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史] Reminder) 최씨의 낙랑국 설화는 사실인가? & 최씨가 6성의 소벌도리의 후손이란 주장은 사실인가?

신라 6성 문제에 대하여,
(This is a reminder of concept what I thought about History of Silla)


최씨의 낙랑국 설화는 사실인가?
최씨가 6성의 소벌도리의 후손이란 주장은 사실인가?

최씨는 중국에서 강성최씨로 분류된다. 낙랑군에서 왔다면, 한 제국 시대에 중국에서 평양지역을 통해 이주한 것이 된다. 그런데 과연 낙랑국인가? 낙랑군인가? (중요한 문제)

위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 만약 낙랑국이라고 해석된다면?

그렇다면 낙랑국은 '낙랑군 지역(현대, 북조선의 평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에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한 기록이 고구려측 기록(삼국사기 고구려본기)과 중국측 기록(후한서) 모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비슷한 기록을 찾자면, 삼국유사 - 삼국사기 참고시, 고구려가 낙랑국 사건의 시대와 비슷한 시대, 고구려왕대 기준 같은 왕대에 고구려가 예족의 소국을 공격한 기록은 존재한다.

신라의 6성의 문제점을 고려하면, 다른 나라의 성씨제도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멸망기에 조작성이 가미되었으나, 다른 고구려-백제-가야도 조작성이 가미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라는 그 멸망이 천천히 진행되고 후대의 국가가 낙랑인의 '고려'이므로 국가단위로 중국인의 집단이지만, 신라는 중국인의 집단이 아니고, 중국인 정도로 역사공작기술이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러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름 숨기기 등의 방식은 모두 중국인들의 조작성에 당하지 않기위한 방어적 사고기술들이 발전되어있지 공격적 방법론은 잘 사용치 못했다. 애당초 중국인들의 번식을 위한 이주와 조작에 공격당하고 그에 대한 방어에 집중하던 신라의 입장에선, 오히려 중국처럼 타국을 흡수하려는 목적의 역사조작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면 알 수 있는 점이 가야의 신씨나 허씨가 강성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럼 정말 건국시에 있었는가? 아니면 기원전 56년 이전부터 존재했는가? 
그에 대한 답으론, 기원전 56년 이전이라면 그런 주장에 대해선 부정의 입장이 강하지만, 건국시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입장이다. 한편 건국시에 없었으나 '가야 건국기' 이후와 '수당 제국 시대' 이전 시대에 이주하였을 것이라는 입장도 고민하고 있다. 적어도 '수당 제국' 시대에 이주해 온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562년에 가야가 멸망했고, 조작을 하려면 적어도 562년 전일 가능성이 높고, 후라면 멸망후 가까운 시간대에 조작이 발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가야멸망기에 가까운 년도가 아니라 좀더 많이 과거의 시간대에 이들이 이주하였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강성은 동쪽 바다에서 산동반도에 왔고, 그 자료를 조선반도의 민족들도 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가정을 바탕에 두고 사고해보면, 계통이 일치하는 것은 적어도 500년대 이전의, 중국화(900년대) 이전의, 조선반도 민족들이 중국인 이주자들을 선별하여 수용하였음을 의미한다. 


