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풀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포괄적인 안내서 - 고대근동세계(ANE) 의 이해 레포트 자료 -

신비 풀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포괄적인 안내서

- 고대근동세계(ANE) 의 이해 레포트 자료 -

 

기원전 3천년 대의 메소포타미아 

- ‘동방의 유럽’의 시작 -

기원전 3500년 경에서부터 최초의 역사가 시작하는 이유는 문자의 등장으로 인해 기록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최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는 기원전 9천년경에 사용되었던 유적으로,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기 전의 시대로 추정됩니다. 또, 알라카 회육(Alaca Höyük)은 신석기 유적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에서는 이미 복잡한 수준의 도자기 제작, 금속 가공, 청동제작 등의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문자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역사 시대로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고대 중동 지역으로, 중요한 두 강인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합니다. 이 지역에서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 국가가 발전하였고,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알라카 회육 지역과 같이 도자기, 금속 가공, 청동 제작 등의 기술이 발달했으며, 수학, 천문학, 의학 등도 발전하였습니다. 이 기원전 35세기의 우르크 혁명을 통해서 신석기 문화와 단절된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 이루어졌으며, 농업의 시작으로 인해 인간들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의 발달로 생산성이 증가하여 사회와 경제가 발전했습니다. 또한, 문자의 등장으로 기록이 가능해지면서, 인간들은 지식을 기록하고 전달하는데에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실용적인 토기 생산으로 시작하여 우르크를 비롯한 다양한 도시에서 성벽, 수로, 신전의 건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행정체계와 교육체계가 확립되고, 직업의 분화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문자, 농업, 건축, 금속, 교육, 수학, 천문학, 의학, 권력, 행정, 군대 등 모든 문명의 요소들이 동시에 출현하였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살펴보자면, 기원전 35세기의 우르크 혁명 시기에는 실용적인 토기의 생산이 일어났으며, 최초의 성읍도시 우르크가 건설되고, 도시의 중심에는 신전이 지어 졌습니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건설된 신전은 본래 대사제가 왕을 겸했으나 나중에 분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신전과 큰 집을 모두 에갈(EGAL)로 일컫는 것에서 추측됩니다. 또, 기르수와 슈르파크에서 나온 문서를 보면 전문화가 극에 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로는 키쉬, 아답, 움마, 라가쉬, 우르 등의 지역에서 성벽, 수로, 신전의 건설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수메르(3500 B.C~)-아카드(2400 B.C~)-신수메르(2100 B.C~)는 각각 다른 시대와 지역을 나타내며, 수메르 문화의 기원과 정체성은 북부이주설이나 동부이주설 등 다양한 이론이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키앤기" 또는 "우가릿"이라고 불렀으며, 수메르어는 대략 기원전 1700년 경까지 일상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기원전 2750~2600년은 사실상 역사시대의 시작으로, 길가메쉬 등 반신적 영웅의 이야기가 전해졌습니다. 다만, 길가메쉬 서사시는 시대에 따라 내용이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길가메쉬는 파라라는 도시의 성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왕명록에도 등장합니다. 그 정확한 실존 여부는 불명확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전설적 서기인 신메키우리니가 12장의 석판에다 종합해서 적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토판으로 최종 정리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은 무한한 경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주로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중간 지역에서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작은 영토국가들은 도시들 간의 우위가 결정되는 이 경쟁에서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도시들 간의 경쟁은 일종의 중앙집권화로 이어져 "영웅" 전승의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라가쉬의 엔안나툼(2450 B.C 년경)은 움마를 물리치고 우르, 우루크, 키쉬, 마리, 엘람, 수 바르투, 정벌을 자랑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400 B.C 년경, 움마의 루갈자게시는 우루크와 라가쉬가 멸망시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특이하게도, 수메르의 체제는 원시민주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임금은 통치자가 아닌 '목자' 혹은 신의 대리자로 인식되었으며, 백성의 대표나 평의회의 동의를 얻어 다스렸 습니다. 임금은 '정의'라는 상위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체계는 신의 아들인 파라오 자체가 ‘정의’인 이집트와는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수메르는 계약 사상을 가졌으며, 성읍들 사이의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를통해 도시들간의 자유경쟁에서 다양한 합종연횡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평의원회(puhrum)의 적극적 활약이 있었습니다. 수메르의 왕권사상은 신과 여사제 사이의 아들인 임금이 신의 지상 대리자임을 주장했습니 다. 이를 위해 신성결혼(hieros gamos)사상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수메르 도시국가들의 체제는 백성의 총회(UNKIN), 주인(EN), 대인(LU.GAL) 등의 칭호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주인 (EN)이라는 칭호는 우르크에서 오래 지속되었으며, 대인(LU.GAL)이라는 칭호는 다른 도시에서 더 널리 쓰였습니다. 후대에는 엔시(EN.SI)나 엔시크(EN.SI.K)와 같은 지배자의 칭호가 등장했습니다. 엔시크(EN.SI.K)는 도시국가의 수장을 뜻했으며, 파견관리를 담당했습니다.

