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代近東] 크레타(Crete, Caphtor)의 미노스 왕정下 힉소스 필리스티아인 과 도리스인

크레타(Crete, Caphtor)의 미노스 왕정下 힉소스 필리스티아인과 도리스인

 : 블레셋인들의 원고향은 캅토르가 아니라 필리스티아인가?

II. 캅토르(크레타) 섬에 살던 민족은 힉소스인이다
III. 다나오스 왕조가 쫓겨났던 아르고스 왕조와 같은 民族임을 밝힌다
IV. 기원전 1176년 이전의 필리스티아인
V. 맺음말

I. 머릿말

  『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에 따르면, 라메세스(Ramesses) 3세 8년(BC1176)에 이집트에 바다의 민족들이 침입했다(메르네프타Merneptah 시대에도 침입했다). 그 파라오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 동맹은 Prst(Peleset, 펠레세트)와 Tkr(체케르), Šklš(셰클레쉬), Dnn(데니엔), Wšš(우셰쉬)였다”.1) 여기서 펠레세트(Peleset)가 중요하다. 먼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집트 상형문자는 L, R의 구분이 없다. 때문에, 블레셋, 필리스티아. 팔레스타인. 펠레세트 모두 Prst와 같은 말이다. 

정론(正論)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중요한 5도시 중에 하나인 해안 도시 ‘가자’에 살던 사람들의 원고향은 캅토르(크레타, Caphtor) 섬이다.2)3)4)5) 그러나 「창세기」에도 ‘아브라함’이 활동하던 시대, 이미 블레셋 왕이 기록되어 있다. 즉, 캅토르(크레타)에서 힉소스가 와서 머물며 ‘블레셋인’이 된게 아니라, 이미 팔레스타인 땅에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 시대부터 블레셋 왕이 존재했던 것이다. 후대, ‘모세’의 출애굽 시대에도 블레셋인이 살고 있었다.

“불레셋 왕(멜레크 펠리쉬팀) 아비 멜렉은 …” (「창세기」 26:8-9)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에레츠 펠리쉬팀)을 지나는 길이 …“ (「탈출기」 13:17) 

팔레스타인인들이 기원전 1176년 이전, '아브라함' 때에도, '이사악' 때에도, '모세의 출애굽' 때에도 언급되고 있다.6) 팔레스타인은 옛날시대에도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에레츠 펠리쉬팀)7)으로 기록되어 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오흥식)라는 논문은 고대 그리스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다나오스 이전 아르고스 왕들이 힉소스였을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다.8)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그 점에서 다르다. 아르고스 왕조는 힉소스가 맞으나, 그 이전의 왕조도 힉소스인지를 확언할 수는 없다. 테크타모스 왕조의 피지배민은 힉소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래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주요한 왕조가 힉소스일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비교하고자 한다.


II. 캅토르(크레타) 섬에 살던 민족은 힉소스인이다

  그렇다면, 캅토르에 살았던 이들의 민족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크레타에 힉소스 도래를 보여주는 문헌증거를 살펴보자. 기원전 1세기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청동기 시대 크레타 섬의 역사를 5시기로 구분한다. (1)에테오크레타인들(Ἐτεόκρητες, 토착 크레타인), (2)펠라스고이인들(Πελασγοὶ), (3)도로스의 아들 테크타모스(Tectamus)의 지휘 하의 도리스인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도리스인들의 대다수는 올림포스 주변에서 모여 살았다. (4)다양한 종류의 바르바로이들(μιγάδων βαρβάρων, 다만 그들은 원주민 그리스인들의 언어를 채용했다. ex: ‘미노스’와 ‘라다만티스’), (5)귀국한 헤라클레스 왕가,
‘아르고스인’들과 ‘라케다이몬인’들은 다른 섬들에 식민단을 보내어 식민화하였고, 마찬가지로 크레타를 점유하였다. 

(디오도로스, 5.80.1-3)를 참고한 도표는 다음과 같다.

<표1. 문헌 증거: 힉소스와 펠라스고이>

디오도로스(5.80.1-3)에 따른, 크레타에 거주한 민족들

1

2

3

4

5

크레타로
이주한 민족들

에테오크레타인

펠라스고이인

테크타모스
(+ 본토의 펠라스고이인)

1506
미노스
1세의 통합

헤라클레스
가문의 귀국

시기

토착크레타인

전성기 시대의 힉소스, BCE 1700-1530?

