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 we related? Intriguing Korea vs Tamil Nadu similarities - comments #허황옥

 Are we related? Intriguing Korea vs Tamil Nadu similarities - comments


my reply: 

I'm sorry, but in fact, the situation of Tamil-related Koreans is the same as that of Tamils. Like the Tamils in the Indians, there are ancient Koreans in Korea.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actively provide help.

Ancient Koreans related to Tamil are a minority in Korea today. As can be seen from the distribution of surnames in Korea, 50-60% of surnames same those in China. This northern-Koreans(Calling Chinese Koreans is blasphemy in Korea), who are the mainstream of Koreans today, are dissatisfied with this possibility. If you look at Wikipedia in the past, there is a hypothesis that identifies Heo Hwang-ok's Heo as a minor surname in northwest China. This is because it is information written by northern-Koreans and wants to interpret Heo Hwang-ok as a northern Korean.

Youtube: Are we related? Intriguing Korea vs Tamil Nadu similarities ( https://youtu.be/lg3v4GwQGXE )


Original Text :

고고인류학자 김병모는 허황옥이 인도 아요디아를 떠나 중국의 사천성 지방에 정착한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하였다. (김병모, "한일 쌍어문 비교연구" 1995, 92~93면) 즉 가문이 아요디아 출신인 것은 맞으나 허황옥 본인은 중국에서 건너왔으리라는 것. 삼국유사 기록상 비단 옷감(錦繡綾羅)을 많이 가져왔다고 되어있는데 비단은 고대 기준 인도가 아닌 중국의 특산물이다. 특히 (사천) 지방은 한나라 때부터 비단이 특산물로 촉한의 주 수입원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Translation :

Archaeologist Kim Byeong-mo presumed that Heo Hwang-ok was a descendant of a family who left Ayodhya, India, and settled in the Sichuan province of China. (Kim Byung-mo, "Comparative Study of Korean-Japanese Slang-Oh-mun", 1995, pp. 92-93) In other words, the family is from Ayodhya, but Heo Hwang-ok herself must have come from China.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say that many silk fabrics were brought, but silk is a special product of China, not India by ancient standards. In particular, this is because silk has been the main source of income for Sichuan province since the Han Dynasty.

from: 허황옥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4-30. Retrieved 2022-04-30.


Original Text :

The legend of Heo is found in Garakgukgi (the Record of Garak Kingdom) which is currently lost, but referenced within the Samguk Yusa.[13]According to the legend, Heo was a princess of the "Ayuta Kingdom". The extant records do not identify Ayuta except as a distant country. Written sources and popular culture often associate Ayuta with India but there are no records of the legend in India itself.[8] Kim Byung-mo, an anthropologist from Hanyang University, identified Ayuta with Ayodhya in India based on phonetic similarity.[14]  Grafton K. Mintz and Ha Tae-hung implied that the Korean reference was actually to the Ayutthaya Kingdom of Thailand.[15] However, according to George Cœdès, the Thai city was not founded until the year 1350, after the composition of Samguk Yusa.[15][16]

According to another theory, the Ayuta Kingdom (Hangul: 아유타국, Hanja: 阿踰陁國) is a mistranslation of Ay Kingdom, a vassal to the Pandyan Empire of ancient Tamilakam (in South India[17]). At the time of her arrival, Princess Heo Hwang-ok carried with her the symbols of Pandya: the ‘’twin fish’’ and ‘’trident’’.[18][19]


[13]  Il-yeon (tr. by Ha Tae-Hung & Grafton K. Mintz) (1972). Samguk Yusa.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ISBN 89-7141-017-5.

[8] "Korean memorial to Indian princess". BBC News. 3 May 2001.

[14] Choong Soon Kim (2011). Voices of Foreign Brides: The Roots and Development of Multiculturalism in Korea. AltaMira. p. 34. ISBN 978-0-7591-2037-2.

[15] Robert E. Buswell (1991). Tracing Back the Radiance: Chinul's Korean Way of Zen. University of Hawaii Press. p. 74. ISBN 978-0-8248-1427-4.

[16] Skand R. Tayal (2015). India and the Republic of Korea: Engaged Democracies. Taylor & Francis. p. 23. ISBN 978-1-317-34156-7Historians, however, believe that the Princess of Ayodhya is only a myth.

