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소(牛)는 누구의 상징인가? (1)

동아시아에서 소(牛)는 누구의 상징인가? (1)

: 명백한 불만에 대해 표현을 하기 위해서 '소' 상징성의 동아시아에서의 사용을 알아보겠습니다.


I. 炎帝 神農과 「姜」 그리고 「羌」
II. 辰과 濊, 그리고 羌과 姜 사이의 연결성
III. 姜太公의 姜齊
IV. 노자

동아시아에서 '소'의 상징성을 가지는 기록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I. 炎帝 神農과 「姜」 그리고 「羌」

우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의 상징성을 가지는 인물은 염제 신농(炎帝 神農)입니다. 그는 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로 묘사되며 炎帝라고 불립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인간에게 농사를 가르친 농경의 신입니다. 이는 한자(Chinese character)로 농경(農耕)을 표현할때, 「農」이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오제 중에서 중국인들이 그들의 조상으로서 숭배하는 황제 헌원을 제외하면, 아마 2번째로 인기있는 상징이지 않을까. 더불어 그는 중국인의 시조로 여겨집니다. 춘추시대 5패 중 하나인 제(齊)의 초대 군주인 강태공(姜太公)이 염제 신농의 후손입니다. 현대의 姜氏가 그 후손을 주장합니다. 「姜」이란 상형자의 상단의 점 2개는 두 뿔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한자는 「羌」와 자주 혼동됩니다. 사실 어느정도 중국사에서 「姜」 와 「羌」은 종종 구분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姜은 '양(羊)'과 '여자(女)'의 합성으로 추정되며, 때문에 炎帝 神農은 농경의 소(牛)와 목축의 양(羊)의 상징을 가집니다. 炎帝 神農氏는 少典의 妃 喬氏의 姜水에서 성장하였으므로 姓을 姜으로 하였으며, 姜族이 시작되었습니다.1) 추가로 그는 한의학 최초의 저서로 유명한 『신농본초경』의 저술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2)

羌族의 기원 및 연혁을 알아보겠습니다. 羌族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 『後漢書』 「西羌傳」을 완전히 신뢰하여 羌族이 炎帝 神農氏의 일파라고 보는 견해. 둘째, 姜姓이 西羌에서 나온 것이지 西羌이 강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견해3). 셋째, 炎帝 神農氏는 有熊氏와 有蟜氏의 후예이지 西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견해(徐旭生) 등이 있습니다. 강족의 기원은 갑골문에 "己醜蔔, 貞, 今出羌亡咎", "貞, 於庚申伐羌"등의 기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최소한 은나라 때부터입니다4). 羌族의 신화에 따르면 木姐珠를 시조로 하는 始祖神話, 형매혼신화(兄妹婚神話), 여인국신화(女人國神話), 곡물기원신화(穀物起源神話)등이 있습니다5).

강족은 은상(殷商)시대에는 귀방(鬼方)이라고 불리웠다고 추측됩니다. 『죽서기년』에는 "왕(商의 국군 무정)이 병사를 이끌고 귀방을 물리쳤다. 저(氐), 강(羌)이 손님으로 왔다" 그리고 『주역』에도 "고종(무정)이 귀방을 정벌하는데 3년만에 물리쳤다." 그리고, "3년만에 물리치니 피로하다" 즉, 3년간의 전쟁으로 나라의 힘이 피폐해졌다는 것을 보면, 귀방은 아주 강대한 부족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동양문화권에서 악마나 유령을 '귀신(鬼神)'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귀신을 모모타로(桃太郎)의 이야기에서 취급하며 그것이 백제와 연관된 이유도 여기서 유래합니다6).

비록 싸우기 힘들기는 하더라도 강족은 그래도 정복되었다. 당시 商나라의 정부는 송시를 지어서 후세에 남겼다 "그 이후로 氐, 羌이 감히 왕으로 모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상나라의 신하가 된 것은 확실합니다. 강족은 『국어』에서 "강씨지융(姜氏之戎)"이라고 적고 있다. 즉 서융(西戎)의 강(姜)씨족이라는 뜻입니다. 강(姜), 강(羌)은 고대에 음이 똑같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후한서』에도 "西羌의 근본은 삼묘(三苗)에서 나오니, 강성(姜姓)의 별종이다."三苗는 堯舜시기에는 三苗, 춘추시기에는 蠻으로 불렸으며, '有苗'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현재 양자강 중류에 해당하는 동정호(洞庭湖: 호남성 북구)와 팽려호(彭蠡湖: 파양호) 사이에 분포하였습니다.7)8). 이 민족은 나중에 대융(大戎)과 함께 서주(西周)를 멸망시킵니다. 전국후기에 강족은 진(秦)나라와 이웃하며 전투를 전개하기도 합니만, 결국 진나라에 복속됩니다.

