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나에게 밥이다" 까치 이현세 작가 / 이중섭 ‘황소’·‘흰소’…모습 드러낸 이건희 컬렉션

 만화책에 얼굴을 파묻고 낄낄거리고, 신문 속 만평을 보며 속이 후련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만화산업은 책을 넘어 캐릭터 산업, 인터넷 속으로 들어와 있다. 딱딱한 책보다 작은 웃음이 필요할 것 같은 가을. 노컷V는 만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을 만나 작가의 삶과 만화산업 이야기를 나눠봤다.

글 싣는 순서

1. 만화책은 죽지 않았다…'까치' 이현세 작가
2. 만화 캐릭터 산업의 거장…'둘리' 김수정 작가
3. 해학과 풍자의 미학…'수타만평' 권범철 작가
4. 이젠 웹툰이 대세…'미생' 윤태호 작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현세(56)씨는 함박웃음으로 인터뷰를 온 손님을 맞아 주었다. 이현세(李顯世, 1954년 9월 19일 ~ )는 대한민국의 만화가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양간공(襄簡公) 이서장(李恕長)의 후손이다. 월남전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1979년 만화가로 정식 데뷔한 그는 이제 30년차 작가다.

‘까치’ 캐릭터와 함께 1982년 발표한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한국 만화계의 한 획을 그으며 인기 만화가로 우뚝 선 이현세 작가. 대학 강의를 병행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만화를 그릴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현세 작가에게 그의 만화 이야기와 한국 만화산업 현주소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이현세 작가와 일문일답.

- 본격적으로 만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 미대를 목표로 살아왔는데, 대학 진학 때 내가 적록색약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미대 진학이 좌절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렸을 때 양자로 입양된 사실까지 알게 돼 깊은 방황이 함께 왔다. 결국 가장 좋아했던 만화계로 도망치듯 뛰어들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21살 때였다.

- 문하생 시절은 어떠했나?

▲ 서울·경기지역에 있는 모든 만화작가 화실을 찾아 다녔는데 어느 하나도 받아주질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태도가 불량했던 것 같다. 반항적인 성격과 거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를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색약이라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가졌으니. 그러다 들어간 곳이 나하나 선생님 화실이었다. 순정만화를 그리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첫 만화를 순정만화로 시작했다. 다음엔 개그만화를 하는 하영조 선생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고, 그 뒤에는 아는 선배와 본격적으로 내 만화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 까치가 탄생한 배경은?

▲ 다른 작가들과 달리 난 ‘어떤 만화를 그릴까’ 보다, ‘어떤 캐릭터를 그릴까’를 더 많이 고민했다. 이현세만이 가질 수 있는 캐릭터를 그리고 싶은데 나 자신만큼 잘 아는 캐릭터는 없었다. 아웃사이더지만 순수한 열정,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 그래서 내가 가장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을 ‘까치’란 가상 인물에게 줬다. 또한 세속적인 열정과 명예, 승부욕에 집착하는 또 다른 내 모습을 ‘마동탁’에게 넘겼다. 결국, 이현세의 모습을 까치와 마동탁을 통해 표현하게 된 것이다.

- ‘공포의 외인구단’은 왜 야구만화였나?

▲ 당시에는 군인들이 정권을 잡던 시기였기에 만화 심의와 검열이 말도 안 되게 심해서 갈등요소를 증폭시키는 시나리오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갈등을 최대한 이야기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썼는데 야구가 적격이었다. 던지는 투수와 치는 타자가 떨어져 있으니 심의를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 대다수 만화가 야구만화였던 것. 나 역시 그랬다.

- 청소년 음란물 시비로 ‘천국의 신화’ 재판이 유명한데?

▲ 당시 검사들은 내가 그리는 만화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했다. 신화의 입장에서 보면 동물과 인간의 결혼은 충격적인 소재가 아니었다. 단군 신화만 봐도 그렇지 않나? 그리고 원시시대 삶은 당연히 야만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작가가 어떤 시각으로 표현 했는가 인데, 마치 이것을 현시대의 입장으로만 해석해서 원초적인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수간으로 매도하고 폭력적인 만화로만 해석한 것이다.

- 힘든 재판을 끝까지 밀고 간 이유는?

▲ 6년이란 긴 재판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끝까지 밀고 간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만화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나는 만화예술가로 당당히 작품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작가의 자존심을 걸고 당당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만화란 장르를 두고 터무니없는 심의와 검열에 대해 더는 굽힐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대표작가로 인식되는 이현세가 이걸 이겨내지 못한다면 다른 후배들에겐 말할 것도 없었기에 끝까지 재판을 밀고나갔다.

