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 삼성퇴(三星堆) 문화의 구성과 성격 - 고고학 및 문헌자료에 기반한 역사적 흐름의 해석을 목표로 -

 아래 글은 중국고대사(HIS3006) 수업으로 2024.06.06.(목) 자정에 기말레포트로 제출한 자료입니다. 오직 아래에 제시된 저작권에 따라서만 이용 가능합니다. 한국어로 작성되었으며, 고의적으로 친-韓사회적이게 좋은 말만 넣어서 작성되었으므로 유의바랍니다.


쓰촨 삼성퇴(三星堆) 문화의 구성과 성격

- 고고학 및 문헌자료에 기반한 역사적 흐름의 해석을 목표로 -

I.               머리말

II.             삼성퇴 문화의 지리적 및 역사적 배경

II.       유물의 분석
- 초기 발견과 연대 추정
- 중요 유물과 그 분석
- 삼성퇴와 이리두 문화의 상호작용

IV.      삼성퇴 문화와 그 영향

V.       맺음말


I. 머리말 

삼성퇴(三星堆) 문화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 연구는 이 문화의 독특성과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다. 이 연구는 삼성퇴 문화의 사회적, 종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이 문화가 주변 문화와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도 조명하고자 한다.

삼성퇴 문화의 위치는 성도(成都) 동쪽 약 30km 지점이며, 완전한 형태의 성곽 구역이 발견된다. 동쪽, 서쪽은 각각 1600m, 남쪽은 약 2000m로 상나라의 정주(鄭州) 상성(商城) 내성 영역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유적은 동서로 성 전체를 가로지르는 강줄기와 남북으로 성 전체를 관통하는 환호(墙濠)가 삼성퇴 성지를 네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해당 구역 중 서북구는 폐쇄적인 서북소성이 있으며, 북쪽에는 ‘청관산(靑關山)’이라 불리는 높이 3m의 인공 토대(土臺)와 그 위에 토목으로 구축된 대형 궁전건축이 있다고 한다. 이 서북 소성은 삼성퇴성에서 가장 중요한 ‘궁성(宮城)’이었던 곳으로 판단된다. 또 서남 소성은 발견된 종교⋅제사적 색채의 기물들로 볼 때, 제사활동이 관련된 종교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 여기 서남 소성에 발굴된 2개의 제사갱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삼성퇴 문화인들의 사상 형태를 알 수 있고, 문헌자료들을 참고하면 그 문화적 흐름의 진행을 알 수 있다.


II. 삼성퇴 문화의 지리적 및 역사적 배경

삼성퇴 문화는 주로 쓰촨 분지(四川盆地)에 위치하며, 상나라와의 문화적 교류는 이 지역의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중국 청동기 시대에서 중요한 문화적 교차점이었다.

삼성퇴 유적의 시대적 범위는 대체로 기원전 1600~1200년 사이로, 이 문화는 쓰촨성(四川省) 광한시(廣漢市) 남흥진(南興鎭)에 위치한 삼성퇴유적이 가장 전형적인 유적이고, 유적의 범위가 매우 넓다. 유적은 중국 서남지역 사천성 광한구에서 서북쪽으로 약 7km 떨어진 압자하 (鴨子河) 근처에 위치하고, 행정구역상 남흥진과 삼성진(三星鎭)에 걸쳐있으며, 남쪽으로는 사천성 성회(省會)인 성도(成都)와 30~40km 떨어져 있다.

삼성퇴 유적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신석기시대 말기의 용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의 상주(商周) 시기 사이(대략 기원전 2500년에서 1000년)에 걸쳐 약 15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추정된다. 삼성퇴 유적의 고고학적 흐름은 제1기는 보돈촌(寶墩村)문화(BC2500~BC1600), 제2기는 삼 성퇴문화(BC1600~BC1200), 제3기는 십이교(十二橋)문화(BC1200~BC1000)에 해당한다. 이중 마지막 제3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시기는 삼성퇴유적에서 그 문화의 모든 발전과정이 확인된다.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시기, 삼성퇴 고성에 중대한 정치적 사건과 사회적 변화가 발생하였고, 성 내부의 주요 주민은 다른 지방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성도(成都)시 서쪽 금사촌(金沙村)에 이동하여 고성을 새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성퇴 문화는 장강(長江) 상류에 위치한 쓰촨 지방에서 발견된 문화이다. 과거의 연구는 장강 지역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서 형성된 역사상이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중국의 역사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뛰어난 역사가인 것은 불후의 사실이지만, 그의 사관 속에는 시대적 한계가 강하게 깔려있다고 지적된다. 바로 장강 지역을 기술 하면서 해당 지역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낮은 평가나 정보의 양이 타지역에 비해 매우 적었다는 것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2) 