미노스가 왕이 되기 두 세대 전

축출된 힉소스, 
BCE 1510/11-1120

BCE 1120

from: 오흥식, 「필리스티아인들의 원고향」, 『서양고대사연구』 51 (한국서양고대역사문학회, 2018), p.41.

확실한 연도인 기원전 1120년 헤라클레스 가문의 귀환부터 계산해보자. 시대구분표를 따를 때, 에우로파의 아들 미노스 1세는 기원전 1450년경(또는 1506년) 크레타 섬을 통합했다. 즉, 기원전 1510/11년 다나오스-카드모스 도래 이후에 미노스 1세는 섬을 통합했다. 에우로파는 카드모스의 여동생으로 같은 시대 인물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에우로파를 황소로 변한 제우스가 납치해갔고, 카드모스는 그의 여동생 에우로파를 찾으러 그리스로 이주한다. 제우스로 서술되지만, 사실은 크레타의 왕인 아스테리오스는 에우로파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데 그가 바로 미노스 1세이다. 그리고, 크레타 왕 아스테리오스의 아버지가 바로 테크타모스이다.9)10) 에우로페가 기원전1530년경 인물이므로, 테크타모스는 기원전 16세기 전반의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다. 3번째 시대인 테크타모스(Tectamus) 바로 이전 시대가 펠라스고이(Πελασγοὶ)의 시대이다. 

  언어학 및 고고학 증거 또한 이런 연대와 일치한다. 캅토르(크레타)에서 기원전1800~1450년 사용한 문자는 선형문자A이다. 이 문자로 쓰인 인명에선 아직 Greece식 언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또 선형문자A는 셈어적 특징과 속성이 많이 남아있다. 정설(正説)과 다르게, 테크타모스 이전의 펠라스고이인과 이집트에서 축출된 다나오스-카드모스系 이주민들은 모두 힉소스인들이라는 가설을 들어보자.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힉소스가 테크타모스의 기원전 16세기 이전에 이미 캅토르(크레타)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수리의 머리를 지닌 사자(獅子)인 그리핀은 크레타 섬 도기연대 MMIII에 도입되었다. 그리핀은 힉소스 왕권의 상징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경에서 하느님의 옥좌를 지키는 동물 kerûb-cherub(케룹)과 그리스어 gryps-grypos(그리핀)는 동일한 자음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그리핀의 인도유럽어 어원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펠라스고이가 비헬라스계 언어를 사용한다는 헤로도토스(1.57)의 기록도 있다. 아르고스 계보의 “아피스”는 이집트어로 황소를 의미한다. 이는 아르고스 이전의 크레타 왕조가 힉소스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기원전 18세기 말 크레타에 나타난 날개 달린 스핑크스는 힉소스에 연결된다. 크레타에서 도기 연대 MMIII(1700-1600)가 시작하는 기원전 1700년경 모든 왕궁이 파괴되고 급속히 재건축되었고, 그 시기에 검과 전차가 크레타에 도입되었는데, 두 무기는 힉소스의 주무기였다.11)

(사진1. 아르고스 왕조 계보도)
from: 오흥식,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 『서양고대사연구』 27(2010), p.235.

  다시 기록을 살펴보면, (4)시대에 도래한 다나오스-카드모스系 이주민들과 (2)시대의 펠라스고이인들은 각각 (4)힉소스 축출기(BCE 1532~1528; 아모세22년~아모세18년)의 이주자들과 (2)이집트 점령기의 힉소스(BCE  1663~1555; 이집트의 제15왕조 및 제16왕조) 이주자들을 의미한다.

