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歴史學] 新羅 佛教에 대해 간단한 연구 - 인물사 중심


[#역사학] 원효(617-686) 짧은 소개

원효(617-686)는 617년(신라진평왕39년)에 태어난 인물로 신라불교의 대승이다.

- 삼국유사 관련 원효 전기

그가 유학한 始末과 포교의 큰업적은 당唐의 전기와 행장에 자세히 실려있고 다만 향전(신라 기록)에 실린 두 가지의 이상한 일을 기록한다
원효가 계를 잃어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꿔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추며 노는 큰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만들어 이름을 「화엄경」의 구절을 따서 무애라고 이름 짓고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되고 누구나 "나무"라는 염불을 할줄알게 되었으니 원효의 덕이다(일연)
또한 해룡의 유도로 인하여 조서를 길에서 받고 삼매경소를 지었는데 그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이라고 하였다 .


[#역사학] 송고승전 관련 원효 전기

- 송고승전 관련 원효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려하였는데 그것은 현장 삼장의 문하를 사모해서였다.
인연이 이미 어그러지자 마음을 쉬고 노닐었다. 얼마지나지않아 미친듯하고 어지러진 말을 하고 거칠고 빗나간 행동을 하였다. 거사와 한가지로 술집과 기생집을 방문하는 것이 보지(양나라 때 중국승려)가 칼과 쇠지팡이를 차고 다니는것과 같았다.
본주(本州, 고향)에서는 명망이 있다고 원효를 추천하였으나 여러 승려들이 그 사람됨을 미워하여 왕에게 받아들이지 말 도록 참소했다.

얼마 되지 않아 왕비의 머리에 종기가 났는데, 의사가 노력해도 효험이 없었다. 왕과 왕자와 신하들이 산천의 영험 있는 사당에 기도하여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당이 아뢰기를, "다른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구한다면, 이 병은 치료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사자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의술을 구하게 하였다.

큰 바다 가운데서 홀연히 한 노인이 파도로부터 배에 뛰어 올라와서는 사자를 맞이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보니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용왕을 알현하였는데 왕의 이름은 검해(鈐海)였다. 그가 사자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 왕비는 청제(青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금강삼매경』이 있으니, 이각이 원통하고 보살행을 보여준다. 이제 왕비의 병을 증상연으로 삼아 이 경전을 부촉하니 너희 나라로 가서 유포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에 30장 가량의 중복되고 흐트러진 경전을 사자에게 주었 다. 그러면서 다시 말하기를,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 나쁜 일이 있을까 두렵다."고 걱정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칼로 사자의 장딴지를 째고 그 속에 경을 넣은 다음 밀랍 종이로 싸서 약을 발랐더니 장딴지가 본래대로 되었다. 용왕이 말하기를, "대안 성자에게 순서를 매겨 꿰매게 하고 원효 법사를 청하여 소를 지어 강석하게 한다면 부인의 병은 틀림없이 나을 것이니 설산의 아가타약이라 할지라도 약효가 이보다 더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용왕이 바다 위까지 배웅하여 마침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그때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여 먼저 대안 성자를 불러 편집하게 하였다.


[#역사학] 삼국유사 원광 전기

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왕경 사람이다(삼국유사 설씨, 송고승전 박씨)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도를 닦으려고 생각하여 삼기산에 홀로 살았다.

그런데, 이튿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와서 말한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한다 "내 나이가 거의 삼천 세가 되고 신술(神術)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이야 조그만 일인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소 나는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하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 몸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니,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으며, 미래에도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해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여 이 나라의 모든 혼미(昏迷)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습니까?"

진평왕 22년 경신(庚申: 600, 「삼국사」에는 다음해인 신유년에 왔다고 했다)에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서 본국에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갔다. "신의 진짜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시오" 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산은 비장산(臂長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그 고개에 사신(捨身)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가 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주시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 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다가 죽었다.


[#역사학] 원효의 십문화쟁론 内「牛角同兔角論」

“問:雖設徵言, 離諸妨難, 言下之旨, 彌不可見. 如言其有不於空, 此所引喻本所未解. 何者? 若實是有, 則於無喻如牛角同兔角. 若不空, 定非是有, 喻如兔角無於空. 今說是有而不空, 世間無, 如何得成? 設有同喻空, 由前比量, 成不定過.”

“答:汝雖巧便, 設諸妨難直難, 言說反意旨, 所引譬喻, 皆不得成. 何以故? 牛角非有, 兎角不無, 故如汝所取. 但是名言故, 我寄言說, 以示絶 言之法. 如寄手指, 以示指之月. 汝今直爾如言取義, 引可言喻難. 言法但看指端, 責其非月, 故責難彌精, 失彌遠矣.”

出典:元曉, 『十門和諍論』 (韓國佛敎全書第1冊, p.838)

이상의 논쟁에서 사용되는 無喻如「牛角同兔角」論은 新羅佛典에서 사용되는 특이한 例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선 牛角과 兔角의 同致 주장이 있었고, 그것이 보통 신라사회에서 허무맹랑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위 내용은 2024-03-22 ~ 2024-03-27 기간동안 작성한 제 스레드(Thread) 게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작권 조항을 철저히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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