- 문제점에 기반하여, 그 문제의 발생원인에 대한 추측, 일종의 사고실험 가설설정

전의 글에서도 작성했듯이, 최씨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의 그 조상의 기술이 다르다. 그것은 먼저 쓰여진 '삼국사기'의 시대에는 최씨 세력이 더 강대했기에 '소벌도리'를 조상으로 조작된 것이고, 
(위 중 어떤 경우라도 일단 최씨-소벌씨 연결성은 조작이 맞다. 왜냐하면, 최씨는 낙랑국 전설시기에 이주했는데, 소벌씨 존재는 그 이전부터 기록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 작성된 시기에는 최씨의 세력이 약화된 것이다.
애당초, 가장 먼저온 이주자가 최씨인데, 통일신라후기에는 확실히 이들이 스스로를 '낙랑인'으로 개념화하여 중국인과 동족으로 자기인지 하였으므로 최씨는 신라귀족 사회의 내부에서 이민하는 중국인들에게 협조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배신을 통해 최씨-소벌씨 연결성을 삼국사기의 시기에는 조작할 수 있었지만, 배신자라는 한계로 인해 더 정통의 당나라계 중국인이라고 볼 수 있는 씨족에게 소벌씨를 조상으로 삼는 연결성이 옮겨간 것이다.
그리고 이를통해 신라멸망기 중국인 이민자들이 '신라의 전통성'을 마치 물건처럼 사고팔듯 권력관계에 따라 배분하고 역사서를 조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의 태국에서는 중국인들이 기존 태국인의 성씨를 "구매"하고 있다. 10세기경부터 21세기까지 줄곧 이어지는 중국인들의 역사 조작적 성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내가 계속하여 완전히 신뢰불가능한 이유이다. 강태공에서 시작된 제나라는 스스로를 원주민과 동일민족시하여 중국의 범죄자들 후손들에게 그 전통성을 팔고, 최씨는 스스로를 당나라 시대에 중국인과 동일민족시하여 귀족제로 중국인들을 견제하던 불안정한 사회구조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고 신라를 무너트렸다. 
애당초 이기백의 신라6두품지식인론은, 신라 6성을 모두 6두품으로 날조하는 이론으로, 확실하게 6두품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최치원 뿐이다. 나머지 씨들은 최씨의 배신의 흔적을 통해 다시 착취할 길을 찾아낸 것이다.

전에 '제나라-주나라-진나라 사이에 전개된 역사적 구조'를  일본의 고대사에 대입하고 "그러므로 고대사는 그 역사적 구조를 모방한 가짜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보았다. 
그러나, 역사적 구조는 어떤 집단이 역사를 통해 학습하여 무의식에 학습되고, 그런 학습된 무의식이 일치하는 다수의 집단이 국가를 이루고 있다면, 그 국가는 무의식적 구조를 계속하여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처럼, 비슷한 구조가 반복되지만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고, 미세한 진보가 반복되는 구조일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즉 말하고자하는 바는, 시간선1과 시간선2의 사건의 역사적 전개가 일치한다면 그것은 (1)'역사적 전개를 모방한 가짜' 혹은 (2)'고대와 같은 집단이므로 그들의 집단무의식에 있는 역사적 전개의 반복행위' 이런 2가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 을사의 변(乙巳の変)

일본에서 소가씨가 난으로 죽임 당하고 권력을 잃을때, 천황이 "한인이 소가씨를 죽였다"라고 한 것은 이중적인 2가지 의미를 가진다. 죽인이가 "삼한인"의 범주에 속하거나, "삼한인"이 원인이 되어 소가씨가 죽었거나.

이 중 후자의 해석은, 즉 "삼한인"들의 역사조작으로 인해 소가씨가 (그시대 일본측 인지에서) 최씨인 중국인이 되면서, 일본 사회의 거부를 받아 처형당하는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한편, 현대 한국에서 소씨가 소벌씨를 주장하는 상황을 보면, 여러 추측과 과장을 가미하면, 통일신라기에 소씨도 소벌씨를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소씨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을 통해 알 수 있듯 당나라 시대의 이민자로 거짓말이다. (한편, 더 복잡한 상황이 있는데, 소씨의 중국측 역사를 추적하면 조상을 조사할수록 그 복잡성이 증대한다. 왜냐하면 소씨의 계통이 정통 한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나라 시대에 처음 온 것이 맞고, 조작인 것도 맞다. 그런데 그 이전시대의 혈연적 연결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라인들 입장에선 중국인으로만 인지되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냥 중국인으로 취급되었던 듯 하다.)

참고로, 소가씨가 멸문될때, 가지고 있던 역사책들을 불태워서 고대 일본의 역사자료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반도 측의 시스템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경문왕 시대에 갑작스럽게 "사위에게 양도하는 선양" 형태의 정치가 부활한다. 신라도 비슷하게 특정 '집안'들이 그들에 관련된 역사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쉽게 공유하지 않는 체계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갑작스럽게 "사위에게 양도하는 선양" 형태의 정치가 부활한 것은 통일신라 김씨왕조가 그 시대가 되어서야 새롭게 과거사를 알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미세수정 2024.03.23.토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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