2400 B.C 년경에는 아카드에서 ‘사르곤’이라는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사르곤은 키쉬 출신으로 아카드를 점령하고 근처에 성읍 악가데(Aggade, 미래에 Akkad로 변형된다)를 건설 하여 실질적인 키쉬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복왕'으로 불리며 도시국가들의 경쟁체제에 일시적인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는 사방의 임금(Sar kibrat arba’im)으로 불리는 칭호를 만들어 북부(앗슈름 등), 남부(수메르 등), 동부(엘람 등), 서부(시리아 등) 지역을 통치합니다.

 사르곤의 칭호는 후대의 정복자들이 대를 이어 사용합니다. 그는 그의 재위 55년 동안 여러 지역을 정복하였고, 지배과정에서 수메르 도시국가들이 자치권을 특별히 인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말년에는 수메르의 50 통치자 연합의 반란도 진압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인물로는 나람 신 (Naram-Sin)이 있습니다. 그는 사르곤의 아들 또는 손자로, 그는 스스로의 신격화를 시도했으나 이는 후세에 강하게 비판되었습니다. 이후 시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스스로의 신격화를 시도하는 왕은 없습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사이의 사상적 차이점을 표현합니다. 지역별 법률 개념의 차이를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왕은 신의 대리자라는 사상을 기반으로 법 조항을 신의 뜻의 표현으로서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집트 문명은 왕 자체가 신으로서 법의 발달이 보다 늦었습니다. 아카드는 총독(Ensi)를 파견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또 어떠한 사건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는 ‘사건 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훗날 바빌론의 키쉬 왕조에서 즉위 년호를 사용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사르곤 시대(2400 B.C 년경)에 사르곤은 친딸 ‘엔헤두안나’를 우르로 보내서 신의 여사제로 임명했습니다. ‘엔해두안나’는 40개의 신전찬미가를 지은 인류최초 의 여성 시인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2200 B.C 년경부터 당나귀를 타고 다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는 바퀴살을 만들기 전으로 기술적 발전이 제한적이었지만, 당나귀를 이용하여 교역과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의 ‘에리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로 불리웠고, ' 우르’는 '문화선진국'으로 불리웠습니다. '키쉬'는 이라크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이 시대에는 중동 지역을 연결하는 교역로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기술적 발전은 제한적이 었지만, 교역과 이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우 르의 깃발(standard of Ur)은 오직 아프카니스탄에서 채취되는 비싼 청금석을 이용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먼 거리의 교역이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시기는 다양한 수도권이 세워졌고, 수많은 문화가 섞이면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때 수메르인과 아카드인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아카드적 방식이 수메르인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면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신수메르 시대에는 구트족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동쪽에서 2180 B.C 년경 구트족이 침략하여 아카드 제국이 멸망하였습니다. 이후 약 40년간 구트족 치하였습니다. 이때의 기록은 적으며, 구트는 야만족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누가 임금인가? 누가 임금이 아닌가?"는 기록이 수메르 왕명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임금들이 있었으며, 이 시대의 ‘라가쉬’ 임금 구데아(Gudea)가 유명합니다. 이때는 수메르와 아카드를 구트족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라가쉬 출신은 아니었지만, 라가쉬의 임금 우르바바의 공주 닌-알라와 결혼했 습니다. 라가쉬는 ‘기르슈’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엘람인들과 맞섰던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구데아 상은 라가쉬의 임금 구데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임금의 본보기로 자리 잡은 인물입니다. 구데아는 신의 뜻을 받들어 라가쉬를 통치하고 외적을 막는 일을 했으며, 백성을 통치하는 모범으로 후대에 칭송되었습니다. 또한 신전을 건설해서 신에게 바치는 임금의 역할을 정립하는 등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구데아는 우르 제3왕조에 패배해 몰락했습니다.

