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오월 사자성어와 그 역사 / [#동양사] 선비족 탁발씨 / [#동양사] 흰 무지개 / [#역사] 고대시대 민족들의 숭배 상징 / [#잡기] 신년인사

[#동양사] 오월 사자성어와 그 역사 / [#동양사] 선비족 탁발씨 / [#동양사] 흰 무지개 / [#역사] 고대시대 민족들의 숭배 상징 / [#잡기] 신년인사 


[#동양사] 오월 사자성어와 그 역사

「견원지간」이란 개와 원숭이의 관계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선 보통 사이가 나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견원은 문자 그대로 개와 원숭이를 의미하는가? 중국사에서 개는 견융을 의미하며, 원숭이는 하나라의 우를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이 월족과 융족을 조롱하는 의미를 지닌다.

멀리 떨어진 견융족과 월족은 사이가 나빴다. 그런데 사실 월나라는 그시대의 거의 모든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월나라에 주목해보자. 난 월나라의 실패 원인은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든 것에 있다고 본다. 월나라가 타국들을 믿지 못한 원인은 무엇인가?

월나라는 스스로를 하나라의 후손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라와 관계없는 민족들도 스스로를 하나라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중국인들의 역사조작이 고대에도 발생한 것이다. 월나라는 1대-11대-12대-33대의 역사만을 추적할 수 있었고, 하나라의 후계자인 월나라도 하나라 역사는 부분적 전설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기』에서는 하나라의 역사를 초기부터 멸망까지 완벽하게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하나라의 가짜 역사를 중국인들이 창작했고, 그 조작을 월나라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추정 근거로 수천년의 시간차가 있는 하나라의 멸망과정과 상나라의 멸망과정은 정확히 똑같게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서 '상나라의 건국자'로 기록된 탕은 갑골문 유물에서는 '상나라의 중흥군주'로 기록되어 있어, 역사의 왜곡을 확인할 수 있다.

「오월동주」이란 오나라인과 월나라인이 같은 배에 탄다는 의미이다. 중국에선 원수지간임에도 불구하고 동료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럼 왜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지간이었나?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①『죽서기년』에는 하후소강의 아들이 회계에 봉해지자 머리를 깍고 문신 하여 교룡이 해치는 것을 피했다.

②『사기』 주본기에는 주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주공단보의 장자인 오태백이 왕위를 포기하고 형만으로 달아나 문신단발하였다.

①은 왜에게 하나라가 이주한 것을 의미하고, ②는 월에게 희성 오씨의 이주를 의미한다. ①과 ②의 이야기 전개는 정확히 똑같은데, 그것은 ②가 ①을 모방하여 창작된 가짜 이야기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즉 월나라인 입장에선 오나라는 역사서를 조작하면서 이주해오는 역겨운 희성 이족 집단이었다. (초기 희성은 이족이 아니지만, 서술되는 시대의 희성은 이족에게 침투되어 대다수가 이족이다). (사건 이후) ①을 참고하면, 왜는 왜+하이고, ②를 참고하면, 월은 월+이이다. 하휴는 『춘추공양전』 주해에서 월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어월이라 부르는 반면 중원은 越이라고 한다. 결국 중국인들은 역겹게도 스스로를 월나라 민족이라고 자칭하고, 본래 월나라인은 도망치게 된다.

그래서 월나라는 오나라를 점령하고, 제나라의 해안까지 점령했다. 타국들이 오나라 멸망을 묵인한 것도 이런 월나라의 불만 축척을 이해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한편 오씨는 희성을 주장했는데, 희성 이족이 월나라 전설을 채용한 것인지, 현지인이 이족을 모방하여 희성을 주장한 것인지는 확실치 못하다.