강과 흉노는 중국 서북과 북부에서 중국을 적대시한 두 개의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 흉노가 강족보다 먼저 굴기했는데, 흉노는 '모돈'때 강성해지는데, "위세가 백만(百蠻)에 떨쳤고, 여러 강족들이 신하로 들어왔다"라고 합니다. 강족은 흉노에 귀부했고, 한무제때는, 중국이 흉노와 강이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서사군을 설치"하고, "강과 오랑캐를 분리하여 남북으로 서로 연결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병력 10만을 보내어 평정하였다"고 하며, 호강교위(護羌校尉)를 두어, 강족의 옛땅을 정복합니다. 그리하여 "강족은 황중(湟中, 지금의 서녕시 서부)으로 가고, 서해, 염지의 좌우에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청해호 서남의 광활한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강족은 여러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강은 유목민족이었습니다. 『후한서』에서는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으며, 물풀을 따라다닌다.", 강족들은 "추위와 고통을 잘 참으니 금수와 같았다"고 합니다. 기록에 "성격이 견강용맹(堅剛勇猛)하다"는 서술과 "부인이 자식을 낳을 때도 풍설을 피하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중국민족에 의해 이주된 강족의 힘듦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강족은 종족이 아주 많고, 분포가 광범위 했습니다. 『후한서』에서 "강족은 154종이 있다"고 하였고, 영강(零羌), 종강(種羌), 백마강(白馬羌), 소당강(燒當羌), 삼랑강(參狼羌), 건인강(虔人羌) 등이 있습니다. 이들중 소당강(燒當羌)이 후대에 후진(後秦)을 건립합니다. 『후한서』에서는 그들 무리가 "천리 에 걸쳐 퍼져 있다"고 하며, "그들의 습속은....부친이 없어지면 계모를 처로 삼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국가에 과부가 없다. 종족이 아주 번성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풍습과 비슷합니다.

『주서(周書)』의 왕회(王會)의 해(解)에 이르기를 “저강은 난새(鸞鳥)이다”라고 했으며, 공조(孔晁)의 주(注)에 이르기를 “저(氐)의 땅의 강(羌)과 강(羌)은 다른 것이며, 그래서 저강(氐羌)이라 부르고, 오늘날 그것을 저(氐)라고 부른다.”라고 했습니다. "저강(氐羌)이 난새이다"란 표현의 鸞鳥는 신라의 화랑정신을 표현하는 비석인, '난랑비서'라는 표현에서 쓰이는 란(鸞)의 한자와 같습니다.

저강은 『후한서(後漢書)』에 근거하면 ‘저강은 강(姜)성(姓)에서 나왔다’라고 했으며, 근대의 역사가 부사년(傅斯年) 또한 강(姜)이 곧 강(羌)라고 말하고 있으며, 만약에 그러하다면 염제(炎帝)의 후예이고 상고시대(上古時代)의 두 개의 주요 성씨 중의 하나인 강(姜)성(姓)은 강족(羌族)에 속한다.9)

『좌전(左傳)』 양(襄)왕 14년의 강융(羌戎)에 대한 한 단락에서, 구주(九州) 중의 일명(一名)이 과주(瓜州)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곳의 이웃에 진(秦)이 있으며, 그곳 사람이 강(姜)성(姓)이고, 그 무리는 곧 융(戎)족이고, 비록 융(戎)이지만, 그들이 사방의 큰 제후(사악/四嶽)가 됨을 잃지 않았다. 사방의 큰 제후(四嶽)중에 문물(文物) 대국(大國)인 제(齊)나라가 있으며, 또 융(戎)이 있는데, 여진(女眞)을 예(例)로 들 수 있다. 건주여진(建州女眞)이 중하(中夏/중국)를 정복한 후에, 소위 만주(滿洲) 팔기(八旗)라는 것은 모두 중화풍(中華風)에 물들었으며, 그리고 혼동강(混同江) 상류의 여진부락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어렵(漁獵)생활을 유지하였으며, 문화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다만 이것에 의거하여 강(姜)의 근본은 서융(西戎)임을 알 수 있고, 주나라와 밀접하고 또한 인척이 되며, 다만 모두 중국은 아니다.10)

