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史] 신라 죽엽군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신라 죽엽군(竹葉軍)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 신라 미추왕과 관련된 죽엽군 설화를 중심으로 - 

  I. 머릿말
  II. 신라 죽엽군(竹葉軍) 전설의 이서국
  III. 이서국(伊西國)과 이토국(怡土國)
  IV. 미추왕(未鄒王) 설화의 죽엽군(竹葉軍)은 누구였나?
  V. 백제의 구원과 시대적 배경
  VI. 맺음말 



I. 머릿말

  신라 미추왕(未鄒王)은 262년에서 284년까지 제위한 13번째 신라 임금(王을 뜻하는 순-한국어, 이사금의 변형이라는 학설이 있다)이다. 그는 신라에서 처음으로 제위한 김씨(金氏) 임금이었는데, 김알지의 6세손이라고 전해진다. 前代 12대와 後代 14대가 석씨(昔氏)라는 점에서 특이점을 가진다. 미추 이사금의 시대에 신라 기록은 많은 백제의 침략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외 외부세력과의 접촉은 기록이 없다. 미추 이사금의 왕릉은 '미추왕 죽엽군 설화(未鄒王 竹葉軍 說話)'와 관련이 있다.


II. 신라 죽엽군(竹葉軍) 전설의 이서국

  13대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의 기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2대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과 14대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 AD 284–298)의 기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라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의 前代는 12대 첨해 이사금(AD 247-261)으로 석씨 임금이다. 첨해 이사금의 시대에는 백제와의 많은 전투, 그리고 고구려와의 화친을 암시하고 있다. 또, 왕의 친척인 석우로 장군이 일본군에게 사망했는데, 이는 일본 신공황후 기록과의 일치성이 지적된다. 신라 기록 기준에서 그 사건은 250년에 발생했다. 또 250년대에 『三國志』 「魏志」에서 신라(진한)에 13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기록한 것에서, 신라가 크게 약체화되어 점령당했던 국가들이 재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거칠국(독로국), 이서국, 초팔국(다라 가야)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이서국(伊西國)'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이서국(伊西國)의 점령을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AD 27-54) 시대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서국(伊西國)은 14대 유례 이사금(AD 284–298) 시대에 신라의 수도 금성에 침공하는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전세를 바꾸었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쌓여 있어, 그제야 先王의 숨겨진 공적(陰功)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대나무가 나타는 무덤)이라 불렀다.

이서국(伊西國)은 현재의 청도군(淸道郡) 지역에 있던 국가였다. 이서(伊西)라는 명칭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5)시대에 청도(淸道)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경덕왕의 지명변경은 신라의 전통적이던 「발음을 기준으로 한자를 표음문자로 채용하여 사용한 방법」을 의미기반의 한자(漢字) 방식으로 변환하는 작업이었다. 특이점은 여기서 기존 지명의 발음이 가지는 의미가 한자로 변형되었다는 의미이다. 고대 한반도에서 사용된 伊西의 발음이 '푸르다'는 의미가 반영된 무언가와 비슷했을 수 있다. 청도군(淸道郡)은 전통적으로 '소 싸움'이 발달한 지역인데, 이 전통이 언제부터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부터 계속된 전통일 가능성도 있다.


III. 이서국(伊西國)과 이토국(怡土國)

  이서국은 14대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 AD 284–298) 시대에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신라측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슷한 발음의 국가가 일본 관련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그것이 이토국(伊都国)이다. 중국의 『三國志』 「魏志倭人傳」에서 언급되는 이토국(伊都國)은 일본측 기록의 이토국(怡土國)에 해당한다고 비정된다. 그곳은 현재의 후쿠이현(福岡県) 이토군(怡土郡)에 해당한다. 중국의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과 위략(魏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原文:

    『三国志魏書』 「卷三十 東夷傳 倭人」:東南陸行五百里 至伊都國。官曰爾支 副曰泄謨觚・柄渠觚。有千余戸 丗有王 皆統属女王國。郡使往来常所駐。

    『魏略』:東南五百里 到伊都國。戸万余。置官曰爾支 副曰洩渓・柄渠。其國王皆属女王也。

王이 있다고 명확히 기록된 왜(倭)의 국가는 伊都国, 邪馬台国, 狗奴国 뿐이다. 나머지 국가는 장관(長官), 부관(副官)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토군(怡土郡)은 7세기 중엽의 大化의 改新 이전에는 伊覩縣이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주아이 천황(仲哀天皇)의 치쿠시 친정(筑紫親征) 때에 귀순(帰順)했다고 한다. 『筑前国風土記』에 의하면, 「高麗の意呂山(おろのやま)に天より下った日拝(≠天日鉾命?)の苗裔である」라는 가사를 노래했다고 한다. 