두 번째는 독자들과 약속이었다. 어렸을 때 이유도 모르고 만화가 중단되면 굉장히 화가 났다. 다들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 만화를 사는 모든 독자들에게 반드시 책을 끝내겠다는 강한 책임감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천국의 신화를 끝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 한국 만화책 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는데?

▲ 시작은 일본 만화시장의 개방이었다. 일본의 가장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이 한국에서 천대시 하는 분야로 빠르게 들어온 것이었다. 당연히 경쟁력이 없었기에 일본 만화가 급속히 퍼졌다. 게다가 국가가 IT란 산업을 밀어붙이면서 만화가 저작권이 보호되지 않는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하지만 마치 찬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물이 천천히 데워지고 있었지만,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였다. 산업과 세대와 함께 만화 문화가 변하는 시기였으니까.

- 만화책 산업에 다시 활력을 넣을 방법은?

▲ 당분간 웹툰의 강세가 이어질 것 같다. 장점이 워낙 많은 산업이니까. 만화책을 그리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힘든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로운 차원의 만화산업을 모색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장르의 길을 만들 수 있으니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 ‘삼국지’도 그 연장선에 있다. 삼국지는 예전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이 부모님세대로 넘어간 것에 맞춰 교육적 요소를 크게 부각시켰다. 또한 출판될 책이 기존의 웹툰 방식처럼 별도의 편집 작업 없이 모바일과 태블릿에 쉽게 이식될 수 있는 책을 그리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만화를 그릴 것인가에 대한 큰 기점이 될 듯하다.

- 마지막 질문. 이현세에게 만화란?

▲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 우리가 매일 밥을 먹어도 질리지 않듯, 나에게 만화는 매일 그려도 질리지 않는 밥이다.

From: "만화는 나에게 밥이다" 까치 이현세 작가, <노컷뉴스>, <https://m.nocutnews.co.kr/news/amp/4283612>, 2012-10-05 15:27.



이중섭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는 1950년대작 <황소>.

저 유명한 소 그림들이 나라의 품으로 들어왔다. 붉은 화면 속에서 검은 눈망울을 번득거리며 입을 벌린 <황소>와 눈동자 없는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간신히 발걸음을 내딛는 <흰소>.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민 화가’로 등극한 이중섭(1916~1956)이 60여년 전 삶의 나락에서 몸부림치며 그린 두 걸작이다.

이중섭이 1953~54년 그린 <흰소>.

