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洋史] (+보충정보) 그리고, 고구려로 거짓의 유입 경로에 대해

 먼저,
前의 글, [#東洋史] Reminder) 최씨의 낙랑국 설화는 사실인가? & 최씨가 6성의 소벌도리의 후손이란 주장은 사실인가? 
에 대한 보충정보를 서술합니다 :

1. 신라기록에서 등장하는, 스스로를 "임나가라인"이라고 자칭한, '강수'라는 인물은 그 탄생일화에서 아이의 머리 모양이 마치 소의 뿔이 달린 것과 같으니, 길한 징조라고 주변에서 인식되었다고 하였다. 즉 적어도 그 시대의 신라지방에선 '소'의 상징성이 좋은 의미로 인지되었다.

2. 일본의 막부정권이 형성된 이후, 고려시대 조선반도에도 최씨의 '무신정권'이 형성된다. 비슷한 정치체계가 형성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일본과 고려 사이의 교류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3. 이리떼나 여우가 고구려의 성이나 백제의 성에 입성하는 기록은 상징적 의미의 표현들이다.
한국에서 표현되는 속어인 "여우가 울면 여우비가 내린다"는 표현에서 왜 '여우'와 '비가 내린다'의 표상이 연결되는지 추측할 수 있다. 비를 내리는 권능은 서구에선 보통 소뿔을 가진 신들이 가진다. 반면, 조선반도와 일본열도에선 용이나 뱀(이무기)가 비를 내리는 권능을 가진다. 보통 소와 뱀은 공존, 경쟁, 대립한다.

4. 신라의 역사가 기록된 것은 한자로 기록이 되면서부터 가능했다. 한자를 가져온 것이 삼국사기에서 '낙랑국'이라고 기록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그 가정에 따르면, '낙랑국'이라고 기록된 집단의 이주시기는 신라 건국에서 1~2세대 이후이므로 건국시의 역사까지도 한자로 기록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므로 미지가 해소된다.
그리고, 신라 건국 이전에도 조선반도의 역사는 존재했다. 예를들어, 조선반도 서남부의 유물자료로는 전쟁이 있던 고고학적 증거가 있으나, 그것은 너무 오래전의 사건이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東洋史] 고구려로 거짓의 유입 경로에 대해

먼저, 고구려의 불교전래 과정을 살펴본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에 북조의 전진(前秦)에서 '순도'라는 사람이 불교를 가져온다. 기록에 따르면, "2년 여름 6월에 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여기서 진은 저족(氐族)이 건국한 전진(前秦, 351~394)을 의미한다. 후진(後秦, 384~417)은 저족(氐族) 인근에 살던 강족(羌族)이 건국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였다. 392년 고국양왕의 조서에서는 "3월에 교서를 내려 불교를 숭상하여 믿고 복을 구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또, "2년(393) 가을 8월에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라고 하여 광개토왕은 393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참고로 해당 시대의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이며, 평양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초기에 수용한 불교는 "격의불교"였다. 이는 도교적 성향을 띄는 불교였으며 중국에서 창작한 가짜 경전인 "위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였다. 그 내용은 인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노자의 무위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것으로, 4세기 초의 무장-노장 사상이 활발했던 중국대륙의 상황의 영향을 받은 형태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해듣고서 제자들이 쓴 내용의 경전을 ‘진경’이라고 부르는 반면, ‘열반경’ ‘호국경’ ‘인왕경’ ‘호경’이라는 경전들은 중국에서 만든 가짜경전 ‘위경’이다.
고구려의 초기 불교 사상은 '인왕경’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국가에 봉헌하는 것을 장려하는 내용이다. 즉 불교가 정치적 목적에서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천개소문은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우대하였다. 고구려의 승려, 보덕은 본래 고구려에서 활동하였으나, 탄압에 의해 지금의 한국의 전주 지방으로 망명한다. 이 당시 고구려의 불교적 전설도 함께 이동한다. 신라의 유명한 승려인, 원효 & 의상은 신라에서 고구려로 잠입하여 바로 그 보덕 스님에게서 공부하고자 했었다. 
고구려는 왜 계속하여 '도교적 사상'에게 매료되었나? 그것은 내 전의 글(桂苑筆耕集을 바탕으로 한, 崔致遠의 在唐前後의 시대적 배경과 道教的 사고관 이해)에서 알 수 있듯, 도교 서술에서 등장하는 요소가 주로 조선반도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고 당연한데, 왜냐하면 도교 서적을 쓴 노자는 주나라의 글을 그대로 옮겨적었고, 그 주나라의 글은 강제(姜齊)가 협력하여 작성한 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대 조선반도인들은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고, 때문에 중국인의 노자를 숭배하고, 노자의 후손인 농서 이씨(隴西 李氏)를 동족으로 착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천개소문은 그 성씨의 유래에 대한 내 글(淵씨 또는 泉씨에 대한 짧은 분석)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의 본래 민족과 고구려가 속아서 수용한 중국민족은 그 유래가 달랐다. 결국, 그 오차에서 발생한 오류의 축척이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고구려의 중국 경전을 가르치는 학문기관인 '태학'의 학사로 이씨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경위로 조선반도에 속임을 통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추기로, 천개소문은 그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스스로를 천씨라고 주장했고, 연씨가 아닌가 의심했던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가장 타당한 정설은 천씨임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기록을 믿지않고 굳이 현대에 '연개소문'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현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신성시하는 이기백의 이론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읽으면 별다른 논리적 근거는 없고 그냥 "그러해야 할 것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현대에 천씨가 연씨가 된 것은, 그게 현대 한국 민족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광개토 즉위년 1년)의 기록, "百殘新羅舊是屬民有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 기록에서 "百殘□□新羅以爲臣民(백잔□□신라이위신민)"는 한때 百殘東夷新羅以爲臣民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夷에 해당하는 민족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충주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에서 "[大]太子共語向壂上, 共看, 節賜太[霍]鄒. 敎食在東夷寐錦之衣服建立處用者賜之, 隨恭諸▨▨奴客人▨.(대태자공어향전상, 공간, 즉양태곽추. 교식재동이매금지의복건립처용자양지, 수모제▨▨노객인▨."라고 하여 이미 충주 고구려비가 건립되던 시기에 東夷라고 표현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대는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하여, 영락 7년 정유는 서기 397년이다. 가장 이르게 발표된 신문기사 "충주 고구려비서 '영락칠년' 판독…광개토왕대 건립"에 따르면, 2019년 RIT 촬영 기술을 통해 밝혀냈다.
동시에 비(碑)의 내용에 광개토왕이 스스로를 태곽추(太霍鄒)라고 자칭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의 시조의 명을 주몽(朱蒙)이 아니라, 추모(鄒牟)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충주 고구려비의 태곽추(太霍鄒)의 해석은 ①藿(손영종, 1985 ; 李丙燾, 1995, 43쪽), ②翟(金昌鎬, 1987, 3쪽 ; 徐永大, 1992, 44쪽 ; 篠原啓方, 2000, 5쪽), ③羅(耿鐵華, 2000, 560쪽; 耿鐵華, 2021, 6쪽), ④䨆(李成制, 2020, 178쪽) 등이 있다. 그리고 鄒는 그들의 조상으로 주장한 顓頊의 苗裔이기도 하다.

From: "충주 고구려비서 '영락칠년' 판독…광개토왕대 건립", <연합뉴스YNA>, <https://www.yna.co.kr/view/AKR20191120143300005>, 2019-11-20 17:08.



[#東洋史] (+보충정보) 그리고, 고구려로 거짓의 유입 경로에 대해 by Jaehyun Park is licensed under CC BY-ND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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