학자 '카미가이토 켄이치(上垣外憲一)'는 '「延烏郞と細烏女」と天之日矛(1990)'라는 논문에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 설화」(AD 157)의 주인공을 怡土国의 왕으로 추측한다. 즉, 이서국(伊西國)에서 건너온 '이스히코'가 야마토(大和)와 경쟁하면서 호쿠리쿠(北陸)와 세토내해(瀬戸內海)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 금성을 공격했던 신라 기록의 이서국(伊西國)은, 사실 일본으로 이주한 이토국(怡土國)이 다시 그들의 고향인 한반도 동남부 고향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IV. 미추왕(未鄒王) 설화의 죽엽군(竹葉軍)은 누구였나?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보자. 그럼 미추왕(未鄒王) 설화에 등장하는 죽엽군은 누구였을까? 설화의 핵심을 살펴보자. 

(1)멸망했던 이서국이 석우로의 사망으로 부활했다. → (2)부활한 이서국이 신라 수도 금성을 침공했고, → (3)그것을 죽엽군(竹葉軍)이 방어하였다. → (4)죽엽군은 전투 후에 사라졌다. → (5)죽엽군은 사실 죽은 前王 미추왕의 숨겨진 공작 덕분에 등장했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그럼 죽엽군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선, 사건이 발생한 3세기 후반의 한반도는 북방의 세력 구도에 큰 변화가 발생하던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고구려가 중국의 낙랑군을 점령했으며, 백제는 마한을 점령하며 전성기의 기틀을 닦는다 (백제 전성기의 기반이 만들어지는 시대가 일본 신공황후의 침략으로 백제와 일본이 접촉했다는 설화와 연결점이 있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3세기 후반부터 가야의 고고학적 증거에선 북방 부여계 세력의 물질 양식의 전파가 드러나며, 이는 북부 세력의 남쪽으로 이동과 융합을 드러낸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두가지 가설을 살펴보자. 

첫번째 가설은 미추왕 설화 그대로, 미추 이사금(未鄒尼師今, 262-282)의 김씨 가문이 석씨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의 금성을 구원했다는 가설이다. 미추 이사금은 김알지의 6대손으로,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는 金氏 구도(俱道)라는 인물이 있었다. 俱道는 현재의 한국 '의성군'에 있던 소문국(召文國)과 결혼 동맹을 맺었는데, 이 사건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154-184) 시대의 사건이었다. AD 173년에는 俱道를 파진찬(波珍湌, 17위의 4위 계급)으로 삼았다고 한다. 『高麗史』에 따르면, 소문국(召文國)은 경상북도 의성군 지역에 있었던 국가이다. 조문국이라고도 한다. 소국과의 결혼동맹으로 힘을 축척한 김씨 가문이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 AD 284–298)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비교하면, 未鄒尼師今의 아버지가 俱道라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은 모순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번째 가설은 신라의 멸망을 우려한 백제가 개입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 관련 기록에 남은 대나무(竹)와 관련된 자료들을 살펴보자. 대나무(竹)와 관련된 대표적인 기록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5년(AD 158년) 3월의 기록이다. 여기서,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죽령(竹嶺)은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 사이의 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이 있다"라고 한다. 죽령길은 조선시대까지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3가지 길 중에 하나였다. 죽령, 문경새재, 추풍령의 3가지 길은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통하는 관문으로 기능했다. 삼국시대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는 주요한 길목이자,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생명선으로 기능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낙동강을 통해 빠르게 물자를 북쪽으로 수송하고, 죽령을 넘으면 곧바로 한강유역과 이어지는 평지가 나타난다. 

고구려의 전성기 시대,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장수왕 말년(서기470년)에 죽령을 점령한다. 죽령은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국경선으로 기능했다. 후대 신라 진흥왕 때가 되어서야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서 빼앗는다. 551년(진흥왕 12) 이전에, 죽령 입구에 성을 쌓으면서 만든 비석이 『단양 신라 적성비』이다. 아래는 해당 비석의 판독문이다.