"테크타모스는 아이올리아인들 및 펠라스고이인들과 함께 크레타로 항해하였고, 그 섬의 왕이 되었고, 크레테우스의 딸과 결혼하여 아스테리오스를 낳았다. 아스테리오스가 크레타의 왕이었을 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제우스가 페니키아로부터 에우로파를 황소의 등에 태우고는 바다를 가로질러 크테타로 데려와서는 동침하여 세 아들인 미노스, 라다만티스, 사르페돈을 낳았다." (디오도로스 4.60.2)

(디오도로스 4.60.2)에서 “테크타모스가 이끈 펠라스고이”라는 표현을 보면 힉소스系 다나오스 도래 이전에 이미 그리스 본토에 힉소스가 거주하였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50명의 딸을 둔 다나오스는 아르고스에 이르자 이나코스의 도시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는, 그때까지 펠라스고이라고 불린 모든 사람에게 다나오이(Δαναοί)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법령을 그리스(헬라스) 전역에 선포했다." (스트라본, 5.2.4)

(스트라본, 5.2.4)을 참고하면, 다나오스는 펠라스고이라고 불리던 모든 이들을 ‘다나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즉, 이집트까지 점령하던 전성기의 힉소스(1700~1530?)를 ‘펠라스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고, 다나오스 휘하의 펠라스고이(힉소스)를은 ‘다나오이’라고 개칭된다. 

바다의 민족 침입 당시 “아카이와샤(Akaiwasha)”라고 이집트가 표현한 이들은, 30년 뒤에 처들어올 때는 “데니엔(Denyen)”이라고 표현된다. 그 이유는 본래 침입자들은 ‘아르고스’ 출신의 그리스인이었으나, 30년 뒤에는 “다나오이”로 개칭하였기 때문이다.


III. 다나오스 왕조가 쫓겨났던 아르고스 왕조와 같은 民族임을 밝힌다

  트로이 전쟁(1218-1209)에 참전했던 '아르고스'에서 온 그리스인 다나오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육로로 터키 남쪽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킬리키아의 말로스에 나라를 세우고 한동안 그곳에 정주하다가 다시 이동하여 시리아, 페니키아에 이르렀다. 이들이 1176년 Prst와 함께 이집트를 침입한 Dnn이며 격퇴된 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중의 하나인 Dan 지파로서 원고향에 정주하였던 것이다.12) '다나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본래 펠라스고이라고 불리던 이들이었고, 힉소스인들은 여기서 <표 1. 문헌 증거: 힉소스와 펠라스고이>(2)시대의 펠라스고이인이었다. 펠라스고이의 정체는 아르고스 왕들의 출신을 고려할때, 힉소스일 가능성이 높다.

"이 섬(레스보스 섬)에 여러 차례의 이주가 있었던 이래로 고대에 많은 민족들이 거주하였다. 그 섬에 아직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때, 그 섬을 장악한 첫 민족은 펠라스고이인들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장악하였다. 트리오파스(아르고스의 펠라스고이인들의 왕)의 아들 크산토스는 리키아의 일부를 장악하였고, 처음에는 그곳을 거처로 삼고는 그와 동행한 펠라스고이인들의 왕이 되었다." (디오도로스 v.81.1-2)

(디오도로스 v.81.1-2)는 레스보스 섬으로 트리오파스의 아들 크산토스가 거느리고 온 자들을 펠라스고이인들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크산토스의 형제인 아게노르의 자손이 바로 기원전 1510/11년 아르고스에 도래한 다나오스였다.

  계보의 이해를 위해 해석해야할 중요한 인물은 바로 '이오'이다. 헤로도토스는 이오의 아버지를 '이나코스'로 보고 있다.13) 그러나 아폴로도로스는 이오의 아버지를 '이나코스' 혹은 '이아오스'로 기록하고 있다.14) 파우사이스는 이오의 아버지를 '이아오스'로 기술했다가 다음엔 '이나코스'로 바꾸어 기술하고 있다.15)16) 그런데 다음의 글을 보면, 아폴로도로스가 이오의 아버지를 '이아소스'로 확신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한편 니오베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그녀는 제우스가 살을 섞은 최초의 여인이었다) 아들 아르고스를 낳았고, 『아쿠실라오스』에 따르면 아들 펠라스고스도 낳았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을 따 펠로폰네소스 주민들은 펠라스고이족이라 불렸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펠라스고스는 땅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폴로도로스, ii.1.1) 

'제우스와 살을 섞은 최초의 여인'이 니오베라면 이오는 '이나코스'의 딸이 아니다(<사진 1>이오가 제우스와 사이에서 에파포스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오의 아버지가 '이아소스'라는 것은 아래의 이집트 자료를 비교하게 되면 좀 더 명확해진다.