이후, 우르크의 ‘우투헤갈’이 구트족을 몰아내었습니다. 이어 우르가 패권을 잡았고, 우르 남무(Ur-Nammu) 임금이 우르 제3왕조를 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함무라피 법전의 모태가 되는 ‘우르-남무 법전’이 제작되었습니다. 이전의 우르 왕조는 우르1,2왕조로 칭해집니다. 우르 제3왕조는 수메르 왕조이지만 아카드적 방식을 적극 수용하여 제국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 으며, 조세와 조공 제도를 확립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우르 3왕조의 마지막 임금 이비신은 측근 이쉬비에라에게 속아 권력을 잃었고, 이후 수메르 제국의 주도권은 이신과 라르사에게 넘어갔습니다. 신수메르 시대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혼합시대로, 수메르어의 부상이 있었지만 아카드 시대에서부터 신수메르 시대까지 지속되는 동안 일상어는 아카드어, 문어는 수메르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문화적 황금기로서 폭팔적인 문서 활동이 있었으며 출판된 것만 4만여점이나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기원전 2천년대 전반기 

- 고대근동의 역사적 전개 -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과 히타이트 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 가 개념은 2000 B.C 년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고 아시리아' 또는 상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리는 최초의 영토 국가가 탄생하였습니다. 2000 B.C 년경 ~ 1800 B.C 년경 즉, 우르 제3왕조 말에서 고(古) 바빌로니아까지의 기간 동안, 아카드어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발전했고, 아카드어의 아시리아 방언으로 된 초기 문서들은 북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단, 수메르어는 여전히 문학과 법률 문서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아카드어 문헌과 비문의 비중이 증가했습니다. 이 시대는 뚜렷한 지배국없이 다수의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패턴을 보입니다. 몇몇 도시국가들은 크고 강력한 실체로 나타났습니다. 아무르족의 왕조가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아무르족의 국가인 아가데(Agade)와 우르 제3왕조의 군대와 노동력의 현시에서 그들의 지속적 지배력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2000-1800년 동안 남 메소포타미아는 정치적 변화의 시기였지만, 우르 제3왕조의 몇몇 유산은 다른 국가들과 이신(Isin)에서 계승되었습니다. 예를들어 메소포타미아의 관리들은 스스로를 “이쉬비에라(Ishbi-Erra)”로 칭했으며, 이는 우르 제3왕조부터 이어지는 전통입니다. 이 ‘이쉬비에라’들은 이념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우르, 우루크, 니푸르에 대한 통제력과 걸프 해안으로 가는 길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르 제3왕조의 잔당들은 이신의 요새화된 도시에서 그곳의 관리인 이쉬비에라에 의해 붙잡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신 왕조는 우르 제3왕조의 양식을 모방하고 우르-남무 법전과 유사한 형태의 법전을 공포했습니다. 이전 왕조에 대한 일종의 존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신의 왕들은 자신들이 아끼는 우르(Ur), 니푸르(Nippur), 에리두(Eridu), 우루크(Uruk), 이신(Isin) 등 이념적으로 중요한 주요 도시들을 재건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신의 왕, 이스메-다간(Ishme- Dagan)의 통치에서 새로운 칭호를 도입하여 이념을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신은 남쪽의 경쟁국인 라르사(Larsa) 왕조가 이신에게서 독립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라르사 (Larsa)가 이신을 탈퇴한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관개수로와 물에 관련된 문제가 요인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라르사 왕조는 이신의 걸프만 교통로와 운하를 우회하여 이신의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추후, 이신은 라르사 왕국의 마지막 왕인 림신(Rim-Sin)(1822 B.C - 1763 B.C)의 시대에서야 통합되었습니다. 