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문명의 차이는 결국 철학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 그리고, 동양의 한계

 

[#짧은 생각]

만약에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속여서 이득을 얻은뒤에, 속은 사람이 진실을 제시하자 끔찍한 주장이라며 외면한다면, 도대체 이 속인 사람의 사고구조가 무엇일까?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라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다. 달콤한 거짓으로 진실을 모르다가 거짓의 확장으로 모순이 생기는 것보다는, 사실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 인간공동체의 입장에선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난 멍청하게 구조적 모순을 보수공사하며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기보단, 스스로 주도적으로 거짓말을 부수고 사실을 바로세우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짧은 생각]

문명의 차이는 결국 철학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전 동양의 문명이 뛰어났다고 주장하는 동양재평가자들을 싫어합니다. 애당초 현대적 의미의 "진리"란 서양에서 도래한 개념으로, 동양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라는 비인간 절대 개념을 상정한 서양의 문명구조와 달리, 황제 또는 왕이라는 욕망을 가진 절대권력자에 의해 옳고 그름이 좌우되고, 역사책을 조작하여 기록을 말살하는 것이 가능한게 당연하다는 문명구조는 본질적 발전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전 솔직하게 동양의 문명구조는 한계가 명확한 실패작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동양재평가자들이 주장하는 평화롭고 번영하는 동아시아는 중국인들의 역겨운 뒷면의 역사를 무시하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정사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학설이 아닌 권위에 의한 옳음이 주장되는 것이 동양사인데 동양에서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동양의 대다수는 그게 왜 문제인지를 모릅니다.

왜냐면 사실 동양인들의 다수는 서구에서 도입된 비교적 새로운 개념인 '진리'를 동양의 전통적인 옳음인 '권위'와 같은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기반한 원칙과, 진리에 기반한 원칙의 명백한 차이는 사람의 진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거짓으로 짙게 색칠된 동양문명은 아무도 진심으로 공동체를 위하지 않습니다. 동양문명옹호자가 아무리 각종 성현들의 말을 제시하고, 도덕을 제시하더라도, 마치 오늘날의 중국처럼 아무도 진심으로 공동체를 위하지 않는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중국인 조상들의 성공을 모방합니다. 그리고 조사하면 알게되는 것은 중국인조상들의 성공 원인은 권위로 중국인의 주장을 제외한 기록들을 제거하고, 거짓말로 타인들을 잘 속여서 나머지를 모두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육을 제대로 받은 중국인들은 조상의 악행을 그대로 따라하고, 가장 잘 따라한, 잘 속이고, 잘 배신하고, 잘 역사를 조작한 사람이 황제가 됩니다.

심지어 중국계 사람들은 이를 악행이라고 자각하지조차 않습니다. 왜냐면 당한 이가 실패자이고, 진리란 없는 개념이며, 역사는 승자가 조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란 주장이 자주 인용되는 배경이기도합니다.

어쩌면 더 심각하게도 중국계 성씨가 인구다수를 차지해도 그게 당연하다는 역사의 왜곡이 진행되고, 또 그것을 모르는 국가가 있고, 중국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가짜 비중국인 집단이 그들의 진짜 조상인 중국인 조상의 문명을 위해 중국적 문명구조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혹시 당신은 당나라의 장수들과 귀족들, 황제의 성씨를 아시나요?

문명구조의 문제는 해결법조차 없습니다. 문명의 구조가 권위라는 강요와 조작에 기반한 경우, 진리라는 구조를 한번도 사용하지 못한 문명의 경우, 완전한 파괴와 다른 정상적 구조로의 대체만이 답이 아니겠습니까?


[#짧은 생각]

우선 단언컨데 진실은 언제나 옳다. 왜냐면 진실 자체의 정의가 인지되기 전의 상상의 이상적 원형으로서 그 어떠한 과거, 미래, 현재의 어떠한 인지로도 그렇게 인지된 원인이 해설 가능한 구조이며 때문에 모든 변함의 최종적 도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란 설령 증거를 토대로 추적해 인지된 모든 정보의 총합으로 원형을 나타내더라도 진리의 원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도달하는 길이 끝없이 길지만 반드시 목표시해야할 합의된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실은 언제나 향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동양적인 조작과 거짓이 진실추구 사상과 병립 가능한가? 절대 아니다.

