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소수자로서 주장을 펼치는 법에 대하여

 [#짧은 생각] 소수자로서 주장을 펼치는 법에 대하여


[#짧은 생각] 소수자로서 주장을 펼치는 법에 대하여

    글을 작성하는 것은 흔히 책임을 요하지만, 특히 집단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작성하는 경우, 예를들면 다수집단의 의견이 아닌 소수로서 작성하는 글의 경우, 매우 많은 책임을 짊어진다. 왜냐하면 사람이 글로 펴는 주장이란 그 글쓴 사람의 책임과 발휘이기도 하지만, 그 사회적 맥락에 영향을 받기에 온전한 그만의 작품이 아니므로 사회 속에서 책임은 분할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사회속에서 다수의 의견을 지지하는 글은 그 관성과 많음으로 인해, 리스크의 분산과 옅음이 발생하지만, 반대로 사회속에서 소수의 의견 혹은 개인만의 의견은 어떠할까? 그 책임은 온전히 개인이 짊어지며, 그 주장은 기존 사회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에 전혀 옅어지지않아 온전한 짙음을 가질 것이다. 

그럼 그런 많은 리스크와 부담을 회피하고 침묵해야 할까? 하지만 사람은 표현하는 자신이며, 비록 현재 표현하지 않더라도 미래에 표현된다면 명백히 존재하겠지만, 죽을때까지 표현되지 않아 사라진다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해선 적건 크건 표현을 행해야 한다. 그럼 도대체 소수자로서의 표현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난 그때 필요한 조건이 본능적인 어림짐작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요리할때 물의 양을 계량기가 없더라도 추측하여 요리하듯이, 소수자는 그가 행하는 주장의 사회와 반응하는 역치를 어림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훈련되는 요소도 있지만 선천적 성질에 더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나 추상적이므로 예시를 들어보면, 소수자가 다수에 반하는 소수의견을 허용 역치를 넘어서 주장하면 어느 날 칼에 찔려 죽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소수자라고 표현하지만, 내가 말하는 소수자는 현대의 이상한 "정치적 올바름" 주의자들이 표현하는 소수자는 아닌데, 왜냐면, 그 특수한 "소수자"란 이제 집단이며, 그저 100의 크기를 집단에 비교해서 10정도의 크기를 가진 "소수자"라는 고유명칭의 집단이 현대의 그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표현하는 일반명칭의 소수자는 100:10:1로 수학적으로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단순히 숫자의 크기가 소수자(일반명칭)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수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지, 연대할 존재가 있는지가 소수자의 본래의 구분점으로 기능한다. 지금의 제도화된 고유명칭 "소수자"와 달리, 진짜 소수자는 어떠할까? 진짜 소수자는 분류될 수조차 없이 파편화되어있으며 인지조차 쉽지 않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소수자는 신체적 소수자건, 성적 소수자건, 정신적 소수자건, 민족적 소수자건 그런 구분조차 없던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그들을 볼때에서야 타당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즉 소수자란 애당초 구체화될 수조차 없는 이들이고, 범주화되고 정의 가능한 순간부터 소수자라고 보기 어렵다. 결국 현대에 집단을 이루고 저항력을 갖춘 순간, 고대시대의 신체적 성적 소수자의 사회적 상황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앞선 글들은 그 상대적 위치의 차이가 원인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소수자가 다수에 반하는 소수의견을 허용 역치를 넘어서 주장하면 죽는다는게 현대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현대사회에 진입함과 동시에 황제 중심의 동양사고관보다는 서양의 사고관이 유입되면서, 그 허용 역치가 눈에 띄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서구에서 더 다양한 의견이 수용되는것이 눈에 띄는 것은 문명구조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양적 사고관은 눈에 띄게 남아있다.

불과 20~30년 전만하더라도 한국은 다수의 의견이 아닌 소수의 의견을 말하자 맞아죽은 사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누가 그것을 기억하는가? 그 고유명칭화된 "소수자"들이 죽는다면 집단으로서 추모행동이나 저항이 발생하지만, 진짜 소수자는 소리없이 죽는다. 심지어 충격적이게도 죽은 이에게 잘 죽었다는 게 당시 일반적인 한국 사회 평가였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소수자를 위한다는 개념은, 그저 서구의 외적 형태를 흉내낸 것에 불과하며, 때문에 정의되고 눈에 보이는 가짜 성과를 보일 수 있는 고유명사 "소수자"에게 사회의 양보를 보인다. 그리고 그 혐오스럽고도 창피한 서구 흉내내기를 당당하게 세계에 자랑하니 창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난 전의 글에서 "단군신화의 허구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한국사회 내 소수의견이고, 논리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난 사회의 역치를 가늠해야 한다. 그리고 최근의 반응에서 난 역치를 넘어선 것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해당 주제를 피해오기도 했다. 위에 언급했듯 한국사회는 진짜 소수자들에게는 엄격하고, 눈에 보이는 지표를 위한 소수자들에게는 관대한 세계이기에, 나는 내 지속성을 위해서 침묵하기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하기싫지만 해야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싶은 바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그 "다수"에 속하는 의견을 선천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큰 특권이자 오랜세월 존재해온 차별제도라는 것을 모르기에 쓰는 글이다. 만약, 소수자가 아무리 많은 사료와 논리로 소수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다수는 억압하거나 적극적 억지를 한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이 동양적 사회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국가이다. 또, 다수의 이익을 지지하는 주장의 경우, 그것은 아무리 허무맹랑하더라도 지지받고 조작성의 모순을 외면한다.  만약 나도 이런 소수 의견이자 내가 논리적 구조에서 본 합당한 의견 형태가 아닌, 다수의 의견구조를 따른다면 좀 더 심란함없이 살수도 있으나, 그런 삶의 형태는 진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순응은 명백한 악(悪)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우매하다고 평가받는 고생길을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전의 "허구성" 글에 더해 하백에 언급했는데, 오늘날의 나무위키에 보면, 하백을 황하가 아닌 황해의 신으로 서술하는 허무맹랑한 억지를 볼 수 있다. 당연히 하백(河伯)의 하(河)는 황하(黃河)의 하(河)이며, 황해란 주장은 내가 앞서 쓴 다수 집단의 모순의 외면을 대표한다. 이외에도 내가 외국 위키에 쓴 글에 대해 진실을 외면하고자, 중국 위키페이지 자체가 삭제되는 경험도 있었다. 글을 읽는 분들이 그 정도로 다수로 대표되는 중국인 집단, 동양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북중국인 혈연집단의 역사조작과 타당한 다른 의견에 대한 외면과 반발이 얼마나 심각한 형태로 전개되는지를 모르기에 말하건데, 음모론적인 이야기보다도 세상은 생각보다 더 끔찍하다. 


[Related Resources] :

[1] [#東洋史] 한자 공동어의 변천 (상고 ~ 중고 시대까지) [: 박원기 교수님 강의 요약], <Blogspot><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4/04/blog-post_17.html>, April 17, 2024.
[2] [#東洋史] 神「河伯」について / 하백에 대해, <Blogspot>,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4/04/blog-post_2.html>, April 02, 2024.
[3] [단독] '과한 애국심에…' 일제 찬양 90대 노인, 지팡이로 때려 숨지게(Archive), <Blogspot>,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2/07/90.html>, July 03, 2022.
[4] Examples of Chinese attempts to rewrite history that are ridiculous. - About a ridiculous incident I had while writing Wikipedia -, <Blogspot>, May 28, 2023,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5/examples-of-chinese-attempts-to-rewrite.html>(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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