그 몇 없는 정보 중에서도 쓰촨 지방의 고대 정권, 촉(蜀)은 상(商)에게 중요하게 간주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촉은 상나라의 복사(卜辭)에서 타 세력에 비해, 비교적 자주 언급되고 있는 점은 그 관계가 밀접하였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또, 상(商)의 은(殷) 천도 초기에 양국의 교류가 빈번하였음에 지적되고 있으며, 상서(商書)의 기록3)에서는 庸, 羌과 같은 주요 세력들과 함께 2번째 순서로 서술되고 있다. 이와같은 자료들을 통해 주변의 근린국으로서 빈번하게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4) 


III. 유물의 분석

청동기 시대의 유물은 상세하게 분석되어, 청동 그릇, 무기, 상아 제품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 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청동상은 그 당시의 예술적 세밀함과 종교적 의미를 반영한다.

- 초기 발견과 연대 추정

三星堆 유적은 1929년에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1934년, 화서대학(華西大學) 박물관이 삼성퇴유적의 북쪽에 있는 月亮湾을 조사하고 발굴하였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쓰촨성 고고학자들에 의해 중요한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다. 1986년 청두(成都) 평원에서 발견된 제물 구덩이는 삼성퇴 문화의 종교적 의례와 사회 구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발견은 고대 쓰촨 문화(蜀 문화권)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986년 성도(成都) 평원의 三星堆 지역에서 두 곳의 제물 구덩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대량의 금, 구리, 옥, 석, 뼈, 상아牙, 도질의 기물들이 출토되어 학술계의 광범위한 주의를 끌게 되었다. 층위적 근거는 구덩이의 조성 시기를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유적과 비슷한, 상 후기(1300 BC ~ 1046 BC) 정도에 조성된 것으로 제시한다. 삼성퇴 문화 자체는 대략 기원전 1600~1200년 사이에 유지된 청동기문화이다. 제사갱 그 자체가 만들어진 시기는 삼성퇴 3기에 해당하지만, 전체적인 문화 양식은 삼성퇴 1기와 2기를 계승하고 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연결성의 단절을 주장하고 있지만, 홍수가 빈발하는 지형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간격증의 존재만으로 문화 계승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더욱이 토기를 비롯한 생활용기는 이들 사이의 계승을 명백히 증명한다. 또 삼성퇴 1기와 2기는 성도 지역의 신석기 문화유형과 일치하고 있다.5) 

- 중요 유물과 그 분석

삼성퇴 문화의 제물구덩이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대 쓰촨 문화의 독특한 면모를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서 발굴된 완전한 실물 크기의 인간 청동상과 수백 점의 상아 제품은 이 지역의 고대 종교 의식과 사회 구조에 대해 많은 것을 암시한다. 특히 유물이 태워서 매장된 방식은 제사 의식의 일환으로 해석되며, 이는 고대 사회의 신앙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고 해석된다. 이제 중요 유물을 통해 보이는 삼성퇴 문화의 종교·문화를 살펴보겠다. 삼성퇴 문화에서의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계층은 유물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청동 신수 같 은 유물은 이 지역의 토착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호 구덩이에서 발굴된 인간 조각상은 높이 172cm로, 중국 남성의 평균 키와 유사하다. 이 조각상은 방형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청동으로 전체가 주조되었다. 인물상의 전체적인 장식은 인간의 실제 예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상아로 추정되는 물체를 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조각상은 삼성퇴 문화에서 중요한 인물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토착 종교의 신앙체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더불어 발견된 여러 청동 두상은 본래 완전한 입상의 일부로 여겨지며, 이들 대부분의 몸통은 목재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상의 눈이 과장되게 표현된 것은 이 지역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눈의 과장은 지도자의 비범한 시각 능력을 과장된 표현기법을 통해 알리기 위한 반영이라는 의견또한 존재한다.6) 이에 따르면, 눈의 과장은 눈을 크게 표현하기, 안구를 돌출시켜 표현하기, 눈의 개수를 과장하는 방법들로 대표된다.

그 중 눈의 개수를 증가하는 방식은, 한자를 창조한 창힐(倉頡)과 고대 동아시아의 신 방상씨(方相氏)가 그 예로 제시된다. 이 중 방상씨는 황금의 눈을 소유한다고 표현7)되어, 금칠된 청동두상과 연결되어 해석가능하다.