"그곳(=이집트)에서 본래 모습을 되찾은 그녀는 나일 강변에서 아들 에파포스를 낳았다. 헤라는 쿠레테스들을 시켜 아이들 빼돌렸다. 그러자 제우스가 그것을 알고 쿠레테스들을 죽였다. 한편 이오는 아이를 찾아 나섰다. 그녀는 온 시리아 땅을 헤맸다. 비블로스의 왕의 아내가 그곳에서 자기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에파포스를 찾은 뒤 그녀는 이집트로 돌아가 당시 이집트인들의 왕인 텔레고노스와 결혼했다." (아폴로도로스, ii.1.3)

이나코스의 딸 이오는 (파우사나아스, iii.18.13)에서 신벌을 받아 암소로 변했으나, 이집트에 도착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방랑끝에 그녀는 제우스와 낳은 아들 에파포스를 되찾고, 이집트 왕과 결혼하게 된다. 아폴로도로스(기원전 2세기)는 이오의 후손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에파포스(Ἔπαφος)는 이집트인들의 왕이 되자 나일의 딸 멤피스와 결혼했다. 그는 도시를 세우고는 그녀의 이름에서 따와 멤피스라고 불렀다. 그는 또 딸 리비에를 낳는데 리비에 땅은 그녀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리비에는 포세이돈에 의해 쌍둥이 아들 아게노르와 벨로스를 낳았다. 아게노르는 포이니케로 가서 그곳 왕이 되어 큰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나중에 할 것이다. 그러나 벨로스는 이집트에 남아 그곳 왕이 되어 나일의 딸 앙키노에와 결혼한다. 그에게는 쌍둥이 아들 아이깁토스다나오스가 태어났다. (아폴로도로스, ii.1.4)

상기의 인용문을 근거로 정리한 족보가 <사진 1>의 족보이다. 이오와 그 후손들의 족보는 <사진 1>에서 ①이 아니라 ②에 위치하여야 한다. 이오는 '이나코스'의 딸이 아니라, '이아소스'의 딸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오의 후손 에파포스는 이집트의 힉소스 왕 아포피스(Apophis)와 그 이름이 대단히 비슷하다. 기원전 3세기 전반 이집트 사제로서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명을 받아 그리스어로 이집트 통사를 쓴 마네토는 힉소스 파라오 아페피(Apepi)를 그리스어로 "Афофис(Aphophis)로 표기하고 있다(마네토 Fr. 43). 마틴 버낼(Martin Bernal, 1937-2013)은 '장 베라르'와 '마이클 애스터'의 글을 근거로 삼아 에파포스(Epaphus)는 바로 아포피스(Apophis)라고 말하고 있다.17)18) 기원전 1000년 이전에 힉소스 파라오의 이름 아페피(Apepi)가 이집트어의 기원전 1000년경 모음변화 a>o의 영향을 겪었던 데다가 차용과정에서 발생한 왜곡을 감안한다면, 발음의 유사성을 인정할 수 있다.19)


IV. 기원전 1176년 이전의 필리스티아인

  BCE 2000년경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살았으나, ‘야곱’ 때 기근이 들면서 이집트 땅에 입주(入住)하고, ‘모세’ 때 다시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올라갔다. 다만, 여기서 모세의 출애굽 시기에는 다양한 異説이 있다. 첫째 BCE 13세기설(「출애굽기」 1:8-11), 둘째 BCE 1446년설(「열왕기 상」 6:12), 셋째 BCE 1540년설(「사도행전」 13:17-21)이다. 그 중 세번째 BCE 1540년 가설을 기반으로 서술한다. (「창세기」 26:8-9)를 참고할때, 아브라함때부터 힉소스는 팔레스티나에 존재했다. ‘캅토르’에서 온 필리스티아인들은 사실 원래의 고향으로 복귀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아모스」의 구절은 이를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듯이(헤엘레티) 필리스티아인들도 캅토르에서, 아람도 키르에서 데리고 올라오지 않았느냐?” (가톨릭 성경, 「아모스」 9:7) 

여기서 ‘헤엘레티’는 ‘알라’의 히필 완료형이다. ‘알라’의 기본적 의미는 “올라가다, 오르다”이다. 『구약성경』 「70인 역」에서 이 구절의 헤엘레티는 ἀνήγαγον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의 원형 ἀνάγω는 “lead up from a lower place to a higher”와 “bring back”을 의미로 가진다.20)