[17] Hyŏphoe, Han'guk Kwan'gwang (1968). Beautiful Korea. Huimang Publishing Company. p. 619. Aboard the ship were Princess Ho Hwang-Ok of Ayut'a in the south of India.

[18] 이거룡. 2017, "가락국(駕洛國)과 고대 남인도(南印度)의 문화적 접촉에 관한 고찰: 물고기숭배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Cultural Contacts between Garak Kingdom and Ancient South India: With Special Reference to 'Fish Worship'], 인도연구, vol. 22, no. 1, pp. 85–121. doi:10.21758/jis.2017.22.1.85

[19] "Korea's intriguing Tamil connect"The New Indian Express. Retrieved 22 January 2022.

from: Hey Hwang-ok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4-30. Retrieved 2022-04-03 19:32.


+)

허황옥의 전설은 현재 유실된 가락국기의 내용을 참고한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4] 전설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 왕국"의 공주였다. 현존하는 기록은 먼 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유타를 식별하지 않는다. 문헌과 대중 문화는 종종 아유타를 인도와 연관지지만 인도 자체에는 전설에 대한 기록이 없다.[5] 한양대학교 인류학자 김병모 박사는 음성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아유타를 인도의 아요디아와 동일시했다.[6] 그래프턴 K. 민츠와 하태흥은 한국어 참조가 실제로 태국 아유타야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추론했다.[7] 그러나 조르주 코데스(조지 코데스)에 따르면 태국의 도시는 삼국유사(삼국유사)가 구성된 1350년까지 건설되지 않았다.[7][8]

아유타 왕국의 정체가 타밀라캄(오늘날의 남인도)에 있었던 판디아 봉신국 아이나두라는 주장도 있다.[9] 여왕이 배를 타고 한국에 갔을 때 그녀의 배에는 쌍물고기와 삼지창 등 판디아 왕조의 여러 상징들이 실려 있었다

이거룡. 2017, "가락국(駕洛國)과 고대 남인도(南印度)의 문화적 접촉에 관한 고찰: 물고기숭배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Cultural Contacts between Garak Kingdom and Ancient South India: With Special Reference to 'Fish Worship'], 인도연구, vol. 22, no. 1, pp. 85–121. doi10.21758/jis.2017.22.1.85

“Korea’s intriguing Tamil connect”. 《The New Indian Express》. 2022년 1월 22일에 확인함


 from: 허황옥(KR)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07. Retrieved 2021-12-16


許 黄玉(きょ こうぎょく、허황옥、ホ・ファンオク、32年 - 189年)は、金官伽倻の始祖首露王の妃[1]。金官伽倻の第2代の王居登王を生む。

許黄玉は阿踰陀(あゆだ)国の王女で、阿踰陀国から船に乗って48年伽耶に渡来し、首露王と出会い、その時に阿踰陀国からもって来た石塔と鉄物を奉納した。阿踰陀国についてはインドタイ中国日本などの説あるが、インドのアヨーディヤーが最有力である[2]。その理由は、首露王陵の正門の大梁に刻まれた双魚文様は、インドのアヨーディヤーの建築の紋章の特徴だからである[2]

from: 許黄玉(JP)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07. Retrieved 2022-05-07


Original Text :

在朝鲜民族的古代典籍里,记载许黄玉是印度阿逾陀的公主,后考证认为许黄玉的家乡应该是四川省资阳市安岳县。首露王与许黄玉共育10子,其中2子随母姓许。

仙女登岸
茫茫大海,一望无涯,他们只好顺风漂流。不知漂流了多少个日日夜夜,以致粮食快要用完了,仍不见岛屿和人家,族人渐渐失去了生存的信心。许黄玉以无畏无惧的精神,鼓励族人振作起来,发挥每一个人的生存潜能,同舟共济,向死神挑战,继续向东航行,以最快的速度,寻岛登陆求生。在许黄玉的鼓舞下,他们借助西南风,高扬红色风帆,乘风破浪,又航行了若干日日夜夜。公元48年7月27日清晨,一座形似馒头状的岛屿展现在眼前。他们绝地缝生、欢呼雀跃。红色大风帆在阳光照耀下显得格外醒目,立即引起朝鲜半岛南端驾洛国金海市辖地岛民的极大惊奇,他们奔走相告,在岸边聚集了许多人。码头上的岛民脸含笑容,招手示意,态度十分友善。这使许黄玉一行深感意外,在异国他乡受此礼遇,说明此地民风醇厚朴实,一颗悬吊的心才平安下来,当他们离船登岸之际。人们被貌若天仙的姿色所倾倒,认为是天女降临了,必定造福人间,在金海市一带,一时传为佳话。这时,伽倻国首露王接到金海市行政长官的报告,随即下书传许黄玉进宫,择定吉日(据传为八月一日),举行婚典纳为王妃。王宫张灯结彩,热闹非凡。伽倻国上下一片欢腾,庆贺金首露迎娶洋妃。
历史贡献

