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옥 나무위키 아카이브글
'허황후', '허왕후'라고도 불리며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인 허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유사》에서는 고향이 인도 아유타야라고 기록했다. 금관국의 수로왕과 혼인해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2명에게 허씨 성을 주어 허씨 성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첫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고 여기서 더 갈라져 나머지 본관들이 생긴 식. 허씨 성을 물려받은 두 아들과 태자 거등왕을 제외한 아들 7명은 모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2. 기록[편집]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1]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3. 어디서 온 것인가?[편집]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 학계에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애초에 가야사와 관련된 기록이 극소수일 뿐더러 그나마도 부실하고 유적 발굴에만 의존하는 형편이기 때문. 그런고로 기록 그대로 현 인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아유타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설, 본래 토착민이거나 혹은 이주민이더라도 인도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허황옥을 권위를 위해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그 과정에서 인도를 끌어와 신성성을 부여시킨 것이라는 설 등의 자학적인 부정적 의견이 많다.
허황옥 인도설은 불교적으로 윤색했을 것이라는 설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허황옥이 김해시 쪽의 토착민이었을 가능성도 낮다는 쪽의 연구가 많다. 정말 바다를 넘어서 배를 타고 온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허황옥 역시 이주민일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금관국 내에서 허씨 일가의 권력은 김씨 왕가의 권력을 직접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허황옥은 김해를 기반으로 한 김씨 일가와 직접 상대가 가능한 정도의 큰 세력 출신이라는 설이 많다.
허황옥 인도설은 불교적으로 윤색했을 것이라는 설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허황옥이 김해시 쪽의 토착민이었을 가능성도 낮다는 쪽의 연구가 많다. 정말 바다를 넘어서 배를 타고 온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허황옥 역시 이주민일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금관국 내에서 허씨 일가의 권력은 김씨 왕가의 권력을 직접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허황옥은 김해를 기반으로 한 김씨 일가와 직접 상대가 가능한 정도의 큰 세력 출신이라는 설이 많다.
3.1. 아유타국설[편집]
허황옥 관련 현전하는 실질적인 기록은 위에 인용한 삼국유사 가락국기뿐이다. 다른 기록은 전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고 쓴 2차적인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 출신이다.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으나 허황옥 인도인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대체로 인도의 아요디아(Ayodhya)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아유타국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요디아라는 집단은 당시에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 출신이다.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으나 허황옥 인도인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대체로 인도의 아요디아(Ayodhya)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 아유타국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요디아라는 집단은 당시에 확인되지 않는다.
인도에도 몇 차례 언론을 통해 허황옥이 소개되었기에 이에 관심있는 현지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요디야는 옛날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이었고,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렸기에 허황옥은 타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언어상으로도 타밀어를 쓰는 지역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태국 지역의 왕국이었던 아유타야(Ayutthaya/Ayudhya)를 거론하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태국의 아유타야는 9세기 이후 이주한 타이인에 의해 세워진 정치체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12년 방영된 KBS 스페셜 등 허황옥 아유타국설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가야에서 아유타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인도계 유리구슬이 나오고 가야의 철정 기술이 인도 남부와 유사한 점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적혀있듯 허황옥이 한국으로 가져와서 쌓은 파사석탑이 지금도 김해시의 수로왕비릉에 있는데, 조사 결과 이 돌은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질이라고 한다. #