진실의 추구 사상은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며 그래서 어떠한 경우라도 발전주의자들에게는 반드시 인류의 지향점이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황제식 권위주의는 정반대이다. 이들은 애초에 진리-거짓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이 없고,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동양의 통합이니 태극이니 평화라고 주장하는 사상들은 실상 인류를 나락의 구덩이에 빠뜨리는 쓰래기이다. 선악이 구분이 없이 통합되니 양심의 가책 없이 조작을 하고, 평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성에 대한 최종적 저항형태인 생존을 위한 폭력마저 무조건적 악으로 만든다.

반면, 진리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거짓을 배척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이익과 진리 충돌 사이에서 선한 진리를 추구하므로 언제나 상처를 감수한다.

만약 두 사상이 병립한다면, 이익을 배제하더라도 상처를 감수하는 문명의 원동력을 만드는 집단은 반대로 동양적이고 이기적인 황제식 권위주의 집단에게 착취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끝은 중국인들만이 번식하며 바글거리고 문명은 근본적 문제로 어디선가 막혀 발전하지도 못하는 영원히 흙구덩이에 매몰된 개미굴의 개미들로 존재할 것이다.

때문에 중국적 권위주의이자 중국문명의 근본 사상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상이 필연적으로 배제하고 삭제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진실주의가 언제나 옳은가? 진실은 언제나 옳지만, 잘못된 진실추구는 옳지 못하다.

서구 문화는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표현하지만 동시에 진리의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성경을 그리스의 정신을 이은 신생문명인 유럽이 좀 더 중국적이고 거짓말로 속이고자 하는 구세계(유럽의 동쪽)에 대항해서 일종의 지침서이자 지향점으로 성경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서양은 성경을 지향점이자 올바른 기준이라는 의미이지만, 동양은 그것을 그가 권위를 내세워서 주장하는 가짜이건 진짜이건 상관없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서양 입장에선 최대한 올바르지만 인간이 썼으므로 한계가 있는 것에 불과한 "진리"이지만, 동양 입장에선 서양이 주장하는 "권위"라고 인식한다. 이 둘은 명백한 차이가 있으나 대다수 동양은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만큼 진리란 개념은 비동양문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인 조상들의 이익을 위한 조작과 거짓이 옳다는 것이 기반이기에 "진리"개념 설명을 듣더라도 그 이해에 근본적 한계가 존재한다.

다시 진실이 언제나 옳은가? 그렇다. 그런데 동양이 착각하는 진실주의는 틀리다.

예를 들어보자. 유대민족의 초창기 그들 주변의 국가들은 비록 약간의 조작이 포함되었지만 유대의 <성서>보다도 오래되고 합리적인 나름의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럼 여기서 "진실"은 유대 이외의 고대중동국가들의 기록인가? 아니다. 그것은 "권위"이고 "오래되고 합리적인"이란 수식어는 권위의 포장이다. 동양 대다수는 구분을 못한다.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서 유대민족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비웃는 "믿음"으로 그들이 억압되면서도 그들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한계점을 가진 진실인 <성서>를 지켜냈다. 오늘날은 이제 권위는 <성서>가 가지고 진실을 원하는 학자들은 고대근동유물을 참고해 성서를 해석한다 (당연하지만 진리의 추구는 거짓을 경멸하지 권위 자체를 경멸하지는 않는다). 성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말이다. 하느님이 진리와 동일시되는 것은 이런 이유이며, 서양에서 인간 왕 위에 군림한 것은 동양처럼 미개한 조상신이 아닌 진리 자체였다(조상신임을 숨기지만 실은 중국인 씨족들의 조상신이다. 각 후손을 추적하면 현대 중국인 성씨들이 나타난다).


[#짧은 생각]

요즘, 내 마음속 딜레마:

내가 공부한 글들을 공개하면 나에게 불리한게 아닐까?

하고 고민중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공개를 안하면 만든 글들을 보관하고 필요할때마다 꺼내야하는데, 실제론 자료를 보관하면 잘 안보게되더라고요. 오히려 공개해두면 자주 와서 확인하게되고, 자주 보면서 나도 외워져서 일단 공개하며 글쓰는게 더 괜찮은 듯? 합니다.


