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가능조건은 무엇인가 - 예술, 죽음, 노동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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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아름답고 긍정적이게 만들 수 있는 가능조건은 무엇인가 

예술, 죽음, 노동을 중심으로 -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아니다”라고 한다. 사르트르의 책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면 인간은 자신이 지금 어떤 것인가에 대해 책임이 있다.1) 따라서 본인은 모든 인간은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책임지기 때문에, 그 선택에 의해 결정된 자신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美)와 예술을 중심으로

미학은 18세기 중엽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의 『미학』(1750) 출간 이후 미적경험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는 지성적 인식과 감성적 인식의 구분을 따르면서도, 이 감성적 인식을 미의 인식과 동일시한다. 아직 미에 대한 인식은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칸트의 『판단력비판』(1790) 이후 미적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해석해낸다. 칸트에 따르면, 미(美)를 판정하는 취미판단은 주관적이므로 논증하거나 반박이 불가능하면서도, 취미판단이 다를 때 논쟁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율배반이 발생한다. 이 이율배반은 판단의 종류에 의해 해결된다. 판단은 이미 일반화 가능한 원리가 있을 때 특수를 포섭하는 규정적 판단과 보편이 아직 없음에도 특수를 보편으로 찾아내는 반성적 판단이 있다. 따라서 예술은 보편적 판단이 가능한 네러티브이며, 아름다움은 미의 보편적 규칙이 이미 존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술적 천재에 의해 예술에 규칙이 부여되어 보편적으로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미가 탄생하는 것이다. 동시에 미는 객관적일 정도의 보편성은 없지만, 사람들의 타당성에 대한 요구에 응해야 한다. 때문에 취미판단은 필연적으로 공통감의 이념을 갖출 수밖에 없되, 인식 일반을 목표로 자유롭게 유동하는 감정이다.

이 미의 개념이 오성(悟性)의 영역에서 이성(理性)의 영역으로 적용될 때 느끼는 감정이 숭고함이다. 어떤 대상이 단적으로 크거나 단적으로 위대한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질 때, 오성을 초월해 한정된 것 너머의 무한정의 것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이성에 의한 무한의 이념적 현시를 통해 인간은 숭고함을 경험한다.2) 미적체험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며, 인간을 아름다움에 민감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을 미(美) 속에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든다.

영혼과 죽음을 중심으로

인간은 영혼과 신체가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가톨릭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형상으로서 육체와 합일된 지성적 실체이다. 그는 지성적 실체는 자립하는 존재이고, 이것이 육체와 영혼의 합성체와 그것의 형상이 동일하지는 않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은 동등하게 합성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영혼의 지성적 실체는 독립성을 가지기 때문에, 육체보다 영혼의 우위가 보장된다.3) 뇌가 인격체의 구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함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사람에게 있는 개성과 인격, 성질과 행동은 영혼과 육체의 전체성에 관련되는 것이며, ‘마음이 아프다’라는 정신만에 대한 개별적인 표현이 기능하며, 개성, 인격과 같은 정신적 실체를 독립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은 영혼의 우위를 담보한 육체와 영혼의 합성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죽음 또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브리타니카 대사전에 따르면, 생명의 부재, 유기적 생명체가 급격하고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 기능이 정지되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사람은 몸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 초월적이고 신비한 경험도, 영혼에 관한 생각도 몸이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결국 죽음은 ‘몸의 부재’를 의미한다.4)

인간의 삶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과정이며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탄생과 죽음의 과정 사이에서 인간은 영혼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하여 정신적 실체의 독자성을 확고히하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은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으며 이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죽음이 두려운 것은 본인의 정신적 실체의 독자성을 확고히 세우지 못하였을 경우 뿐이어야 한다. 실존주의자에게 실존은 본질에 앞서며 인생은 본인의 정의와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인생에서 목표된 의미와 의무를 수행하였다면 더 이상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며 인생의 마지막 ‘고비’로 간주될 따름이다.

탄생과 삶, 죽음으로 이어지는 순탄한 과정이야말로 사람의 아름다움이고 인간의 좋음이다. 그러나 현대의 연명치료와 같은 방식은 하나의 사람이 인생을 완결짓는 이야기를 순탄히 끝맺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살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마지막에 본인 스스로 삶을 결정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자살에 대한 현대적 경향을 대표하는 브란트(R. Brandt)의 의견이 나와 같다. 브란트는 공리주의자이면서도 자살하지 않아야 할 일응의(prima facie) 의무가 있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자살의 가치와 반가치를 비교형량하는 이른바 대차대조표식의 자살(balance sheet suicide) 개념을 옹호하며 자살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더라도 개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5) 생명은 중요하지만 자연법의 최상위에 있는 불가역의 규칙이 아니다. 인간이 실존하기 때문에 겪는 모든 이야기를 겪은 이상, 본인의 존재에 대한 마지막 결정은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인생은 결국 마지막을 통해서 아름답게 평가될 것이다.

노동을 중심으로

칼 맑스(Karl Marx, 1818-1883)에 따르면 인간의 노동자연적 재료에 인간의 욕망에 적합한 형식을 부여하는 가공행위이다. 노동은 자연을 인간의 가공에 의해 객체화하는 과정이 다. 이에 대해 맑스는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우리 자신과 외부세계를 지배하는 데 있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자유는 노동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다.6) 자연법칙 하에서 자유는 불가하지만, 인간의 노동과 기여를 통해 인간의 목적과 욕망에 맞춰 자연은 가공됨으로써 자유는 성취된다. 그러므로 본인은 노동이 사람이 가지는 의무라고 본다. 노동하지 않을 권리는 존재할 수 있으나, 그 노동을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다. 노동이라는 의무에 참가하는 삶이 옳고 좋은 삶의 형태임을 주장한다.


1)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8, pp.33-36.

2) 철학적인간학 21.11.29.월 수업 참고.

3) 박승찬, 「인격개념의 근원에 대한 탐구 ᅳ 그리스도교 신학과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중심으로」, 『인간연구』, 2007, pp.79-85.

4) 철학적인간학 21.12.06.월 수업 참고

5) J. Donnelly, “Suicide: Right and Wrong”, New York: Prometheus, 1998, pp.7-31. 

6) 철학적인간학 21.11.15.월 수업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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