이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헤엘레티’는 “되돌아오게 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신이 이스라엘인들을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으로 ‘되돌아오게 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모스」 9:7)의 3가지 경우는 모두 “처음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을 의미하여, 필리스티아인들이 캅토르(크레타 섬)으로 "나갔다고 들어왔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뿐만아니라, 『Cambridge Ancient History 2.2』는 어원적으로 Peleset(필리스티아인들)를 Pelasgoi와 동일시하였다.21)

구약 성경은 (1)기원전 1176년 이전, 아브라함의 때에도, (2)출애굽의 시기에도, (3)15세기 초 여호수아의 때에도, (4)14세기 판관 삼가르의 때에도, (5)1200년경에도 필리스티아인들의 존재를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힉소스 전성기(BCE 1700?-)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필리스티아인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일부는 필리스티아에 여전히 살고있었고, 결국 바다의 민족시기(BCE 1210-1100)에 돌아온 힉소스인이 기존의 필리스티아인과 합류한 것이다. 그리스의 펠라스고이는 서부 셈족인 힉소스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인(도리스족)이 아니었고, 펠라스고이와 힉소스 모두 서부 셈족이었다.


V. 맺음말

  정리하자면, 아르고스의 후손이자 이아소스의 딸 이오는 이집트에 가서 파라오와 결혼하여 힉소스 파라오들 중에 제일 막강한 에파포스 파라오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후대 이집트에서 축출된 힉소스 카드모스의 여동생 에우로파가 펠라스고이의 지도자와 결혼한 것은 에우로파가 힉소스였기 때문이다(황소로 변한 제우스가 납치하였다는 표현은 신화적 표현이다). 신화적으론 제우스와 니오베의 후손이 펠라스고이이며, 그들의 후손이므로 펠라스고이라고 할 수 있다. <표 1. 문헌 증거: 힉소스와 펠라스고이>(3)시기의 테크타모스에게 통치되던 민족은 펠라스고이였고, 테크타모스 이전 사람들을 펠라스고이라고 칭한다. 때문에 테크타모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는 팔레스고이와 똑같은 힉소스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필리스티아인들의 원고향」(오흥식)에서 나오베와 몸을 섞은 제우스를 "축출된 힉소스"로 보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22) 제우스는 본래 도리스족의 주신이며,23) 제우스의 후손이자, 제우스와 사이에서 에파포스를 낳았다고 표현되는 이오가 암소의 상징성을 가진 것을 무시해선 안된다. 마찬가지로, 카드모스의 여동생 에우로파와 결혼한 것은 도리스족 아스테리오스였고, 에우로파를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데려온 것은 황소 상징성을 취한 도리스족 주신 제우스였다. 다만, 에우로파 신화에서 제우스는 "헤라의 질투가 두려워 헤르메스를 따돌릴 심산으로 헤르메스 몰래 소로 둔갑하여 몸을 숨겼다"고 한다.24) 이는 최고신다운 행동이 아니고, 정말로 헤라의 질투가 두려웠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는 그 시대(BCE 1500년경)의 헤르메스 상징성을 거부하던 시대적 배경을 표현하던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갖는다. 

수메르 초기왕조시대 소의 뿔(牛角)을 가진 신, 엔릴(Enlil)은 Nippur의 주제신이었다. Lagash의 Eannatum(기원전 25세기경)는 그의 비명에 "나는 엔릴에게 지명된 왕"이라고 기록했고, 우르 제3왕조의 왕, Lugal-Zage-Si(기원전 23세기경)는 천공신 안(An)을 엔릴(Enlil)의 아버지로 삼아 그의 도시 Uruk의 지위를 높였다. 아시리아 문헌 『아트라하시스 신화』는 엔릴(Enlil)을 신들의 지도자로 묘사한다.25)26) 후세 바빌로니아 신화의 주신, Marduk은 “모든 인류에 대한 Enlil의 기능”을 계승 받았고, 기원전 1698년에 폭풍신이자 전사인 En-lil의 역할을 그가 넘겨받고 바빌로니아 중앙의 Nippur에 있는 Ekur 신전에서 예배받았다.27) Marduk의 영수는 Mušḫuššu로 뱀의 머리와 꼬리, 사자(獅子)의 상반신, 독수리의 하반신을 가졌다. 즉 뱀의 머리를 상징으로 삼았다. 마르두크의 아버지는 에아(Ea; Akkad語)이며, 즉 엔키(Enki)였다. 정리하면, Marduk는 Enlil의 기능을 받았으나, 父系는 Enki로 수메르의 상징성을 융합한 존재였다. 수메르族의 우르를 무너트린 바빌로니아는 아무르(Amur)인을 자칭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르(Amur)인을 지배한 타민족이었다. 소의 뿔(牛角) 상징성은 빼앗기어 힉소스 페니키아(Phoenicians)인들에게 전해졌고, 바알(Baal)과 유대교 십계명 이전의 우상숭배가 그 흔적이다. 그래서 내 견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28)29) 

