사르란 청년은 불만을 가지고, 이슬람의 근본적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였다. 그는 “우리가 이슬람을 제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에 감화된 사람들이 만든 단체가 무슬림 형제단이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적 삶을 중시하며, 샤리아(이슬람법)가 지배하는 사회를 목표시한다. 국가 안에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는 종교공동체를 만들려는 하였고 그것이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이다.

그런데, 이슬람국가를 만들려면, 현재의 정권을 뒤집어야 했고, 때문에 정권전복운동이 형성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상황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8세기 말부터 무슬림 사회에 닥친 서구의 힘에 대항해서 참된 이슬람을 만들려는 운동이며 현대주의운동이다.

V. 맺음말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은 1979년 이란혁명으로 그 사상을 현실에 투영해낸다. 그리고 혁명에 자극받은 이슬람 세계는 아프칸 전쟁(1979~1989), 이라크-이란 전쟁(1980~1988), 1차 걸프전쟁(1991), 2차 걸프전쟁(2003)까지 큰 상처를 경험한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시작된 서구에 의한 근대적 아랍 세계의 형성은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그리고 혼란의 대가는 혼란을 초래한 서구가 아닌 이슬람 세계가 대신하여 짊어졌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1) 에스포지토(박현도, 송영은 공역), 『이슬람의 모든 것』, 바오, 2020.

2) John L. Esposito - What Everyone Needs to Know about Islam, Seco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1).

3) Marshall G. S. Hodgson, 『The Venture of Islam, Volume 1: The Classical Age of Isla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4) 박태식, 주원준, 박현도 공저, 『신학의 식탁』 (들녘, 2019).

5) 박현도, 「이슬람교의 이해」 및 「이슬람사」 강의록 참고.

6) [#中東史] 십자군 전쟁의 의미와 후대에 미친 영향, <Blogspot>, 2023-12-2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2/blog-post_25.html>

7) [#中東史] 튀르크인과 이슬람사, <Blogspot>, 2023-12-21,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2/blog-post_21.html>

8) [#中東史] Shia파와 Sunni파의 분열 (Islamic history), <Blogspot>, 2023-11-07,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1/shia-sunni-islamic-history.html>

9) [#中東史] 이슬람(Islam)의 역사성, <Blogspot>, 2023-11-07,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1/blog-post_7.html>

10) 모로코 종교학자평의회 사무총장 Ahmed Abaddi 박사 초청 강연 -이슬람 극단주의 원인을 중심으로한 재요약-, <Blogspot>, 2023-09-26,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9/ahmed-abadd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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