라르사 왕조는 중간에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신이디남(Sin-iddinam)(1849 B.C - 1843 B.C)의 역사글 본문에서 보여지는데, 라르사는 1866 B.C, 사무엘(Sumu-el)의 재위기간에 침공을 당합니다. 묘사에 따르면 라르사의 신민들은 왕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매우 곤경에 쳐했습니다. 이때, 수메르의 태양신인 우투 (Utu)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이디남의 아버지인 누르아다드(Nur-Adad)(1865 B.C - 1850 B.C)를 왕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누르아다드와 신이디남의 통치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으며, 이는 라르사에 누르아다드에 의해 인상적인 궁전이 건설된 것에서 확인됩니다. 또, 라르사는 마리(Mari)의 후기 텍스트에서 라르사 도시국가의 통치자이자 10~15개의 다른 도시들의 연합의 수장으로서 라르사의 위대한 림신(Rim-Sin)(1822 B.C - 1763 B.C)이 묘사됩니다. 기원전 19세기 중반의 혼란은 아마도 단일한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 우루크는 우르크의 왕이자, 아무르 부족의 왕인 싱카시드(Sinkashid)의 시대에 라르사 치하에서 독립했습니다. 우루크의 새로운 통치자는 왕조를 세우고, 바빌론의 통치자들과 결혼하여 동맹을 만듦으로써, 안전한 왕권을 형성했습니다. 디얄라(Diyala) 계곡 지역의 에쉬눈나(Eshnunna)도 이 시기에 세력을 확장했고, 1830 B.C 년경에 짧은 전성기를 경험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아시리아의 신 ‘앗슈르’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들을 숭배되었습니다. 이는 이 지역이 상업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앗슈르는 새의 모양을 한 신으로 묘사되는 존재로 숭배되었고, 이 지역의 자연적 요지는 상업이 발전하도록 하였습니다. 도시 앗슈르는 국제 중계무역을 통해 엘람의 주석과 바빌론의 직물 등을 수입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에 수출하였습니다. 앗슈르의 아시리아는 물류의 중심지이자 환적 거점 역할을 하여 무역을 중시하는 나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앗슈르는 상업과 아나톨리아의 개척 식민지로 유명했습니다. 국제무역을 통해 엘람 주석과 바빌로니아 직물을 수입해 아나톨리아 반도로 수출했습니다. 예를들어서 이집트가 놋그릇을 만들기 위해 주석을 구한다면, 앗슈르는 엘람에서 주석을 수입하여 이집트에게 판매했습니다. 아시리아 상인은 진출한 지역에 지역 사무소 또는 여성 상업 대리인을 배정하고 활동했습니다. 상업구역 카룸(Karum)은 케네쉬(Kanesh)와 하투샤(Hattusha)에 설치되어 아시리아에 상업 식민지를 만들었고, 나중에 하투샤는 히타이트(Hittites)의 수도가 됩니다. 앗슈르에는 문자가 있었지만 히타이트에는 본래 문자가 없었습니다. 히타이트어는 상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가서 가르쳐주었으며, 이는 기원전 1800년 정도에 문서가 2만여점 발견된 것에서 확인됩니다. 아시리아 또한 다른 메소포타미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즉위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특정 사건을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였습니다. 림무(limmu) 연호룰 사용하여 해마다 귀족들이 제비를 뽑아 연호를 정했습니다. 이는 아시리아는 상인의 나라였으며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지 못하고 귀족과 상인들의 견제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앗슈르는 다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전쟁보다는 상업적인 특징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샴쉬-아다드 1세 (Šamši-Adad I)는 상 메소포타미아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우르 3왕조 이후 에쉬눈나(Esnunna)의 나람-신(Narām-Sīn)을 피해 바빌론으로 도망쳤으며 역경을 딛고 기원전 1808년 앗슈르의 임금으로 등극하였습니다. 상부 메소포타미아는 후기 아시리아의 시대에 중앙집권 체제가 강화되었습니다. 림무의 연호는 폐지되고, 귀족을 약화시키고, 상인의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상인의 감독관"이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샴쉬-아다드 1세 이후 영역국가의 유지는 실패합니다.