서양학계는 펠라스고이인이라는 민족이 그리스 토착인 중 가장 인구가 많던 민족이라는 견해가 다수이다. 스터빙스(Stubbings)는 다나오스(BCE 1510/11)를 최초로 그리스에 도래한 힉소스인으로 생각하므로, 펠라스고이는 토착인이다. 마틴 버낼(Martin Bernal)은 다나오스를 BCE 1510/11년이 아니라, BCE 1700년대에 처음으로 도래한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펠라스고이를 그리스 토착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페니키아계 힉소스의 도리스족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바로 상징성의 일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30) <표 1. 문헌 증거: 힉소스와 펠라스고이>(2)시대의 펠라스고이인은 힉소스인이 맞으나, 그들의 상징과 도리스족의 상징성은 일치하였고, 때문에 종종 햇갈리는 신화적 묘사가 포함된 것이다. 

다나오스 이전 시대의 펠라스고이(팔레스타인)와 그리스 본토 일부는 힉소스의 수중에 있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팔레스타인 땅에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살았던 것을 고려할 때, 그들은 캅토르에 왔다가 ‘바다의 민족들의 이동기(BCE 1210-1100)'에 원고향인 필리스티아로 돌아갔다. 즉, 힉소스 전성기 시대(BCE 1700-1530)에 힉소스의 일원으로 필리스티아인들의 ‘일부’가 캅토르(크레타)로 갔던 것이다. 블레셋인 즉 필리스티아인들은 어쩌면 바빌로니아인(Babylonian)이었다. 크레타 섬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필리스티아-펠라스고이인들이었다. 



[각주]