许黄玉作了三韩伽倻国金首露王王妃以来,不仅将当时经济发达的东汉农耕、水利、养殖、编织以及冶炼等技术带到了朝鲜半岛,使当地的经济得到了发展,而且,将东汉的政治制度、文化制度等都引入了伽倻国的朝堂。金首露王娶许黄玉之后,国家日益强盛,夫妻恩爱,生儿育女,子孙满堂,享尽人间天伦之乐,许黄玉享年157岁,公元189年3月逝世,谥号“普州太后”,葬金海龟旨峰,其陵碑刻有“驾洛国首露王妃普州太后许氏陵”14字楷书汉字。

家乡考证

编辑 播报

朝鲜古籍记载许黄玉是印度阿瑜陀国的公主。公元前六世纪,古印度小国阿瑜陀被大国摩竭陀吞灭,而无国可言;公元前五世纪,小城阿瑜陀短暂作为居萨罗都城,至公元前414年被摩竭陀所废,而无城可言。许黄玉所处公元一世纪中叶,即无阿国亦无阿城,因而“阿瑜陀公主”纯属子虚乌有。印度皇室为保全所谓纯正血统而只许近亲通婚,不许与外戚和亲,也从侧面证明许黄玉不可能是阿瑜陀公主。 许黄玉给朝鲜半岛带去中国独有的茶籽、《神农本草》典籍、丝绸织品和长江流域特有的干栏式建筑形构、粽子以及四川泡菜、糍粑等美食。韩国供奉的驾洛国始祖王妃·普州太后画像和金氏先祖母许黄玉年轻时代造像,全然是中国人模样。
朝鲜当时与印度没有任何直接往来,首露王也根本不知道阿瑜陀具体情况,为隐瞒东汉“乱民”身份以免遭遣返回国,故许黄玉佯称是印度阿瑜陀国的公主,临死前才告知旁人自己的真实身世。临终之际,对其后人告知自己原籍为中国巴蜀盆地许家坝,以至于其后世追谥她为“普州太后”,并立碑以志。
上一个世纪九十年代初期,研究许黄玉的韩国著名学者金秉模教授在中国的四川省安岳县找到了这个秘密----安岳古称“普州”。并且,在安岳县瑞云乡的许家坝,中韩学者找到了唯一与许黄玉陵墓中的“双鱼纹”完全吻合的图案。关于“普州”之名,专家们推断,韩国许黄玉陵碑镌刻“普州太后”是其后代于五六百年之后追谥的封号。东汉时安岳属犍为郡,地名为普慈;至梁代置设普慈郡;至北周建德四年方有普州和安岳县名,州县同城而治,几度兴废,安岳县名沿用至今。


Translation (in Korean) :

조선 고서에는 서황옥이 인도 아유타의 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연구에 따르면 서황옥의 고향은 쓰촨성 쯔양시 안월현으로 추정됩니다. 수루왕과 서황위 사이에는 총 10명의 아들이 있으며, 그 중 2명은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