한반도의 철정 기술은 기원전 7-5세기에 무산의 범의구석 제5문화층에서 출토한 도끼, 기원전 4-3세기- 범의구석 제6문화층과 기원전 2세기경의 시중군 노남리, 중강군 토성리, 영변 세죽리 출토 철기들이 선철(銑鐵) 제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원전 5-4세기에는 철기를 부분적으로만 사용했고 기원전 3-2세기에 비로고 철기가 광범하게 보급되었다고 주장한다.[3]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의 세죽리유적(細竹里遺蹟)은 신석기·청동기·철기의 순서로 된 문화층이며 5기의 주거지와 함께 철제의 호미·괭이·낫·도끼·끌·손칼·살촉·명도전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태국 지역의 왕국이었던 아유타야(Ayutthaya/Ayudhya)를 거론하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태국의 아유타야는 9세기 이후 이주한 타이인에 의해 세워진 정치체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12년 방영된 KBS 스페셜 등 허황옥 아유타국설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가야에서 아유타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인도계 유리구슬이 나오고 가야의 철정 기술이 인도 남부와 유사한 점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적혀있듯 허황옥이 한국으로 가져와서 쌓은 파사석탑이 지금도 김해시의 수로왕비릉에 있는데, 조사 결과 이 돌은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질이라고 한다. #
한반도의 철정 기술은 기원전 7-5세기에 무산의 범의구석 제5문화층에서 출토한 도끼, 기원전 4-3세기- 범의구석 제6문화층과 기원전 2세기경의 시중군 노남리, 중강군 토성리, 영변 세죽리 출토 철기들이 선철(銑鐵) 제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원전 5-4세기에는 철기를 부분적으로만 사용했고 기원전 3-2세기에 비로고 철기가 광범하게 보급되었다고 주장한다.[3]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의 세죽리유적(細竹里遺蹟)은 신석기·청동기·철기의 순서로 된 문화층이며 5기의 주거지와 함께 철제의 호미·괭이·낫·도끼·끌·손칼·살촉·명도전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3.2. 불교윤색설[편집]
학계에서는 허황옥의 출생지를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한 것 아닐가 하는 설에 더 무게를 싣는다. 기록에 쓰여진 것이 다 사실이라고 보는 설은 인도학, 불교학 관련 논문 일부 등에서만 주장하는 소수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3.2.1.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유타국[편집]
3.2.2.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편집]
현실적으로 볼 때 당시 '아유타국'으로 후대에 불리게 되는 지역 사람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까지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물론 인간의 탐험에 대한 욕구는 경이로워서 기원전에도 전혀 불가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4] 그러나 항로 자체가 한 사람이 스쳐가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서 고생 끝에 만들어낸 경로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중국 한나라 대에 인도로 가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한나라 정부에 의해 보장되는 실크로드를 거친 육로였으며 중국과 인도의 교역은 주로 북중국과 북인도 사이의 육로로 이루어졌다. 한나라 대 불교가 수입된 것 또한 입국 승려들의 국적을 볼 때 실크로드를 거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경향은 4세기 무렵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해양 경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해에서 출토된 유리 유물 중 일부가 인도계로 추정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김해 출토 유리기는 2~4세기 유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허황옥 전설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가야 자체의 건국 기년이 끌어올려졌다는 의견이 다수이기에 넘어가더라도, 이 유리 유물의 출토 지역은 Arikamedu, 현재의 Kakkayanthope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링크). 그런데 후대에 '아요디아'로 불린 지역은 갠지스 강의 지류에 붙어 있는 내륙... 아니, 말이 내륙이지 오늘날의 지리적 관점에서는 남인도보다 히말라야 산맥에 더 가까운 지역이다. 지도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은 내륙과 연결된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거나 지척에 있는 지역이었으며(지도) 동방 여행을 간다면, 특히 그 동네 고귀한 공주 출신이었다면 그나마 쿠샨 왕조와 한나라의 안전 보장이 되는 육로를 대신해 해로를 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똑같은 인도 아니냐고 하겠지만, Kakkayanthope 지역은 전근대 인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도 전 지역 통일에 근접한 아소카 대왕도 직접적으로 복속시키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북인도와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다(애초에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실제로 한 대 해상 경로를 확인시켜주는 <한서> 지리지의 경로도 일남(日南, 베트남)-도원국(都元國, 말레이시아)-심리국(諶離國, 태국)-부감도로국(夫甘都盧國, 미얀마)를 거쳐 근해 항해를 하다가, 갑자기 '배로 2개월 가서 황지국(黃支國, 인도 타밀나두 칸치푸람)에 도착한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 자체만으로 북인도는 경유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앞서 언급한 쿠샨 왕조는 '귀상(貴霜)' 왕조로서 당대 중국에 꽤 유명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경유했다면 언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북인도가 남인도 지역과 중국 사이의 유리구슬 교역에 끼어들지 못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5]
그러나, 현지인들은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요디야는 옛날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이었고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렸기에 허황옥은 타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위치적으로는 유리구술의 원산지와 정확히 일치하긴 하다.