이 시대에 바빌론의 함무라피와 마리는 동맹을 맺고 앗슈르 및 아순다와 경쟁했습니다.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아카드는 전쟁, 앗슈르는 상업,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종교로 특징지어집니다. 전반적으로 이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시대와 지역은 최초의 영토 국가와 국가 개념의 탄생을 목격했으며 상업은 지역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상 메소포타미아 왕국 즉 아시리아는 상업적 제국으로 부상했고, 서로 다른 지역 간의 동맹과 경쟁이 그 시대를 특징이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다양한 문화와 왕국으로 유명한 지역이었으며 그 중 하나가 아무르인(Amurr)이었습니다. 아무르족은 기원전 2000년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르족이 통치하던 바빌론은 정치적 패권을 확립하고 라르사, 에쉬눈나, 앗슈르, 마리 등의 경쟁자를 제거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다만, 바빌로니아 제국의 이전 기간의 자료 부족으로 구체적인 바빌론 제1왕조의 부상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때문에, 바빌론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존합니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는 나중에 모든 아무르의 통치자가 된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함무라피였습니다. 그는 아무르인으로, 기원전 1792년에 혼란의 시대를 통일한 바빌로니아의 왕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보다 더 강한 왕을 따랐으나, 철치부심하여 라르사(Larsa)의 림신(Rim-Sin)을 무찌르고, 이신, 우루크, 우르, 니푸르 및 기타 남부 메소포타미아 도시를 정복했습니다. 함무라피의 통치는 지역 사원의 경제 활동을 사유화하고 통제하려는 그의 시도로 특징지어집니다. 이 시대의 사원은 다양한 직업을 제공했으며 샹구(šangû)로 알려진 신전행정책임자(Tempelverwalter)는 사제라고 불렸습니다. 즉 이 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사제란 신전의 행정책임자였습니다. 함무라피는 신전에 의한 직접고용이 아니라 상인들을 통한 간접 고용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러한 사원의 일자리구조 변화는 경제적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바빌론은 그의 통치의 중심이었고, 그는 토지 개간과 관개 계획을 통해 왕의 영지를 확장했습니다. 왕실은 외국 무역에서 큰 역할을 했지만, 민간 상인들도 상업에 서 절반 정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그의 통치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사회 구조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분야가 주어진 관리들과 왕실 하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토지의 처분에 대한 엄격한 규제와 제한이 있었습니다. 함무라피는 자주 채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목적의 활동으로 추측됩니다. 이 시대의 사회구조에서 농민들은 농산물이나 은으로 연간 세금을 지불했고, 왕실은 그들에게 소, 농기구, 관개를 위한 물을 공급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대한 함무라피의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1800 B.C 년경 그의 통치 기간에 기록된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전인 함무라피 법전의 제정이었습니다. 이 법전은 엘람(Elam) 지역에서 1901년 프랑스인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법과 권력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이 법전은 함무라피가 신으로부터 정의로운 왕과 정복자로서의 역할의 상징을 받는 장면을 그림을 통해 보여줍니다. 법은 그가 30번째 재위 후 정복한 지역과 도시를 포용하는 것으로 함무라피의 왕국을 묘사하는 찬송가 스타일로 쓰여져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함무라피 법전의 많은 법들이 결혼과 상속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결혼식은 신랑-신부 가족 간의 선물 교환, 신전 제물 조공, 잔치, 제사 목욕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함무라피 법전은 권력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작성된 세부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정의와 공정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법전의 내용과 맥락이 일치하지 않아 실제 법전이 아니라 포고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Kuhrt 1, p.111-115에 따르면, 법전에 표현된 법들이 함무라피의 왕실 이데올로기의 선포만을 목적으로 했을수도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왕이 그의 법적 권위의 원천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착취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 실용적인 법전이었다고 주장됩니다. 