안구를 돌출시켜 표현하는 방식은 『화양국지(華陽國志)』에서 “잠총(蠶叢)이라 부르는 촉후가 있는데, 그의 눈은 돌출되었으며, 그가 나라를 세운 때부터 촉왕이라 칭하였다”라는 기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이 지역 고유의 신화적, 종교적 신념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8) 여기서의 잠총은 西漢 시기 揚雄의 『蜀王本紀』에 기록된 촉나라의 시조이다.9)

그외에도, 사천성 서북 지역 백마장족(白馬藏族) 지역에서 유행하는 조개(曹蓋) 가면 등도 고 대 신화와 원시 무속 종교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0)

“삼성퇴,” <Wikipedia>, 2024년 5월 17일 10:20 UTC,(2024년 6월 6일 13:04 UTC).
(岳南, 2006) p.374
(岳南, 2006) p.376

또한 2호 구덩이에서 발견된 높이 396cm의 청동 신수(神樹)는 나무 모양으로 제작되었다. 이 유물은 쓰촨 지역의 漢代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제 화폐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청동기 시대부터 지속된 살던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신앙을 짐작하게 한다.

삼성퇴 기물갱에서 출토된 대형 청동 뽕나무와 청동 버드나무가 각 1점씩 출토되었는데, 총 10개 가지에는 한 마리의 태양조(太陽鳥)가 앉아 있다. 이를 통해, 삼성퇴 왕국인들은 이미 복잡한 세계관(世界觀)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산해경』의 하늘에는 10개의 태양이 있는데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뜬다는 우주관과 신화의 조기 실물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동해 끝에는 ‘부상(扶桑)’이라 불리는 뽕나무가 있고11), 서해 끝에는 ‘약목(若木)’이라 불리는 버드나무가 있다.12) 즉, 태양신을 최고신으로 여기는 원시종교가 있었고, 태양과 연 관된 새와 눈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새의 형상을 한 인수조신(人首鳥身)의 기물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孙华, 2021) p.253


- 삼성퇴와 상나라의 상호작용

상나라와의 문화적 교류는 삼성퇴 문화의 유물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상나라 양식을 모방한 청동 그릇과 같은 유물에서 드러난다. 삼성퇴에서 발굴된 청동 그릇 무더기는 상나라 양식을 본뜬 것으로, 이러한 교류는 삼성퇴가 단순한 지역 문화의 한계를 넘어서 중국 고대 문화의 중요한 교차점이었음을 시사한다. 삼성퇴 문화처럼, 상나라의 문화권역 外의 지역에도 청동기 문화는 존재했다. 하지만, 해당 문화들은 완전하게 이리두(二裡頭) 문화의 권역에서 분리된 형태로 존재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지적된다.

예를들어, 1989년 발견된 강소성(江蘇省) 대양주(大洋洲) 유적은 북쪽의 이리두(二裡頭) 모델 차용을 차용하여 청동기가 생산된 흔적이 보인다. 이는 1970년대부터 알려진 해당 지역의 오 성(吳城) 문화에 속하며, 이리강 문화의 영향으로 발달한 지역 청동기 문화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13) 


IV. 삼성퇴 문화와 그 영향

삼성퇴 문화는 주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물은 삼성퇴 문화가 지역적으로 어떻게 교류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삼성퇴 문화는 청동무기의 형태 등 여러 측면에서 파촉(巴蜀) 문화로 계승되었다. 2001년 발견된 成都 金沙유지는 그 시대가 상대 말기에서 춘추시대까지 걸쳐 있다. 발굴보고에 따르면 이곳에서 확인된 청동기와 金器, 玉器, 石器 등은 모두 삼성퇴 제사갱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명백히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金沙유지가 충분히 삼성퇴 청동문명과 춘추전국시대의 巴蜀 문화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여진다.14) 또 청동기시대에 장강 상류의 삼성퇴 문화는 그 유물 중 청동 예기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도 일치하는 유물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장강 중류 지역의 청동기유물을 통해 상호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상나라 시대에는 장강(長江) 이남에서 점복용(占卜用) 귀갑(龜甲)이 공급되기도 하였다는 주장15)이 있어, 고대 중국 문화간의 활발한 상호교류를 추측할 수 있다.

춘추시대에는 長江 지역은 본래 장강 상류, 중류, 하류에 모두 독자적 나라들이 존재하였으나, 초(楚)와 파촉(巴蜀)의 접촉, 초와 오월(吳越)간 전쟁, 그리고 화북지역과의 활발한 교류 등의 역사적 전개를 겪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초가 크게 강성하여 한때 파촉 지역을 점령하기도 하고, 또 수도의 동천 이후에는 오월과의 여러 차례 전쟁에 의해 장강문명 전체를 모두 포괄하는 영역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 소수민족에게까지 그 문화적 영향력을 남겨두었다고 볼 수도 있다. 현재 中國 雲南省에 거주하고 있는 納西族은 고유한 그들의 문화를 고대로부터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고, 이에 주목하여 納西族의 고유한 祭天儀式을 三星堆 유적에서 행해졌던 제의행위와 비슷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연구자도 있다.16) 수천년이 흘렀기 때문에, 그 신뢰성은 낮고 의혹이 많지만, 그만큼 삼성퇴(三星堆) 문화의 영향이 중국 서남 지역에 남아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IV. 맺음말 

삼성퇴(三星堆; sanxingdui) 문화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 문화의 연구는 중국 고대사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습니다. 해당 문화는 앞서 서술한 글들에서 알 수 있듯, 다양한 서책에 기록이 남았으며, 그 전통과 신화도 이어져 남겨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해당 지역의 더 많은 유적과 유물을 발굴되어 삼성퇴 문화의 더욱 세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주

[1] 쑨화(孙华). (2021). 광한(廣漢) 삼성퇴(三星堆)유적 개론. 동양미술사학, 12, 243-249.