실제로 중국 한나라 대에 인도로 가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한나라 정부에 의해 보장되는 실크로드를 거친 육로였으며 중국과 인도의 교역은 주로 북중국과 북인도 사이의 육로로 이루어졌다. 한나라 대 불교가 수입된 것 또한 입국 승려들의 국적을 볼 때 실크로드를 거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경향은 4세기 무렵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해양 경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해에서 출토된 유리 유물 중 일부가 인도계로 추정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김해 출토 유리기는 2~4세기 유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허황옥 전설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가야 자체의 건국 기년이 끌어올려졌다는 의견이 다수이기에 넘어가더라도, 이 유리 유물의 출토 지역은 Arikamedu, 현재의 Kakkayanthope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링크). 그런데 후대에 '아요디아'로 불린 지역은 갠지스 강의 지류에 붙어 있는 내륙... 아니, 말이 내륙이지 오늘날의 지리적 관점에서는 남인도보다 히말라야 산맥에 더 가까운 지역이다. 지도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은 내륙과 연결된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거나 지척에 있는 지역이었으며(지도) 동방 여행을 간다면, 특히 그 동네 고귀한 공주 출신이었다면 그나마 쿠샨 왕조와 한나라의 안전 보장이 되는 육로를 대신해 해로를 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똑같은 인도 아니냐고 하겠지만, Kakkayanthope 지역은 전근대 인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도 전 지역 통일에 근접한 아소카 대왕도 직접적으로 복속시키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북인도와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다(애초에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실제로 한 대 해상 경로를 확인시켜주는 <한서> 지리지의 경로도 일남(日南, 베트남)-도원국(都元國, 말레이시아)-심리국(諶離國, 태국)-부감도로국(夫甘都盧國, 미얀마)를 거쳐 근해 항해를 하다가, 갑자기 '배로 2개월 가서 황지국(黃支國, 인도 타밀나두 칸치푸람)에 도착한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 자체만으로 북인도는 경유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앞서 언급한 쿠샨 왕조는 '귀상(貴霜)' 왕조로서 당대 중국에 꽤 유명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경유했다면 언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북인도가 남인도 지역과 중국 사이의 유리구슬 교역에 끼어들지 못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5]
그러나, 현지인들은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요디야는 옛날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이었고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렸기에 허황옥은 타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위치적으로는 유리구술의 원산지와 정확히 일치하긴 하다.
3.2.3. 육로설도 어려운 이유[편집]
허황옥이 육로로 한반도까지 왔다고 가정할 경우 경로는 다음과 같다. (허황옥 인도유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지도들도 다 3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1. 티베트 경유
북인도 (북쪽으로) ➝ 히말라야 ➝ 티베트 ➝ 칭하이 호 일대 ➝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2. 중앙아시아 우회
북인도 (서쪽으로) ➝ 파키스탄 ➝ 중앙아시아 ➝ 타클라마칸 사막 ➝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3. 미얀마 경유
북인도 (동쪽으로)➝ 아라칸 산맥 ➝ 미얀마지역 ➝ 남만 ➝ 익주 ➝ 중원 ➝ 서해 ➝ 한반도 (위의 지도 참조)
문제는 1,2,3번 모두 힘들다는 것이다. 일단 허황옥 일행이 중원까지 도착하기가 힘들다. 이 경로들은 하나하나가 현재도 교통로가 미비하여 거쳐가기가 힘든 지역이며, 고대에는 더욱 더 거쳐가기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당시에 이 경로를 인도인 귀족 집단이 무사히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1번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티베트인들은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며 강족의 한 갈래였다. 강족은 사나운 오랑캐로 이 당시 중국의 변경을 습격하며 살고 있었다.[6] 당연히 외부인이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묵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한말 끊겼던 실크로드는 후한의 명장 반초의 활약으로 흉노를 격파하고 1세기 후반에 다시 이어지지만, 이것은 타클라마칸-서량의 통로를 확보한 것일 뿐이며, 그 남쪽에 있는 티베트 지역은 당시 강족의 부족국가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인도인 귀족집단이 무사통과하기란 어림 없었을 것이다. 