월왕 구천의 신하 범려는 숙청되기 전에, 「토사구팽」이란 표현을 남기고 도망친다. 사냥개가 사냥에 끝나면 개를 끓여 먹는다는 의미이다. 그럼 범려는 스스로를 ‘개’로 칭한 것인데, 범씨는 그 조상이 제요이므로 이족에 해당한다. 범려는 도망치는 순간까지도 일상적으로 조작을 남기고 떠났다. 애시당초, 내가 조사해본바 개를 먹는 문화에서도 사냥이 끝난 개를 끓여먹지는 않는다.

중국사학계는 일반적으로 범려를 등용한 이후, 월나라가 전성기였고, 범려가 도망친 후 월나라가 쇠퇴기라고 서술한다. 그런데 범려를 등용한 기간은 월나라 역사의 매우 짧은 시기뿐이며, 오히려 범려를 내쫓고 오나라와 제나라 남부까지 점령한 시기가 중국인들이 말하지 않는 월나라의 진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왜 중국사학계는 왜 범려와 월나라의 전성기를 관련 짓는가? 여기서 중국사에서 전개되는 전형적 양태를 확인 가능한데, 진나라 2대 황제 호해가 이사를 찢여죽인 것도, 월왕 구천이 범려를 숙청한 것도 모두 군주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평가한다. 즉, 중국계 민족이 이민족 왕에게 숙청된다면 그 왕을 암군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중국인들이 주장하는 왕조의 전성기는 ‘중국계 이족 집단’을 수용했을 때 뿐이다. 즉, 중국계 역사가들은 암묵적으로 중국인의 이민을 수용하는 것이 옳다는 기스라이팅을 하는 것이다.

중국사의 실상은 인구 다수집단인 중국계 민족들이 여러 국가를 이주하면서, 그 나라의 왕조와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역사서를 조작하는 역사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겨운 행동으로 인하여 추방당하거나 제거당하면 그 국가의 역사에 대해 악평을 작성하던 것이다. 월왕 구천이 범려를 숙청한 것은 중국인들이 평가하듯 우둔한 판단이 아니라, 매우 당연하고 올바른 판단이었다.

오늘날의 베트남은 월나라의 후예를 자칭한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다.

『춘추공양전』은 중국도 越로 삼는 역사서 조작을 보여주는데, 그래서 월나라인이라고 표현되더라도 가짜 월나라인인 중국인도 포함된다. 결정적으로 베트남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는 흰닭의 상징성을 중국에서온 월나라 민족이 정복한 것으로 신화를 서술한다. 문제점은 본래 흰닭 상징성이 중국화되기 전의 월족의 상징성이란 점이다. (다른 자료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

역사서의 신뢰성도 문제이다. 『대월사기전서』는 당나라 시대 이후에 작성되었는데, 그 전에 작성된 사료는 어떤 민족집단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한국의 『삼국사기』도 당나라 시대 이후에 작성되었고 그 전에 작성된 사료는 누군가에게 모두 제거되었다. 당나라계 이주자 이태조가 『대월사기전서』에 포함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믿을만하지만, 완전히 신뢰가능하지는 않다.

원숭이가 하나라의 상징인가? 문제점은 중국을 제외한 지역에선 거의 등장하지 않는 기록이란 점이다. 인도 신화의 하누만은 연결점이 전혀 없고, 하나라 기록이 중국인들에게 크게 조작된 역사를 고려하면, 원숭이의 상징성은 “중국인들이 생각한 월나라의 상징”이지 “초기의 월나라인 스스로” 생각한 상징성은 아닌 것 같다.

이전 [#동양사]글에서 보았듯 한나라의 성공 이후, 한족들이 만드는 국가의 국명은 대게 속이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5호16국 시대의 전개로 잠시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용도로 국명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수당 제국의 등장으로 그것도 끝난다.

조씨가 위를 자칭한 것도 조작이고, 유씨가 촉을 자칭한 것도 조작이고, 손씨가 오를 자칭한 것도 조작이었다. 애당초 손씨는 기존 권세가인 오씨 가문에게도 결혼을 거부받던 삼국지 시대에도 새로운 이주자 집단이었다.