[2] 김병준. (2005). 중국고대 "장강문명"의 재검토. 중국학보, 51(0), 179-182.

[3] 『尚書』 「牧誓」, "我友邦冢君,御事、司徒、司馬、司空、亞、旅、師氏、千夫長、百夫長及庸、蜀、羌、髳、微、盧、彭、濮人。稱爾戈,比爾干,立爾矛,予其誓。"

[4] 박석홍. (2007). 어문학부(語文學部) 상대문자(商代文字)를 통한 삼성퇴(三星堆) "종목청동인면 pp.51-54.

[5] 김병준. (2005). 중국고대 "장강문명"의 재검토. 중국학보, 51(0), p.186쪽.

[6] 박석홍, 「古蜀文化(고촉문화) 靑銅縱目人面像(청동종목인면상)의 눈과 시선의 含義(함의) 小考(소 고)」, 『중국문학연구』, (한국중문학회, 2012), pp.265~266.

[7] 『周禮』「夏官」”方相氏掌蒙熊皮, 黃金四目, 玄衣朱裳, 執戈揚盾, 帥百隸而時難, 以索室驅疫。“

[8] 『華陽國志』「蜀志」 周失紀綱,蜀先稱王。有蜀侯蠶叢,其目縱,始稱王。

[9] 『蜀王本紀』, “蜀之先, 名蠶叢, 後代名曰柏蔆. 後者名曰魚鳧, 此三代各數百歲, 皆神化而不死, 其 民 亦頗隨王化去。”

[10] 黃劍華 지음, 이해원 옮김, 『삼성퇴의 황금가면: 고고학과 함께 중국 고대 촉국 역사를 읽는다』, (서울: 일빛, 2002), pp.31-50.

[11] 『山海経』「海外經」, 下有湯谷 湯谷上有扶桑 十日所浴 在黑齒北 居水中 有大木 九日居下枝 一日 居上枝。

[12] 『山海経』「海內經」, 南海之内,黑水青水之閒,有水名曰若木,若水出焉。

[13] Robert Thorp, China in th Early Bronze Age, Shang Civilization(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ilvania Press, 2006), pp.106~116.

[14] 김병준. (2005). 중국고대 "장강문명"의 재검토. 중국학보, 51(0), 186-187.

[15] 이성규, 「中國 古代 抑商政策의 社會史的 背景:賈와 祭儀의 關係를 중심으로」, 『古代 中國의 理 解」 3, 1997.

[16] 안신원. (2002). 사천 삼성퇴(三星堆) 제사갱유적(祭祀坑遺蹟)의 성격에 대하여. 샤머니즘연구, 4(0), 444-449.


≪参考 文献≫

••••••••••••••••• 【史料】 •••••••••••••••••

『周禮』

『山海経』

『蜀王本紀』

『華陽國志』


•••••••••••••••• 【단행본 및 논문】 ••••••••••••••••

黃劍華 지음, 이해원 옮김, 『삼성퇴의 황금가면: 고고학과 함께 중국 고대 촉국 역사를 읽는 다』, (서울: 일빛, 2002).

岳南 지음, 심규호; 유소영 옮김, 『삼성퇴의 청동문명』, (서울: 일빛, 2006).


김병준, 「중국고대 "장강문명"의 재검토」, 『중국학보』 51(0), (한국중국학회, 2005).

박석홍, 「어문학부(語文學部) : 상대문자(商代文字)를 통한 삼성퇴(三星堆) '종목청동인면상(縱目 靑銅人面像)' 고찰(考察)」, 『중국학보』, (한국중국학회, 2007).

박석홍, 「古蜀文化(고촉문화) 靑銅縱目人面像(청동종목인면상)의 눈과 시선의 含義(함의) 小考 (소고)」, 『중국문학연구』, (한국중문학회, 2012).

쑨화(孙华), 「광한(廣漢) 삼성퇴(三星堆)유적 개론」, 『동양미술사학』 12, (동양미술사학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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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 「中國 古代 抑商政策의 社會史的 背景:賈와 祭儀의 關係를 중심으로」, 『古代 中國의 理 解」 3, (1997).

“삼성퇴,” <Wikipedia>, 2024년 5월 17일 10:20 UTC,(2024년 6월 6일 13:04 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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