비단 강족이 아니더라도 히말라야는 평균 해발 5,000m 이상, 티베트는 평균 해발 4,000m에 이상인 고지대이며, 고산병 및 혹독한 기후로 물리적으로 통과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17세기 말 아르메니아인 상인 호바네스가 티베트의 라싸에서 칭하이성[7]의 시닝으로 이동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8][9] 도로가 없는 거친 산악지대를 약탈이나 습격에 대비해서 이동하려면 이동 속도가 무척 느릴 수 밖에 없다. (물론 당시는 티베트 고원이 안정된 상황이라서 고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볼 수 있다.) 라싸와 시닝의 거리를 기준으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이동 시간을 계산하면 허황옥은 청춘을 전부 다 산과 숲을 타고 넘는데 낭비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번의 경우는 허황옥이 불교의 전파로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티베트를 거치지 않고, 쿠샨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던 현재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우회해서 역시 후한이 장악한 실크로드 동쪽을 거쳐 중원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에 지루가참 같은 인도승려가 낙양까지 와서 역경사업을 했으므로,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로도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 수백년 후에 그 루트로 중국에서 인도로 갔던 현장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서야 겨우 인도에 닿았다. (그리고 그 모험담이 서유기로 각색된다.) 종교 전파의 사명을 띤 역경승이나 구법승이 목숨을 걸고 넘어갔던 루트를 인도인 귀족집단이 위험을 무릅스고 통과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3번은 1번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다. 먼저 인도-미얀마 사이에는 험준한 아라칸 산맥이 있으며, 아라칸 산맥은 인도와 동남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곳이 얼마나 험준한 곳이냐면, 그보다 약 1800년 후인 서기 1944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임팔 작전에서 작전에 참가한 일본군 반이 아사했을 정도로 인간이 통과하기 힘든 지역이다. 게다가 운좋게 미얀마 지역에 닿았다고 해도, 미얀마의 북쪽에 있는 남만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보듯이 문명과는 거리가 먼 미개종족의 영역이었으며, 자연환경도 야생동물과 병충해가 들끓는 열대 밀림지대라서 통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여기를 넘어 왔다고 해도, 후한의 치세는 2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히 약화되며 이 후부터는 중원을 통과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렇게 약화된 결과 2세기 후반에는 황건적의 난과 삼국시대(중국)가 펼쳐진다. 허황옥이 그나마 중원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반초가 활약한 1세기 후반부터 당고의 화로 후한이 어지러워지기 직전까지인 2세기 중반까지 약 50여년 뿐이며, 그 이후에는 중국 대륙이 군벌로 갈려 매일을 전쟁으로 싸우던 시기라서, 중원을 통과하기 힘들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2번을 조금 변형해서 인도인 이주집단이 중국 쓰촨에 머물렀을 때, 허황옥이 태어났다는 설을 주장한다. 그 근거는 허황옥의 묘비에 새겨진 " 보주태후허씨릉"이라는 명문이다. 이를 근거로 인도 이주민들이 2번투트로 쓰촨까지 와서 허황옥을 보주(普州) (현재 쓰촨성 안웨현)에서 낳았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고 환빠스러운 일부 언론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는데 #, 이것도 말이 안된다. 중국어 위키 백과#에 따르면 보주는 북주 (AD 575)시절 처음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폐지되고 다시 당나라 때 설치되고 이후 설치와 복원을 반복하다 명나라 때 최종폐지된다. 허황옥이 살았던 시기는 보주가 처음 설치될 북주 시기보다도 400년 전인 후한 시기이므로 보주 탄생설도 허무맹랑한 설이다.
1. 티베트 경유
북인도 (북쪽으로) ➝ 히말라야 ➝ 티베트 ➝ 칭하이 호 일대 ➝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2. 중앙아시아 우회
북인도 (서쪽으로) ➝ 파키스탄 ➝ 중앙아시아 ➝ 타클라마칸 사막 ➝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3. 미얀마 경유
북인도 (동쪽으로)➝ 아라칸 산맥 ➝ 미얀마지역 ➝ 남만 ➝ 익주 ➝ 중원 ➝ 서해 ➝ 한반도 (위의 지도 참조)