은허문자(殷墟文字)에서 출현한(출토된) 부수(部首)가 인(人)인 강(羌)글자(羌字之從人)와 아직 출현하지 않은 부수가 녀(女)인 강(姜)글자(從女之姜字)는 당시에는 반드시 크게 구별하지 않은 것 같고, 나중에 남녀의 호칭이 같지 않게 되어서, 그래서 ‘地望從人(지망종인)’은 강(羌)자(字)가 되고, ‘女子從女(여자종녀)’는 강(姜)자(字)가 되어, 따라서 둘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한(漢)나라와 진(晉)나라의 유자(儒者)만 하더라도 강(羌)은 강(姜)이라고 알았을 것이다. 강(姜)과 강(羌)은 같은 것이고, 겨우 문자상에서 하나의 이름을 다르게 한 것이다. 혹자는 종족상에서 주(周)나라의 강(姜)과 한나라의 강(羌)은 같은 것이라고 한다. 『후한서(後漢書)』의 서강전(西羌傳)을 보면, 서강(西羌)의 근본은 삼묘(三苗)에서 나오고, 강(姜)성(姓)의 별족이다.’ 즉 범엽(范曄)은 강(姜)과 강(羌)을 같은 것으로 여겼다. 범엽은 비록 류송(劉宋)나라 사람이지만, 단 범씨의 『후한서』는 겨우 문자상에서 화(華)씨와 사마(司馬)씨의 것을 수정한 것으로, 이 말은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서강전(西羌傳)중의 기사(記事)에서 강(羌)족의 많은 부락은 본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리고 진(秦)의 강성은 더욱이 강(羌)족의 서쪽 이주와 관계가 있다. 이 말은 바로 좌전(左傳) 양(襄)왕 14년의 강융자(姜戎子)에 대한 언급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대(漢代)의 강(羌)족 부락 중에 일부는 강(姜)씨인 것으로, 보건대 마치 이와 같다.11)

부사년(傅斯年)은 "강(羌)과 장(藏)은 북경어 발음으로 거의 비슷한 것으로, 강족과 장족은 같은 것이다. 장족(藏足)은 티벳을 말한다"고 언급하였고, 여기서 언급되는 藏족은 『전한서(漢書)』 卷6에 나오는 "薉君"과 한자가 비슷한 이체자 관계이다. 그리고 薉족으로 표현되는 동쪽의 이민족 집단은 『후한서(後漢書)』에서는 濊족이라고 표현된다. 처음 전한서를 서술한 저자가 두 집단의 유사성을 보고, 의도적으로 유사한 한자를 사용해 명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아래의 기록을 참고하면, 羌藏族과 大月氏는 연관성을 가진다.

"대월씨(大月氏)는 본래 변경 가까이 살았으나, 나중에 흉노(匈奴)를 피하게 됨에 따라 중아(中亞)로부터 멀리 도주하게 된 것이다. 대월씨(大月氏)는 어느 종족에 속하는 지는 현재는 오히려 정하지 못한다. 서양인의 연구에 따르면, 장족(藏族), 몽고족(蒙古族), 돌궐족(突厥族), 아리안족(阿利安族) 등 네가지 설이 있다. 씨(氏)자는 씨(氏)음으로 읽지 아니하고, 또한 사서(史書)에 저(氐)로 되어 있다. 후래(後來)의 엽달(嚈噠)은 사서(史書)에 보면 늘 대월씨(大月氏) 종류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엽달(嚈噠)족은 넓은 의미로 강장족(羌藏族)에 속하고, 대월씨(大月氏) 역시 대략적으로 보면 원래 강장족(羌藏族) 에 속하며, 나중에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서방의 여러 종족과 잡거(雜居)함으로 인하여, 그 종족은 점차 순수하지 않게 되었다. 대월씨(大月氏)가 서쪽으로 이주한 뒤에 일부 따라가지 않는 자들은 한인(漢人)과 황중(湟中)에서 섞여 살았으며, 별도로 명칭(名稱)이 있다"12)


II. 辰과 濊, 그리고 羌과 姜 사이의 연결성

이제 농경의 한자「農」를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農는 曲와 辰의 합성입니다. 또한, 曲는 그 한자의 의미인 '구부리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의 '밭(田)'과 '두개의 손'을 묘사하는 것이 원형입니다. 즉, 農는 "辰의 위쪽 밭(田)에 두 손을 뻗은 것"입니다. 