1) "그들은 자신들의 섬에서 외국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 한꺼번에 온 나라가 동요하더니 제각각 전쟁에 휩싸였다. 하티(중앙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코데(킬리키아), 카 르케미시(유프라테스 상류), 아르자와, 알라시아(키프로스), 그 어느 국가도 그들의 무기 앞에 버텨낼 수 없었다. 그 국가들은 고립되었고, 아무르(시리아)에 하나의 진 지가 세워졌다. ... 그들 동맹은 Prst(Peleset, 펠레세트)와 T̠kr(체케르), Šklš(셰클레 쉬), Dnn(데니엔), Wšš(우셰쉬)였다." 오흥식, 「필리스티아인들의 원고향」, 『서양고대사연구』 51 (한국서양고대역사문학회, 2018), pp.35-36.
2) "대다수는 오늘날 유다라고 불리는 곳으로 물러났는데, 그곳은 이집트로부터 멀지 않으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그 식민지는 모세라는 사람에 의해 지도되었다." (디오도로스, 40.3.2).
3) "필리스티아인들을 모두 멸하고 티로와 시돈의 원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마저 모두 쓸어버릴 그날이 왔기 때문이다. 정녕 주님께서는 캅토르 섬의 남은 자들(캅토르 섬에서 온 패잔병들)인 필리스티아인들을 전멸시키시리라." (「예레미 야」 47:4).
4) "이집트(함의 아들)는 루드인, 아남인,.. 뒤에 필리스티아족이 나온 카슬루인, 캅토르 인을 낳았다." (「역대기 상」 1:11-12).
5) "가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마을에 살던 아와인들도 마찬가지다. 캅토르에서 온 캅토르인들이 그들을 멸망시키고 그들 대신 살게 되었다." (「신명기」 2:23).
6) 김성, 「블레셋 민족의 기원과 바다 민족」, 지중해지역연구 제7권 제1호 (??, 2005), pp. 4-5.
7) "하느님께서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에레츠 펠리쉬팀)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 데도,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이집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지.’ 하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탈출기」 13:17).
8) 오흥식,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 『서양고대사연구』 27(2010), p.233.
9) "지금부터 일천 [***]년 전, 아테네에서는 판디온이 왕이었을 때, 미노스 1세(Mίνο ς πρ[ότερος])는 [크레타의 왕이 되어] 아폴로니아에 정착하였고, 이다 산의 다크 틸로스들 중에서 켈미스와 [담나메네우스]는 이다에서 철을 발견하였다." (「파로스 연대기」 11번째 사건).
10) 여기서 말하는 판디온은 에렉토니오스의 아들 판디온 1세를 말한다. 「파로스 연대기」에 따르면, 이집트로 부터 쫓겨난 다나오스가 기원전 1511년 에렉토니오스의 치세에 그리스의 아르고스에 도래하여 왕이 되었고, 미노스 1세는 아렉토니오스의 아들 판디온 1세 치세에, 곧 다나오스가 도래한지 한 세대 후에 크레타를 통합하고 왕이 되었다.
11) 오흥식, 「필리스티아인들의 원고향」, 『서양고대사연구』 51 (한국서양고대역사문학회, 2018), pp.39-40.
12) Martin Bernal, 『Black Athena Vol. II』 (1991), pp.517-522. ... "Albright, on the other hand, believed that the name Danuna referred to in the Amarna letter was the same as the Dene/Denyen Sea People and the Danaoi." … "... Egyptian words dni and ṯni, and possibly the Semitic dyn, led to the naming of an eponym Danaos".
13) "한번은 페니키아인들이 아르고스에 도착해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도착한 지 5일째 아니면 6일째 되어 그들이 물건을 거의 다 팔았을 때, 많은 여인들과 함께 공주가 해변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이나코스의 딸 이오였는데, 헬라스인들도 그녀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여인들 대부분은 도망쳤지만, 이오는 몇몇 여인들과 함께 사로잡혔다. 그러자 페니키아인들은 여인들을 배에 태우고 이집트로 출항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 i,1,1).
14) "아르고스와 아소포스의 딸 이스메네에게 아들 이아소스가 태어났는데 그가 이오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연대기」 작가 카스토르와 많은 비극 작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오는 이나코스의 딸이라고 한다. 그리고 헤시오도스와 아쿠실라오스에 따르면 이오는 폐이렌의 딸이라고 한다. 제우스는 혜라의 여사제로 있던 이오를 유혹하다가…" (아폴로도로스 ii.1.3).
15) "포로네우스의 손자인 아르고스는 포로네우스를 계승하여 왕좌에 올라 그 이름을 따서 그 땅을 명명하였다. 아르고스는 페이라소스와 포르바스를, 포르바스는 트리오파스를, 트리오파스는 아이소스와 아게노르를 낳았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든 그밖의 그리스인들의 기록에 따르든, 이아소스의 딸 이오는 이집트로 갔다. 이아소스 이후 아게노르의 아들 크로토포스가 왕좌에 올라 아들 스테넬라스를 낳았으나 다나오스가 스테넬라스의 아들 겔라노르에 대항해 이집트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는 아게노르의 자손들의 왕국 계승권을 정지시켰다. 뒤이은 일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다나오스의 딸들이 그들의 사촌에 대해 저지른 범죄라든가, 다나오스가 죽자 어떻게 링케우스가 왕위를 이었는가에 관한 이야기들 말이다" (파우사니아스, ii.16.1).
16) "해라가 이미 암소가 된 이나코스의 딸 이오를 응시하고 있고, 아테나 여신은 자신을 뒤쫓는 해파이스토스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파우사나아스, iii.18.13).
17) Martin Bernal, 『Black Athena: Volume I』 (Rutgers University Press, 2020), p.92.
18) 오흥식,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 『서양고대사연구』 27(2010), pp.245-246.
19) 오흥식, 「스파르타 왕가의 힉소스적 기원」, 『서양고대사연구』 16(2005), pp.51-52.
20) The Liddell, Scott, Jones Ancient Greek Lexicon (LSJ), <https://lsj.gr/wiki/Main_Page>(02:58).
21) W. F. Albright, 「Chapter XXXIII: Syria, the Philistines and Phoenicia」,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2, Part 2: The Middle East and the Aegean Region, c.1380-1000 BC』 3r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ISBN 0521086914,9780521086912, pp.512-513.
22) 오흥식, 「필리스티아인들의 원고향」, 『서양고대사연구』 51 (한국서양고대역사문학회, 2018), p.43.
23) 원준호, 「에우로페(Europe) 신화와 고대 그리스에서의 유럽 개념의 전개」, 『정치사상연구』 8 (한국정치사상학회, 2003), pp.47-68.
24) G. Schwab, 『Die u hourenSagendesl asishe Metum』 (Bindlach:Gondrom, 2001), pp.32-37; 토마스 불핀치, 김선영 옮김, 『그리스로마신화』 (서울:민중출판사, 2002), pp.73-79.
25) 【고대근동의종교】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하늘신' 모티프의 照校: 고대근동의 역사・신화・종교적 맥락 탐구, <Blogspot>, 2023-06-2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6/blog-post_25.html>(06:43).
26) F.R.맥컬리 지음, 주원준 옮김, 『고대 신화와 성서의 믿음 -성서가 수용한 고대근동 신화』, (서강대 수도자 대학원, 1997) 참고.
27) 月の象徴性について, <Blogspot>, 2023-09-0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9/blog-post_51.html>(06:24)
28) [#古代近東] 新石器時代の古代近東| BC30cのメソポタミア。, <Blogspot>, 2023-09-0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9/bc30c.html>(06:26)
29) 신비 풀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포괄적인 안내서 - 고대근동세계(ANE) 의 이해 레포트 자료 -, <Blogspot>, 2023-05-10,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5/ane.html>(06:28)
30) "No doubt, in their commercial dealings, the Phoenicians spread valuable germs of civilization, but rather as a bird dropping grain than a husbandman sowing seed. they never civilized and assimilated to themselves the nations with which they came into contact." Theodor Mommsen, 『Mommsen's History of Rome』, p.116.