문제는 1,2,3번 모두 힘들다는 것이다. 일단 허황옥 일행이 중원까지 도착하기가 힘들다. 이 경로들은 하나하나가 현재도 교통로가 미비하여 거쳐가기가 힘든 지역이며, 고대에는 더욱 더 거쳐가기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당시에 이 경로를 인도인 귀족 집단이 무사히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1번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티베트인들은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며 강족의 한 갈래였다. 강족은 사나운 오랑캐로 이 당시 중국의 변경을 습격하며 살고 있었다.[6] 당연히 외부인이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묵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한말 끊겼던 실크로드는 후한의 명장 반초의 활약으로 흉노를 격파하고 1세기 후반에 다시 이어지지만, 이것은 타클라마칸-서량의 통로를 확보한 것일 뿐이며, 그 남쪽에 있는 티베트 지역은 당시 강족의 부족국가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인도인 귀족집단이 무사통과하기란 어림 없었을 것이다. 비단 강족이 아니더라도 히말라야는 평균 해발 5,000m 이상, 티베트는 평균 해발 4,000m에 이상인 고지대이며, 고산병 및 혹독한 기후로 물리적으로 통과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17세기 말 아르메니아인 상인 호바네스가 티베트의 라싸에서 칭하이성[7]의 시닝으로 이동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8][9] 도로가 없는 거친 산악지대를 약탈이나 습격에 대비해서 이동하려면 이동 속도가 무척 느릴 수 밖에 없다. (물론 당시는 티베트 고원이 안정된 상황이라서 고대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볼 수 있다.) 라싸와 시닝의 거리를 기준으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이동 시간을 계산하면 허황옥은 청춘을 전부 다 산과 숲을 타고 넘는데 낭비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번의 경우는 허황옥이 불교의 전파로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티베트를 거치지 않고, 쿠샨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던 현재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우회해서 역시 후한이 장악한 실크로드 동쪽을 거쳐 중원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에 지루가참 같은 인도승려가 낙양까지 와서 역경사업을 했으므로,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로도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 수백년 후에 그 루트로 중국에서 인도로 갔던 현장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서야 겨우 인도에 닿았다. (그리고 그 모험담이 서유기로 각색된다.) 종교 전파의 사명을 띤 역경승이나 구법승이 목숨을 걸고 넘어갔던 루트를 인도인 귀족집단이 위험을 무릅스고 통과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3번은 1번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다. 먼저 인도-미얀마 사이에는 험준한 아라칸 산맥이 있으며, 아라칸 산맥은 인도와 동남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곳이 얼마나 험준한 곳이냐면, 그보다 약 1800년 후인 서기 1944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임팔 작전에서 작전에 참가한 일본군 반이 아사했을 정도로 인간이 통과하기 힘든 지역이다. 게다가 운좋게 미얀마 지역에 닿았다고 해도, 미얀마의 북쪽에 있는 남만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보듯이 문명과는 거리가 먼 미개종족의 영역이었으며, 자연환경도 야생동물과 병충해가 들끓는 열대 밀림지대라서 통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여기를 넘어 왔다고 해도, 후한의 치세는 2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히 약화되며 이 후부터는 중원을 통과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렇게 약화된 결과 2세기 후반에는 황건적의 난과 삼국시대(중국)가 펼쳐진다. 허황옥이 그나마 중원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반초가 활약한 1세기 후반부터 당고의 화로 후한이 어지러워지기 직전까지인 2세기 중반까지 약 50여년 뿐이며, 그 이후에는 중국 대륙이 군벌로 갈려 매일을 전쟁으로 싸우던 시기라서, 중원을 통과하기 힘들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2번을 조금 변형해서 인도인 이주집단이 중국 쓰촨에 머물렀을 때, 허황옥이 태어났다는 설을 주장한다. 그 근거는 허황옥의 묘비에 새겨진 " 보주태후허씨릉"이라는 명문이다. 이를 근거로 인도 이주민들이 2번투트로 쓰촨까지 와서 허황옥을 보주(普州) (현재 쓰촨성 안웨현)에서 낳았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고 환빠스러운 일부 언론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는데 #, 이것도 말이 안된다. 중국어 위키 백과#에 따르면 보주는 북주 (AD 575)시절 처음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폐지되고 다시 당나라 때 설치되고 이후 설치와 복원을 반복하다 명나라 때 최종폐지된다. 허황옥이 살았던 시기는 보주가 처음 설치될 북주 시기보다도 400년 전인 후한 시기이므로 보주 탄생설도 허무맹랑한 설이다.