또 다른 辰의 용례는 辰國입니다.『史記』의「真番旁辰國」이나,『漢書』의「真番辰國」으로 표현됩니다. 첨언하자면,『史記』에서「真番旁衆國」으로 적혀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비실제(非実在) 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후대의 사서도 辰韓이나 辰國으로 한자를 작성하므로 辰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봅니다. 이런 비실제 주장의 이유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震이 辰과 연관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주역(周易)』에 따르면, 帝(※ 黄帝가 아닙니다. 역겨운 중국인들은 모든 帝를 黄을 첨가하여 黄帝로 왜곡하지만, 원문을 보면 帝와 黄帝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인 집단들에겐 모든 帝를 黄帝로 왜곡하면 그들에게 이익이기 때문입니다)는 震에서 왔기 때문입니다.13) 애당초 발해가 자칭한 국명은 震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같은 중국인이 아닌 발해인들의 震이란 국명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해(渤海)라는 국명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전에 진행한 東夷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는 무시할 만한 표현이 아닙니다.14) 佐藤洋一郎의 연구에 따르면, 벼농사(稲作)의 기원(起源)은 다름아닌, 장강(長江)입니다.15) 중국의 책 『논형』에 따르면 주(周)의 시대에 월상(越裳)은 흰 꿩을 바치고, 왜인은 창초를 바쳤습니다.16) 또 『三國志』「東夷傳」에 따르면 한국의 남쪽은 왜와 접해있다[南與倭接]고 합니다.17) 

『漢書』 「地理志」에 따르면, 하(夏) 소강(小康)의 아들이 회계(會稽)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하여 교룡(蛟龍)의 공격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18)  『史記』 「越世家」에 따르면, 월왕(越王)은 소강(小康)의 후예이다.19) 한편, 『위략(魏略)』에 따르면, 왜인(倭人)은 오태백(吳太伯)의 후손이라고 한다.20) 그러나, 『魏略』과 『吳越春秋』 「吳太伯傳」에 나오는 오태백의 이야기는 위의 '小康의 아들' 이야기의 전개 구조와 똑같습니다. 이는 오나라가 월나라의 이야기를 모방하였을 가능성을 알립니다. 오나라는 월나라의 바로 북쪽에 있던 국가이며, 월나라는 스스로를 하나라의 후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중국 속담은 "사이가 나쁜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라도 같은 배에 타면 운명이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점은 여기서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의 사이가 나쁜 것이 고대 중국인들의 상식이었다는 점입니다. 북쪽에서부터 이주해오는 희(姬)성 오씨(吳氏) 집단과 원주민 월족(越族) 집단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다만, 정확히 吳氏가 越族을 모방한 姬姓인지, 姬姓을 모방한 越族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위략(魏略)』은 부여국에 대한 사례에서도 보았듯, 역사서를 조작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의도성이 포함되어 있어 그다지 믿을만한 기록이 아닙니다.

신라의 소의 상징성은 신라기록에서 등장하는, 스스로를 "임나가라인"이라고 자칭한, '강수'라는 인물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탄생일화에서 아이의 머리 모양이 마치 소의 뿔이 달린 것과 같으니, 길한 징조라고 주변에서 인식되었다고 하였다. 즉 적어도 그 시대의 신라지방에선 '소'의 상징성이 좋은 의미로 인지되었습니다.21) 신라의 건국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일본 기록에 따르면, 신무천왕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고구려측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옥저인이 건국하였다고 하며, 백제는 신라가 백제인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백제 건국 이전에 건국되었습니다. 동시에 백제 또는 옥저인이 건국했다면,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나 많은 한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 유민'이 건국했다는 기록과 모순됩니다. 그리고 사료 자체의 신뢰성은 삼국사기보다도 오래전에 쓰인 주장이 더 신뢰성이 있습니다. 왜 이런 기록의 오류가 발생할까요? 우선 일본서기의 경우, 시간기록이 없던 이야기 자료들을 이야기의 논리적 순서에 맞춰서 서술하였고, 때문에 종종 오류가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비중국문화권은 시간기록이 없거나 그 방식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중국사의 기록과 모순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무엇일까요? 그건 제가 쓴 다른 자료에서 언급했으니 그 자료를 참고바랍니다.