지난달 28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사실이 공식 발표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942~2020)의 수집 미술품들(이하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규모와 수준 면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이중섭의 그림들이었다. 이건희 컬렉션의 한국 근대미술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대표작으로 꼽히는 1955년 개인전 출품 그림 <황소>와 1970년대 출판물에 소개된 뒤로 오랫동안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희귀 작품 <흰소>, 전쟁 피난민들이 눈발을 맞으며 새와 물고기 등과 어우러진 <바닷가의 추억―피난민과 첫눈>(1950년대) 같은 회화 명작이 19점이나 된다. 뜨거운 가족애가 와닿는 작가 특유의 엽서그림 43점과 전쟁 기간에 담뱃갑 은박지에 못 등으로 그린 은지화 27점까지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7일 서울 소격동 서울관에서 윤범모 관장과 김준기 학예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언론설명회를 열어 삼성가 유족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작품 1488점(1226건)의 세부 내역을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내역을 보면, 기증 컬렉션은 나혜석,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백남순,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김환기 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의 작품 1369점과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등 외국 근대작가 8명 작품 119점으로 이뤄져 있다. 이중섭의 작품들은 모두 104점. 단일 작가로는 평생 산을 그린 화가 유영국(187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분량이다. 기증작품 대부분이 작가의 필력을 입증하는 양질의 수작급들이어서 이중섭 대표작이 별로 없었던 국립현대미술관은 단숨에 국내 최고 수준의 이중섭 컬렉션을 확보하게 됐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이번 기증품만으로도 별도의 이중섭 미술관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미술관 쪽은 내년 3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작품 실물들을 소개하는 연속 기획전의 마지막 3부로 ‘이중섭 특별전’을 따로 개최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미술관 쪽이 내보인 기증 작품 목록에는 주로 책이나 논문의 도판으로만 봤던 한국 근대기 대가들의 희귀한 작품들도 적지 않다. 한국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이 1922년 25살에 그린 청록산수대작 <무릉도원도>를 비롯해 이중섭의 오산고보 스승이었던 유학파 화가 백남순이 1937년 그린 대작 <낙원>, 나혜석의 몇 안 되는 진품 그림 <화녕전작약>, 작품이 4점밖에 남아있지 않은 김종태의 1929년작 유화 <사내아이>, 일제강점기 근대조각사의 선구적 작품인 윤효중의 목조각 <물동이를 인 여인> 등이 눈길을 끈다. 널리 알려진 근대 대가들의 대표작들이 다수 들어왔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중섭의 명작들 외에 박수근의 대작 <절구질하는 여인>과 <농악>, 장욱진의 1937년작 <공기놀이>와 1950년대 수작 <소녀/나룻배>, 김기창의 1955년 대작 <군마도>, 권진규의 조각상, 유영국의 1960년대 전성기의 <산> 연작,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와 푸른빛 전면점화인 73년작 <산울림 19-II-73#307> 등이 기증작품 목록에 올랐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김환기의 두 대작이다. 가로 길이만 5m를 넘는 <여인들과 항아리>는 김환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1980년 이후 40년만에 실물이 드러났다. 전면점화는 그의 추상화풍을 상징하는 핵심 연작인데도 국가미술관이 그동안 단 한점도 소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증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일반 애호가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서양 거장의 작품들이 처음 국립미술관 소장품이 되면서 상설 전시로 만나볼 수 있게 됐다는 점도 주목된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를 필두로 폴 고갱의 초기 풍경화,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마르크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 시장> 등 회화 7점과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이 기증됐다고 미술관 쪽은 밝혔다. 근대작가는 아니지만 1980년대 이른바 ‘민중미술’로 불리운 진보 미술진영에서 활약한 리얼리즘 작가 신학철씨의 <한국현대사> 연작일부가 기증작품군에 포함된 것도 이건희 컬렉션의 방대한 수집 범위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증된 작품들 가운데는 회화류가 412점으로 가장 많다.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등으로 각 영역들을 고르게 안배했다.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이 320여점으로 전체 기증품의 약 22%를 차지한다. 작가의 출생 시기를 기준으로 잡으면 1930년 이전에 태어난 이른바 ‘근대작가’ 범주에 들어가는 작가 작품 수는 약 860점(58%)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작가별 작품 수를 보면, 유영국(187점)과 이중섭(104점)에 이어 유강열(68점), 장욱진(60점), 이응노(56점), 박수근(33점), 변관식(25점), 권진규(24점)의 순으로 나타났다.

역대 최대 규모인 삼성가의 기증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총량 1만점을 넘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특히 근대미술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명품들을 소장품으로 대거 확보해 컬렉션의 양과 질 측면에서 획기적인 도약을 이루게 됐다. 근대미술 전시 때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불문율처럼 작품 대여를 요청했던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미술관 쪽은 기증 작품들에 붙이는 공식 명칭을 ‘이건희 컬렉션’으로 확정하고 다양한 경로로 작품들을 관객에게 소개하겠다고 밝혔다. 덕수궁관에서 오는 7월 열리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서 일부 작품을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8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1부: 근대명품’(가제) 전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작품 40여 점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된다. 12월엔 ‘2부: 해외거장’ 전을, 내년 3월엔 ‘3부: 이중섭 특별전’을 열 계획이다.

미술관 쪽은 이와 별개로 올해 11월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회고전에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품들을 대거 선보이며, 내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컬렉션 일부를 출품할 예정이다. 과천관에서는 내년 4월과 9월 이건희 컬렉션과 미술관 아카이브가 결합된 기획전 ‘새로운 만남’을 잇따라 연다. 지역 미술관과 연계한 순회전도 계획 중이다. 이와 함께 미술관 쪽은 내년까지 기초학술조사를 벌여 ‘이건희 컬렉션’ 소장품 도록과 연구 논문 등을 발간하고 학술행사도 열 방침이다.

한편, 윤범모 관장은 기증품을 모아 전시하는 ‘이건희 특별관’ 건립 등을 검토하라고 문재인 대통령이 지시한 것과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내부 검토를 하고있다”고 전했다



From: 이중섭 ‘황소’·‘흰소’…모습 드러낸 이건희 컬렉션, <한겨례신문>,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994326.html?utm_source=copy&utm_medium=copy&utm_campaign=btn_share&utm_content=20240309>, 2021-05-08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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