3.2.4. 가야 철기와 인도와의 관계?[편집]
가야의 철정 제작 기술이 인도와 비슷하다는 주장은 근거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인도 고인돌에서 나왔다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게다가 영문 위키백과의 고인돌 목록(List of Dolmens) 문서에서는 '아유디아'(다시 말하지만 후대에 그렇게 불리게 되는 지역)가 속한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고인돌이 제작되는 것은 인도에서도 철기시대의 일인데, 4대 문명에 속한 범인도 지역은 철기시대도 빨라서 한반도와는 5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무리한 추정과는 달리 한반도의 철제 유물 제작 기술은 대체로 전국시대 중국의 제철 기술이 고조선을 거쳐 한반도 남부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이성주(2007), <청동기·철기시대 사회변동론>, 학연문화사).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허황옥과 인도 제철 기술의 전래(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면)가 관련이 있다면 허황옥은 여행 다니는 와중에 배에다가 광산 노동자와 제철 기술자를 싣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대 항해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여러 모로 경이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공 사례일 뿐, 전근대에 배 타고 멀리 가다가 식량 떨어져서 굶어죽는 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항해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원을 태우고 한반도까지 온다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허황옥과 인도 제철 기술의 전래(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면)가 관련이 있다면 허황옥은 여행 다니는 와중에 배에다가 광산 노동자와 제철 기술자를 싣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대 항해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여러 모로 경이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공 사례일 뿐, 전근대에 배 타고 멀리 가다가 식량 떨어져서 굶어죽는 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항해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원을 태우고 한반도까지 온다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3.2.5. 허황옥을 인도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편집]
허황옥의 출신지를 굳이 각색할 이유가 있냐는 것도 사실 좀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다. 불교계에서 인도는 천축국 말 그대로 성지이며, 진흥왕도 아소카 왕이 만들다 못 이룬 불상이 어쩌다 떠내려와서 신라에서 완성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어떻게든 인도와 연결짓고 싶어 했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 되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개국 전설은 후대에 신화화되기 가장 좋은 소재이다. 단군, 박혁거세, 고주몽, 해모수 등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전설들이 많다. 가야 역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었다. 물론 현대인들은 곰이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등 이런 신화를 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즉 신화적 기록은 사실과 허구가 섞인 거라고 이해해야 합리적이다. 고로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 신화처럼 후대인들이 각색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황옥 일가가 가야에 미쳤던 영향력을 고려해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좌지왕 시절 허황옥 일가는 왕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짓고 허씨 가문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등의 모습들도 보인다. 즉,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 윤색을 할만한 영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는 것. 신라에 병합된 이후 김유신 후손들이 가야 세력의 영향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허황옥을 신격화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나아가 왜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적힌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려해볼 만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면 다른 역사서에도 충분히 이런 얘기들이 기록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삼국사기 등에선 이런 얘기를 적지 않았다.[10]
이는 허황옥 일가가 가야에 미쳤던 영향력을 고려해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좌지왕 시절 허황옥 일가는 왕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짓고 허씨 가문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등의 모습들도 보인다. 즉,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 윤색을 할만한 영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는 것. 신라에 병합된 이후 김유신 후손들이 가야 세력의 영향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허황옥을 신격화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나아가 왜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적힌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려해볼 만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면 다른 역사서에도 충분히 이런 얘기들이 기록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삼국사기 등에선 이런 얘기를 적지 않았다.[10]