참고로, 신라인들은 황룡사9층 목탑을 건설할때, 각 층마다 외부민족들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9개의 외부민족을 9한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중국인들의 9이를 모방한 것이다. 중국인들이 이를 외부민족이라고 조작하였듯이, 신라왕조도 한을 외부민족으로 조작하는 프로파간다 기술을 배운 것이다. 중요한건 이들 중에서 ‘오월’ 층이 존재한다. 즉 1000년이 넘게 흘러서 신라후기에는 오나라 민족과 월나라 민족이 구분되지 않았다.


[#잡기] 

새롭게 글을 작성했는데 이건 올리지를 못하겠네.

공개 가능한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고 글쓰는 사람들은 정말로 복받은 사람들이지. 메인스트림 이론을 벗어나거나 권력에게 불리하다면 진실을 쓰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한계인가? 그럼 진실을 그대로 전달 가능한 인공지능의 사회가 새로운 희망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올바른 미래일까?

생각해보면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회는 오히려 도덕을 판단하는 사람이 없을때 비로소 더 올바른 사회가 가능한게 아닐지 의심이 드네.


[#동양사] 선비족 탁발씨

탁발씨는 선비의 한 갈래이다. 선비족 중 가장 북방에 위치했던 부족이었다. <북사>에는 그들이 황제현원씨의 후손이다 라고 되어 있다. 이는 탁발씨가 중원에 들어와서 자리잡은 후 한화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사>에 "황제는 흙의 덕으로 왕이 되었다. 북방에서 속어로 흙을 탁(拓)이라 한다. 후손을 발(跋)이라 한다. 그리하여 탁발을 성씨로 살았다" 이것은 탁발씨의 유래에 대한 공식적인 유래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한족과 혈족관계를 나타내기 위하여 스스로 그럴듯하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다른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모친인 호액씨가 침대에서 이불의 가운데에서 낳았다. 그리하여 이를 성씨로 삼았다" 즉 꿈속에서 이불속에서 낳았으므로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또 원래 선비어로 '이불'을 "독발"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동양사] 흰 무지개의 동양사회에서의 상징 이해

백홍(白虹), 흰 무지개. 중국인들은 무지개를 나쁜 징조라 생각했고, 이는 오행의 흰색이 죽음과 이어지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조선에서도 하얀 무지개는 불길하다고 여겼는데, 이것은 조선의 전통이 중국인에서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백홍관일(白虹貫日)은 나라의 재앙을 알리는 경고로 인식되었습니다.

예를들어, 부제학 이사균(李思鈞)은, 흰 무지개[白虹]는 음기(陰氣)인데 감히 태양을 범하여 겨울철에 나타났으니 큰 변고가 된다고 말하였습니다(『중종실록』 14년 11월 29일).

사학(四學) 유생 박태두(朴泰斗)등은 송시열(宋時烈)을 벌준 것에 대하여 변론하는 상소문을 작성할때, 그 내용에는 당시 일어났던 백홍관일이 하늘이 왕에게 경고하여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해석하였습니다(『숙종실록』 1년 1월 16일).


[#역사] 고대시대 민족들의 숭배 상징

고대시대 민족들이 그들의 숭배 대상으로 선택한 동물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었을까?

유전학의 발달로 이젠 각 가축들이 어느 지역에서 최초로 가축화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예를들어, 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최초로 가축화되었으며, 개는 중국 북동부에서 최초로 가축화되었다고 하네요.

역사적 기록을 추적하면, 대체로 고대 민족들은 그들이 가축화하거나 가축화하려 노력한 동물을 상징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잡기] 신년인사

오늘은

구력정월(旧暦正月)

물병자리(水瓶座)♒️의 신월

갑진년(甲辰年)으로 푸른 용🐉의 해가 밝았습니다.

신력이 아닌 구력(旧暦) 기준으로는 드디어 새해가 밝았네요.✨ 이번 해에는 많은 성취와 성공이 있기를 바랍니다🙏



: 위 내용은 제가 작성한 제 스레드(Thread) 게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작권 조항을 철저히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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