    ※ 原文:

▨▨▨▨月中. 王敎事大衆等. 喙部伊史夫智伊干▨, ▨▨▨豆弥智佊珎干支, 喙部西夫叱智大阿干▨, ▨▨夫智大阿干支, 內礼夫智大阿干支, 高頭林城在軍主等, 喙部比次夫智阿干支, 沙喙部武力智阿干支, 鄒文村幢主沙喙部噵設智及干支, 勿思伐▨▨▨喙部 助黑夫智及干支, 節敎事.

赤城也尒次▨▨▨▨中作善庸懷懃力, 使死人, 是以後, 其妻三▨▨▨▨▨▨▨▨▨▨▨許利之. 四年少女, 師文▨▨▨▨▨▨▨▨▨, 公兄鄒文村▨珎婁下干支, ▨▨▨▨▨▨▨▨▨者, 更赤城烟去使之. 後者公▨▨▨▨▨▨▨▨▨異葉耶, 國法中分与, 雖然伊▨▨▨▨▨▨▨▨▨子, 刀只小女, 烏礼兮撰干支, ▨▨▨▨▨▨▨▨使法赤城佃舍法爲之.

別官賜▨▨▨▨▨弗兮女, 道豆只, 又悅利巴小子, 刀羅兮▨▨▨▨▨, 合五人之.

別敎, 自此後, 國中如也尒次, ▨▨▨▨▨▨懷懃力使人事, 若其生子女子年少▨▨▨▨▨▨▨兄弟耶. 如此白者, 大人耶, 小人耶,

▨▨▨▨▨▨▨▨▨部奈弗耽郝失利大舍, 鄒文▨▨▨▨▨▨▨▨▨, 勿思伐城幢主使人那利村▨▨▨▨▨▨▨▨▨人, 勿支次阿尺, 書人喙部 ▨▨▨▨▨▨▨▨▨人, 石書立人, 非今皆里村▨▨▨▨▨▨▨▨智大烏之.

(출토: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번지)

고구려와 신라를 가르는 주요한 경계로 기능하기도 했다. 나중에 김춘추가 연개소문과 교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도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9주 5소경 행정구역을 구분할 때 원신라 영역(현 경상도) 상주와 원고구려 영역 명주, 삭주의 경계선이었다.

신라 진흥왕 12년(AD 551), 거칠부 등 여덟 장수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고, 죽령 북쪽의 고을 10개를 탈취했다. 그 40년 뒤인 영양왕 1년(AD 591) 평강공주의 남편이자, 고구려 명장 온달이 왕께 자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기록(삼국사기)이 남아있다. 그가 출정했지만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지역이 이곳 죽령이다. 이와같은 기록들을 통해, 죽령이 한반도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을 가르는 산맥을 통과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던 죽령은, 오늘날에는 교통의 발전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4.5km에 달하는 지하터널을 통해 물자가 통과되고 있다. 신라시대에 '죽령사'라는 사찰이 세워졌을때, 이곳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신라왕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더불어, 이곳은 죽죽(竹竹)이란 인물을 기리는 사당과 함께, 불교적 사찰인 '부석사', '초암사' 그리고 '희방사'가 지어진 곳이다. 竹嶺은 한국어로 종종 "대재"라고 불리었는데, 죽령(竹嶺)과 "대재" 둘다 '대나무의 길'이라는 뜻을 가진다. 


V. 백제의 구원과 시대적 배경

  즉 두번째 가설에 따르면, 대나무 상징을 가진 병사들이 신라를 구원했는데, 마침 신라가 백제와 소통하는 경로는 '대나무의 길'이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이상을 통해 (1)의 김씨 가문이 신라를 구원한 것이 아닌, (2)의 신라의 멸망에 의한 힘의 공백을 우려한 백제가 신라를 구원했다는 가설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던 적국인 '백제'의 도움을 인정할 수 없던 신라인들이 이미 사망한 '미추왕'의 도움으로 이야기를 변형한 것이다. 또는, 신라 내부에서 힘을 기르던 김씨 가문이 왕권에 욕심을 가지고 '미추왕 죽엽군 설화(未鄒王 竹葉軍 說話)'라는 프로파간다를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삼국사기에 작성되어 있는데, 서동요 설화이다. 서동요 설화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거짓된 노래 이야기를 전파한다는 플롯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신라인들의 생각의 기원이 '죽엽군 설화'의 목적성을 가진 인위적 배포에서 시작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백제가 신라를 구원했던 것이라면, 왜 백제군은 힘의 공백지대였던 신라를 점령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전후처리도 하지 않고, 백제로 복귀했던 것일까? 이는 일본의 신공황후 전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신공황후는 신라를 점령하고, 마한을 점령했으나, 최초로 백제라는 외국과 접촉한 뒤,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고 한반도 서남부 영토를 백제에게 할양했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 서남부에서는 일본식 전방후원분이 발견되고 있다. 신공황후는 그 조상으로 보건데, 신라에 기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근거로 신라를 침공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백제와 일본은 우호관계를 맺었고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동시대 국력을 보았을 때, 백제는 일본에 비교해서 약체였다. 또 백제는 북쪽은 낙랑국이 멸망하면서 형제국 고구려가 차지하고, 동쪽은 일본의 영향력을 받고 있던 신라가 존재했다. 때문에, 백제는 유일하게 확장이 가능한 동쪽 신라를 공격했지만, 신라는 모든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이런 상황에서 이토국(怡土國)의 침략은 백제가 신라의 멸망에 따른 동맹국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걱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때문에, 백제군은 그들이 백제군이란 사실을 숨긴채로 신라를 구원했고, 그 사실이 동맹국이던 일본에게 들켜서는 안되기 때문에 급히 백제로 복귀했던 것이다. 