3.2.6. '허황옥' 이라는 이름 그 자체[편집]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보면 성은 허요, 이름이 황옥이다. 이것이 명백히 중국이나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 이름에 기반하지, 인도인의 이름이라고는 보기가 어렵다. 마치 투란도트 오페라에서, 유럽인이 중국의 공주라면서 실제 중국 이름과는 별 상관이 없는 '투란도트'를 중국 공주 이름이라고[11] 설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작성된 사료에는, 외국인이나 이민족의 이름들을 죄다 한자로 표기하여 적지만, 그 표기를 보아하더라도 한족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흉노족인 난제어부라 또는 혁련발발이나, 인도에서 온 승려인 구마라집, 고구려인인 명림답부, 백제인인 부여의자, 돌궐인인 아사나묵철, 여진족인 완안아골타, 신라인인 박혁거세, 일본인인 풍신수길, 선비족인 독발수기능, 거란족인 야율아보기나 몽골족인 패아지근철목진이나 만주족인 애신각라노이합적같은 이름은 그 원어를 알지 못하더라도 한자 표기만 보더라도 명백히 한족이 아닌 민족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연처럼 한화(漢化)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있지만 이는 사서에서 이민족들이 중국 지역에 왕조를 세우고 한족식 이름을 채용했다는 기록이 명백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대 인도 아대륙권 인물의 이름 중 하나를 대라고 하면, 고타마 싯다르타를 들 수 있겠다. 물론 인도가 단일한 국가가 아니며 언어도 한두개가 아니라지만, 불경 등에 나오는 고대 '인도인'들의 이름들(아난다나 데바닷타, 슈도다나, 라훌라 등)과, '허 황옥' 이라는 이름을 비교해보면, 과연 허황옥이 진짜 '인도 아대륙에 있다던 아유타국'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조차 의심이다.[12] 게다가 허황옥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성씨가 허요 이름이 황옥이라고 하니, 인도인이 한반도 남부 가야에 정착해 따로 개명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은 이름조차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도인의 이름이 허황옥이라는 것은 실제 인도인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오페라 투란도트나 고대 아랍 설화 알라딘에서 실제 중국과는 별 상관 없는, 단지 이야기 저자들의 환상과 판타지 속의 중국을 만든 것처럼 허씨 가문이 자신의 시조를 꾸며내면서 그들의 환상 속의 인도 아유타국을 만든 것에 가깝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대 인도 아대륙권 인물의 이름 중 하나를 대라고 하면, 고타마 싯다르타를 들 수 있겠다. 물론 인도가 단일한 국가가 아니며 언어도 한두개가 아니라지만, 불경 등에 나오는 고대 '인도인'들의 이름들(아난다나 데바닷타, 슈도다나, 라훌라 등)과, '허 황옥' 이라는 이름을 비교해보면, 과연 허황옥이 진짜 '인도 아대륙에 있다던 아유타국'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조차 의심이다.[12] 게다가 허황옥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성씨가 허요 이름이 황옥이라고 하니, 인도인이 한반도 남부 가야에 정착해 따로 개명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은 이름조차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도인의 이름이 허황옥이라는 것은 실제 인도인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오페라 투란도트나 고대 아랍 설화 알라딘에서 실제 중국과는 별 상관 없는, 단지 이야기 저자들의 환상과 판타지 속의 중국을 만든 것처럼 허씨 가문이 자신의 시조를 꾸며내면서 그들의 환상 속의 인도 아유타국을 만든 것에 가깝다.
3.2.7. 역사상 실제 장거리 여행-항해 사례와 비교하여[편집]
오스트로네시아인의 대양 확장, 박연과 헨드릭 하멜의 표류 사례, 안다만니코바르 제도의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에 출입하지 못하는 인도의 공무원의 사례, 고대 카르타고의 탐험가인 항해자 한노는 대양항해는 꿈도 못 꿀 시기에 연안항해를 통해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일대까지 탐험한 기록 등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항해는 개인의 항해가 아닌 인구 집단의 항해이며,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박연-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는 나가사키에 상관(商館)을 유치하고 있었고, 조선도 그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카르타고와 세네갈의 경우에도, 인도와 한반도의 거리에 비해서는 아득한 차이가 날 정도로 짧은 거리에 있으며 그 사이를 가로막을 정치체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같은 국가에 속하는 인도 공화국과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강원도 정선군의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유럽계 유골이 출토된 사례 # 까지 언급되었으나, 이 경우는 수천 년에 걸쳐서 소수 인구 집단이 이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 시대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물론 서기 1세기 후한의 탐험가인 감영이 지금의 캅카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일대에 이르는 지역까지 탐험한 사례, 고대 그리스의 피테아스가 그냥 탐험하려고 브리튼 제도까지 가본 사례, 중세 모로코의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가 메카 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중국까지 다녀온 기록 등도 있다. 그러나 감영은 후한 정부가 절반 이상의 경로를 보장해 준 데다가 후한의 정부 관료로서 안식국(파르티아)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그 사이의 경로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고, 이 시기에 로마 기록에서 '시니카'가 확인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로마가 중국과 교역하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피테아스는 이미 그 시대에 적어도 스페인까지는 그리스-로마인의 교역망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리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측정 자료를 남겨 경로의 재구성이 가능했다. 이븐 바투타의 경우 메카까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홍해와 인도, 인도와 중국 사이에 정식으로 국가 대 국가로 교섭하는 정치체들 사이에 계절풍을 이용한 정기 무역이 이미 발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여행기에서 그 풍습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남겨 오늘날까지 연구에 대해 이용되고 있다. 