함무라피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 전반에 걸쳐 엇갈린 평가를 받았으며 동시대의 군주는 그를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경제와 법률에 대한 그의 공헌은 부인할 수 없으며 그의 통치는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고대 히타이트 왕국은 기원전 17세기부터 기원전 12세기까지 존재했습니다. 이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의 상호 작용, 내부 분쟁,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의 발전으로 특징지어집니다. 히타이트는 아카드 글자로 그들의 언어를 썼던 인도- 유럽어족(Indo-European)의 사람들이었으며, 이는 수메르-아카드 언어의 영향이 퍼졌음을 시사합니다. 기원전 17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낫타 텍스트(Anitta Text)가 발견되기 때문에, 이때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가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에는 쿠사라 왕조의 피타나 임금과 그의 아들 아닛타 임금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핫투쉴리 1세(Hattushli I) 및 무루쉴리 1세(Murushli I)와 같은 히타이트 왕은 자신을 강력한 위대한 왕에 비유하였습니다. 핫투쉴리 1세는 쿠샤라 가문의 후예로 자처하며 스스로를 사르곤에 비유했습니다. 무투쉴리 1세는 핫투쉴리 1세 말년의 혼란 속에서 등극하였습니다. 그는 알레포와 바빌론을 함락하였으나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함락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바빌론을 통치하지 않고 핫투샤로 귀국하여 매부 한틸리(Hantili)에게 암살됩니다. 히타이트의 지속적인 남하는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외교가 히타이트의 남하를 막는 것이 중심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국은 계승 과정에서 내분과 혼란을 겪었고 왕국의 세력이 축소되고 암흑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한틸리 1세 이후 암살과 내분으로 히타이트 왕실은 혼란스러워 집니다. 귀족 평의회인 판쿠 (Panku)의 결성으로 히타이트는 다시 귀족중심적 체계로 회귀합니다. 또 이 시대의 신흥 강국들은 히타이트에게 파괴되었으며, 히타이트 스스로는 내분으로 축소되면서 기록이 희미해지는 기록의 암흑시대가 등장합니다. 구 히타이트 왕국의 이야기는 아나톨리아 반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의 역사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셈족과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히타이트는 인도-유럽인이 었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피타나(Pitana)왕과 아낫타 (Anitta)왕의 글이 적힌 점토판인 아낫타 텍스트(Anitta Text)는 기원전 1700년경 역사의 시 작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약하자면, 메소포타미아의 히타이트 고왕국 시대는 강력한 왕국의 발전, 군사적 확장, 주변 지역과의 외교 관계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계승의 내분과 혼란으로 특징 지어졌으며 이로 인해 왕국의 범위가 축소되고 암흑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히타이트 고대 왕국의 역사적 사건은 이 지역의 역사와 다른 문명의 역사와의 연결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1] 주원준,『인류최초의 문명과 이스라엘, 고대근동 3천 년』, 2022,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 ANETーK、Pritchard James B、The Ancient Near East ー Anthology of Texts and Pictures 、Princeton University Press、2011。

[3] 주원준、박태식、박현도、『신학의 식탁』、들녘、2020。

[4] 주원준、「 ‘폭풍신’이 아니라 ‘풍우신’이다 ー Storm God의 번역어와 특징」、『종교신학연구』11호(성공회대학교 신학연구소 2018)p .149-186。 

[5] Kuhrt, The Ancient Near East – c.1200 BC - c.330 BC, Vol. I~II (New York 1995, reprinted in 2000)

[6] Kuhrt, The Ancient Near East – c.3000 BC . 1200 BC, Vol. I~II (New York 1995, reprinted in 2000)

[7] 고대근동의 종교(Ancient Near Eastern Religions)(REL3006) 2023년도 1학기 수업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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