[#짧은 생각] 국제사회에 충격을 준 터커 칼슨과 푸틴의 인터뷰

미국의 저널리스트 터커 칼슨은 최근 2시간 6분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인터뷰를 하였고 이것은 미국 저널리스트 사회와 국제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 충돌을 러시아가 "특별 군사 작전"으로 지정한 이유에 초점을 맞춘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인터뷰는 푸틴이 메모 없이 장시간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것은 서구사회에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푸틴에게 보내는 지지와 신뢰는 민중들이 속았기 때문이 아니며, 그가 우크라이나와 더 넓은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과 역사적 관점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에 기인한다고 설명되었습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국가로서 창작된 것임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개요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러시아와 별개의 우크라이나 국가 개념은 신화라고 주장하며, 역사적으로 20세기 이전에 우크라이나가 별도의 실체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으로 묘사되었고,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인공적 창조는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와 독일을 포함한 외부 세력에 의해 러시아에 대항하는 도구로서 인공적으로 구축되었다고 제안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충돌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의 연속으로, 이러한 이념에 맞서기 위하기 때문에 "특별 군사 작전"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푸틴은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편지를 포함한 역사 문서를 참조하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깊은 연결과 충성도를 보여줍니다.

우크라이나인 흐멜니츠키의 보호 요청을 받은 러시아는 13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1654년 1월 18일의 페레야슬라프 라다는 폴란드, 스웨덴, 독일에 가장 큰 지정학적 패배로 각인돼 있습니다. 폴란드의 두다가 2023년 2월 라트비아에서 논의할때 전쟁에서 이기면 페레야슬라프에서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자고 주장한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그는 나토의 확장을 우크라이나 현재 갈등의 근본 원인으로 반복해서 언급하며, 나토에 가입 문제에 대해 빌 클린턴과의 대화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았다고 언급했습니다. 또 푸틴은 2014년 우크라이나 쿠데타를 중대한 정치적 실수로 비판하고 크림이 러시아에 병합되기까지의 사건 순서를 논의했습니다.

터커 칼슨의 인터뷰에 대해 그를 배신자로 지칭하는 의견과 진정한 저널리스트로 지칭하는 의견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1] https://youtu.be/lrQhMz5cyhk?si=rBYzw8vNfqvnUWiv

[2] https://youtu.be/TDEHtOyRaeE?si=jFGHy8xeej0CU3hC

[3] https://youtu.be/PsAS66QWtyk?si=bDzqhQmAvM3azEOQ


[#짧은 생각] 자유와 다원주의의 상관성에 대한 짧은 생각.

자유는 책임감에 의거한 자유일때 비로소 지속가능하며 자유의 범주또한 확장가능하다. 그리고 자유는 다양성을 낳는데, 이는 일견 타당하다. 왜냐면 다른 것을 시도할 '자유'가 있기에 시도한 사례가 유지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다양성도 자유를 낳는다.

모든 성질은 관성을 가지고, 다양성의 반대인 통합성도 관성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래서 통합성은 자신의 성질을 유지하는데, 여기에 많은 인간의 원리들이 더해져서 권위가 탄생한다. 문제는 자유란 성질간의 여유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자유 개념에는 원한다면 기존과 다른 어떤 것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성질이 존재해야 각 성질 사이의 공간이 나타나고 자유가 가능하지만, 통합성의 권위는 그것을 막는다.

아래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분쟁에 대해서 이야기를 작성했는데, 일단 난 그 인터뷰 내용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쓰고, 들은 바 있는 평가되고 있는 정보를 적었다.

사실의 서술은 특정 집단의 지지가 아니지만, 고의적으로 부분적 사실만을 서술하여 지지하는 기법이 있다는 점에 근거한 우려를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말해서, 난 다원주의에 대해 호의적이고, 국가권력의 권위는 분열된 형태가 가장 자유를 위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전세계가 하나의 국가였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무 글도 쓰지않고 자유를 죽인채 살아갈 것이다.

민족주의적 관점도 이해하지만, 동시에 다른 관점도 가치의 기준이 있고, 그런 관점에서는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다.


[#짧은 생각] Never argue with stupid people

바보와 논쟁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바보와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보와 나 사이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상대가 바보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소통하려 시도하는 것은 그 자신도 바보임을 의미합니다.

인용:

Never argue with stupid people, they will drag you down to their level and then beat you with experience.

- Mark Twain

그러므로 바보와 논쟁을 벌이지 않도록 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에 대한 존중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URL: https://pbs.twimg.com/media/Bto-LeeIMAAS4J1.jpg



: 위 내용은 제가 작성한 제 스레드(Thread) 게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작권 조항을 철저히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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