       페어리 랜딩

끝없는 바다에서 그들은 바람을 맞으며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떠돌아 다녔는지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고, 여전히 섬과 가족이 실종되고, 일족은 점차 생존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다. 두려움 없는 정신으로 Xu Huangyu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모든 사람의 생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서로 돕고 죽음의 신에 도전하고 동쪽으로 계속 항해하고 생존을 위해 가장 빠른 속도로 섬에 착륙하도록 격려했습니다. Xu Huangyu에서 영감을 받아 남서풍을 이용하여 붉은 돛을 올리고 바람과 파도를 타고 며칠 밤낮을 항해했습니다. 서기 48년 7월 27일 이른 아침, 만두 모양의 섬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학살당하고 환호했다. 특히 햇살 아래 붉은 돛이 시선을 사로잡아 한반도 남단 김해시 김해의 도민들을 단숨에 놀라게 했다. 부두의 섬 사람들은 웃고 손짓하며 매우 친절했습니다. 이는 서황위와 그의 측근을 크게 놀라게 했다.외국에서 이러한 예의를 받는 것은 이곳의 민속 관습이 유순하고 소박하며 배와 육지를 떠날 때 매달린 마음이 평화롭게 안정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신의 도래가 반드시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가야국 수로왕은 김해시 총독의 보고를 받고 즉시 서황규에게 궁에 들어가라는 서한을 보내고 상서로운 날(8월 1일 기준)을 선택하여 혼인예식을 치르고 영접한다. 그를 공주로. 궁궐은 등불과 알록달록으로 장식되어 매우 활기가 넘쳤습니다. 가야왕국은 김수로가 외국 첩과 결혼한 것을 축하하는 환희로 가득 찼다.
역사적 공헌
허황옥은 삼한가야 진수루의 공주가 된 이후로 당시 경제적으로 발달한 동한시대의 농사, 수자원, 육종, 방직, 제련 기술을 한반도에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한의 기술을 한반도에 도입한 , 정치 제도, 문화 제도 등이 가야 왕국의 궁정에 도입되었다. 금서루왕이 서황옥과 결혼한 후 나라가 더욱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자녀를 낳고 많은 자녀와 손자를 가졌습니다. 서황위는 157세에 사망했습니다. ", 매장된 황금 거북이 지봉, 그 영묘 서판에는 14개의 일반 한자가 새겨져 있다.

고향 증명서

편집하다 방송

고대 한국 책에 따르면 Xu Huangyu는 인도 아유타야의 공주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는 고대 인도의 작은 나라 아유트(Ayutth)가 큰 나라 마기다(Magida)에게 삼켜져 아무 나라도 없었다. Jusala, BC 414년 Magida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Xu Huangyu는 서기 1세기 중반에 살았고 Aguo도 Acheng도 없었으므로 "Princess Ayutth"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도 왕실은 이른바 순혈(純血)을 유지하기 위해 친족끼리의 통혼만 허용하고 친족끼리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으며, 서황위가 아유타 공주가 될 수 없다는 측면도 증명한다. Xu Huangyu는 한반도에 독특한 중국 차 종자, "Shen Nong's Materia Medica"의 고전, 실크 직물, 장강의 독특한 건기둥 건축, 만두, 사천 절임, 찹쌀 케이크 및 기타 진미를 가져왔습니다. 칼뤄왕국의 첫 번째 공주인 푸주왕후의 초상화와 김 할머니의 젊었을 때의 서황위의 초상화는 완전히 중국식이다.
당시 북한은 인도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고, 수루왕은 아유트족의 구체적인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나라, Xu Huangyu는 인도 아유타의 공주인 척 하다가 죽어가는 중이었습니다.저는 방금 제 실제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임종 당시 그녀는 후손들에게 자신이 중국 바슈 분지의 쉬자바 출신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그녀의 후손은 사후에 그녀를 "푸저우 황태후"라고 부르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90년대 초 서황위를 연구한 한국의 유명 학자인 김병모 교수가 중국 쓰촨성 안월현에서 이 비밀을 발견했다. 또한 중국 및 한국 학자들은 Xu Huangyu의 묘에서 "이중 물고기 패턴"과 정확히 일치하는 유일한 패턴을 Anyue County Ruiyun Township Xujiaba에서 발견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푸저우'라는 이름에 대해 한국 서황위의 묘에 새겨진 '푸저우태후'라는 글이 500~600년 후의 후손들의 시호라고 추측하고 있다. 동한시대에 안월은 건위현에 속했고 그곳을 푸치라 하였고, 양나라 때 푸자현을 세웠다. 현과 현은 같은 시가 관할하며 월현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from: 许黄玉(CN)Baidu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07. Retrieved 2022-05-07


#허황옥 #허황후 #허씨 #Heo Hwang-Ok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