반면 허황옥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런 항해 내용을 증언해 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억지로 <한서> 지리지 등의 기록을 끼워 맞춰 없는 기록을 땜질해 보려하는 것이지만, 당시 남해 항로에 대해서는 한의 정부에서 점 단위[13] 조직을 겨우 파악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사이 있다는 국가들도 한나라와 '아유타국(앞에서 말했듯 이름은 둘째 치고 대충 그 전신이 있기는 했다면)'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었다. 무엇보다 앞의 여행가들은 당대에 기록을 남겨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반면, 허황옥에 대한 기록은 100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가락국기로 추적하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서기 1세기 후한의 탐험가인 감영이 지금의 캅카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일대에 이르는 지역까지 탐험한 사례, 고대 그리스의 피테아스가 그냥 탐험하려고 브리튼 제도까지 가본 사례, 중세 모로코의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가 메카 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중국까지 다녀온 기록 등도 있다. 그러나 감영은 후한 정부가 절반 이상의 경로를 보장해 준 데다가 후한의 정부 관료로서 안식국(파르티아)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그 사이의 경로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고, 이 시기에 로마 기록에서 '시니카'가 확인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로마가 중국과 교역하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피테아스는 이미 그 시대에 적어도 스페인까지는 그리스-로마인의 교역망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리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측정 자료를 남겨 경로의 재구성이 가능했다. 이븐 바투타의 경우 메카까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홍해와 인도, 인도와 중국 사이에 정식으로 국가 대 국가로 교섭하는 정치체들 사이에 계절풍을 이용한 정기 무역이 이미 발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여행기에서 그 풍습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남겨 오늘날까지 연구에 대해 이용되고 있다. 반면 허황옥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런 항해 내용을 증언해 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억지로 <한서> 지리지 등의 기록을 끼워 맞춰 없는 기록을 땜질해 보려하는 것이지만, 당시 남해 항로에 대해서는 한의 정부에서 점 단위[13] 조직을 겨우 파악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사이 있다는 국가들도 한나라와 '아유타국(앞에서 말했듯 이름은 둘째 치고 대충 그 전신이 있기는 했다면)'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었다. 무엇보다 앞의 여행가들은 당대에 기록을 남겨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반면, 허황옥에 대한 기록은 100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가락국기로 추적하는 것이 고작이다.
3.3. 절충설[편집]
고고인류학자 김병모는 허황옥이 인도 아요디아를 떠나 중국의 사천성 지방에 정착한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하였다.[14] 즉 가문이 아요디아 출신인 것은 맞으나 허황옥 본인은 중국에서 건너왔으리라는 것.[15] 삼국유사 기록상 비단 옷감(錦繡綾羅)을 많이 가져왔다고 되어있는데 비단은 고대 기준 인도가 아닌 중국의 특산물이다. 특히 촉(사천) 지방은 한나라 때부터 비단이 특산물로 촉한의 주 수입원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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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뷰브 댓글 모음
from: Similarities Between Tamil and Korean. Youtube -lin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10. Retrieved 2022-05-10.
Juhwanjuhwan0509 Yi
3개월 전
드라비다-한국어 가설은 이미 학계에서 사장된 학설입니다. 그리고 이 학설이 다시 주류로 올라가거나 맞다는 게 입증될 확률은 희박합니다.
더불어, 발음 비교에서도 문제가 있는데, 먼저 표면적인 발음이 같다고 해서 그 단어가 동계어라는 것은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 단어의 원래 어형, 또 고어(古語)형도 모두 고려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등 친족어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친족어 어휘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아랍어에서도 엄마, 아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프다(apeuda)는 동사 앓- 에서 형용사파생접미사 'ᄇᆞ' 가 결합된 말로, 프(peu) 는 핵심적인 뜻이 없는 접미사입니다. 당연히 거짓짝 이네요(false friend).
싸우다(Ssawuda)는 중세국어로 싸호다(Ssahoda) 였습니다. 그리고 싸운다 는 기본 어형이 아니고, 싸우다 가 기본 어형입니다.
언니(unnie)는 19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1897년에 처음 등장한 말입니다.
갗춰야 할(gachuoya hal)은 단어가 아닌 어휘입니다. 이를 타밀어 단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비교 언어학적으로도 지양되는 일입니다.
이빨은 이(중세국어형으로는 니)의 낮춤말로, 주로 짐승의 치아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마음은 중세국어형으로 ᄆᆞᅀᆞᆷ(mazuam) 으로 불렸으므로 그 어원이 다릅니다.
묻우(Mudu)는 올바른 활용이 아닙니다. '묻다'(mudda) 가 기본형입니다.
All Kim clan have 100% Hindu Brahmin DNA from India. This is why Korean girls can blush when shy like the docile Tamil girls in Bharat today.
The real ancient faith of all Koreans and entire South East Asia was Sanatan Dharma and the same is the reason for similarity in the two languages.
Tamil is one of the oldest languages of the world.
Chatrapati Samrat Vikramaditya Maharaja, ancient King of Bharat ruled the entire planet 7000 years ago, when there was only one faith across the globe....Sanatan Dha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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