.

[참고자료]


1. Martin Bernal, 『Black Athena: The Afroasiatic Roots of Classical Civilization Volume I: The Fabrication of Ancient Greece』 (Rutgers University Press, 2020).
2. Martin Bernal, 『Black Athena: The Afroasiatic Roots of Classical Civilization, vol. II: The Archaeological and Documentary Evidence』 (Rutgers University Press, 1991).
3. Theodor Mommsen, 『Mommsen's History of Rome』, (1854).
3. W. F. Albright, 「Chapter XXXIII: Syria, the Philistines and Phoenicia」,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ume 2, Part 2: The Middle East and the Aegean Region, c.1380-1000 BC』 3r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ISBN 0521086914,9780521086912.
4. G. Schwab, 『Die u hourenSagendesl asishe Metum』 (Bindlach:Gondrom, 2001).
F.R.맥컬리 지음, 주원준 옮김, 『고대 신화와 성서의 믿음 -성서가 수용한 고대근동 신화』, (서강대 수도자 대학원, 1997).
5. 김성, 「블레셋 민족의 기원과 바다 민족」, 지중해지역연구 제7권 제1호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2005).
6. 오흥식, 「다나오스 이전의 아르고스 왕조와 힉소스」, 『서양고대사연구』 27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10).
7. 오흥식, 「스파르타 왕가의 힉소스적 기원」, 『서양고대사연구』 16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05).
8.오흥식, 「필리스티아인들의 원고향」, 『서양고대사연구』 51 (한국서양고대역사문학회, 2018).
9. 원준호, 「에우로페(Europe) 신화와 고대 그리스에서의 유럽 개념의 전개」, 『정치사상연구』 8 (한국정치사상학회, 2003).

[인터넷 자료]
1. LOGOS(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문 검색 사이트)에서 참고한 원전 자료들.
2. 【고대근동의종교】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하늘신' 모티프의 照校: 고대근동의 역사・신화・종교적 맥락 탐구, <Blogspot>, 2023-06-2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6/blog-post_25.html>(06:43).
3. 月の象徴性について, <Blogspot>, 2023-09-0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9/blog-post_51.html>(06:24)
4. [#古代近東] 新石器時代の古代近東| BC30cのメソポタミア。, <Blogspot>, 2023-09-0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9/bc30c.html>(06:26)
5. 신비 풀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포괄적인 안내서 - 고대근동세계(ANE) 의 이해 레포트 자료 -, <Blogspot>, 2023-05-10,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5/ane.html>(06:28)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