VI. 맺음말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제1에 수록된 미추왕 죽엽군 설화 (未鄒王 竹葉軍 說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혜공왕(惠恭王, r.765년 ~ 780년)은 신라의 35대 임금이다. 혜공왕 15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죽현릉(竹現陵, 미추왕릉이다) 방향으로 불어 가고 있었다. 얼마 뒤 무덤이 진동하며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는데,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는 군신이 저의 드높은 공적을 잊음이라.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겠습니다.” 이에 미추왕이 설득하였더니 김유신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경신(金敬臣)을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어 대신 사과하고 공덕보전(功德寶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김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 뒤로는 사람들이 나라를 지킨 미추왕의 음덕을 사모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고, 서열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김유신 유령이 등장했다는 설화의 형성은 사실 혜공왕 시대 정치적 사건에 따른, 김유신계의 불만 축척이 원인이었다. 또,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혜공왕(惠恭王)의 조상이자, 후기 신라왕조의 조상인 미추왕을 삼산신(三山神)과 동급으로 대우하고, 그 서열을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도 상위로 대우한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한국 학계에선 종종 혁거세의 '거서간'이란 칭호가 '칸'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실 마한인 김씨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위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김씨 신라 왕조는 혁거세는 타민족의 시조로서 명목상으로만 대우하고, 실질적으론 김씨(金氏)의 조상인 미추왕(未鄒王)을 더 우대하였다. 산신(山神) 신앙은 본래 일본측에서 유행하던 신앙으로, 씨족의 '조상신'을 산신(山神)과 동급으로 취급한 것에서 후기 김씨 신라왕조의 신앙에 대한 몰이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후기 김씨 신라왕조가 산신(山神) 신앙과 무관계하다는 것이 반증된다. 

한편, 미추왕 죽엽군 설화(未鄒王 竹葉軍 說話)는 『삼국사기』의 「김유신조」에도 비슷하게 등장한다. 김유신이 찾아가 읍소할 상대 왕릉으로 미추왕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고 말하며(태종 무열왕이나 문무왕이면 이해가 가지만) 모태(募泰) 원종(原宗)이라 이름한 법흥왕릉의 투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한 연구도 있다.

김유신가와 왕실과의 군신 관계는 원종왕(법흥왕)과의 사이에서 맺어졌으며, 법흥왕의 '원종'과 미추왕의 고대시대 음소값이 비슷하여 생긴 혼동으로 『삼국유사』의 미추왕·김유신의 관계가 설화화된 것으로 추단되고 있다.


【참고자료】

1) 죽령길에 얽힌 이야기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 기사), <Blogspot>, 2022-05-03,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2/05/5158.html>(8:42).

2) 「삼국유사소재 미추왕고」(문경현, 『삼국유사연구』, 영남대학교출판부, 1983)

3) 上垣外憲一, (1990), 「「延烏郞と細烏女」と天之日矛」 『天孫降臨の道』, 福武書店, pp.125-132.

4) 미추왕 죽엽군 설화 (未鄒王 竹葉軍 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4-01-08,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0022>(8:50).

5) 소문국 (召文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4-01-08,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0022>(8:50).

6) 단양 신라 적성비 (丹陽 新羅 赤城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고대금석문 자료일람>, 2023-01-08,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gskh>(9:00)


[#東洋史] 신라 죽엽군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by Jaehyun Park is licensed under CC BY-ND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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