'辰의 용례'는 중국 남부의 장강(長江) 지역과 한반도 남부의 진(辰)이 같은 문화권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農의 자해(字解)에 따르면, 중국에서 농사의 신인 炎帝 神農은 "辰의 위쪽 밭(田)에서 두 손으로 가져왔습니다".

중화민국의 학자 '동초평'에 따르면, 夏족은 百越족의 한 분파로 북쪽으로 이동하여 중앙 평원에 夏朝를 세웠다고 합니다22). 또, 홍콩 대학의 언어학자 '김종'은 언어학적 증거를 통해 百越족의 한 분파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夏朝와 扶餘를 세웠다고 주장합니다23).


북사는 옥저인들이 신라를 200년대 건국에 건국했다고 언급했다. 북사 서술의 배경을 보면, 관구검이 고려를 일시적으로 정복했을때, 관구검이 현지인에게 불완전한 중국어-한국어 번역능력을 바탕으로 들은 정보를 작성한 듯 하다24)25)

마찬가지로 『수서(隋書)』신라전에는 신라를 관구검(毋丘儉)의 침입 때 고구려를 공격하자, 그때 옥저인들에 의해 건국된 국가라고 서술하였다26)

삼국사기에 따르면 처음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이다. 그러다 온조왕(溫祚王)이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27)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28)

내가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백제의 십제가 바다를 건너 건국했으므로 유래한다는 기록과, 백제가 부여의 후손이라는 언급은 서로 모순되는 기록이 아니다29)

하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겐 불리한 자료이므로 무시당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른 신라의 건국은 기원전 57년이다. 그러나, 이란의 쿠쉬나메(Kush-Nama)는 기원전 350년 경에 신라에 이미 신라가 존재했음을 주장한다. 또 일본은 기원전600년에 신라가 이미 존재했음을 주장한다. 이런 시간상의 오차가 발생한 원인으로 추측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애당초 중국밖의 동쪽 비중국인들의 지역에선 시간 기록이 중국식이 아닌 방식이었으나, 중국과 접촉하며 모두 망가져버렸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에대해선 다음에 설명하겠다. (승문문화 관련)


복희(伏羲)는 어떨까요? 복희씨의「羲」또한, 姜과 비슷하게 두개의 뿔을 상징하며, 복희 또한 염제 신농처럼 두뿔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되고는 합니다. 전설에서 복희는 인류에게 닥친 대홍수 시절에 표주박 속에 들어가 있던 덕분에 되살아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로 복희라고 했다고 전합니다.30) 하지만, 이건 사마정(司馬貞, 656년 ~ 720년)에 의한 후대의 가필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복희(伏羲)가 묘사된 삼황본기(三皇本紀)는 당대 중국인들의 정치적 목적이 첨가된 후대의 가필이며, 그가 회양현(즉, 陳이다)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에서 강하게 의심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진(陳)은 제순(帝舜)의 후예이며, 『사기』의 제요(帝堯)가 자발적으로 왕위를 양도했다는 기록과는 다르게,『고본죽서기년』에는 순(舜)이 요(堯)를 감금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중국인들이 늘 그렇듯 날조한 기록으로 추정됩니다.31) 갑자기 중국신화에서는 등장도 하지않던, 표주박이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점, 계보의 모순이 발생하는 점, 7세기의 시대・사회적 배경(신라-당 관계)에서 창작된 '정치적 목적'의 역사서임을 감안하면, 전혀 믿을만하지 못한 기록입니다. 하물며, 삼황(三皇)의 기록이 고대부터 존재했다면, 왜 『사기』를 쓴 사마천은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작성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다시한번 왜곡된 기록임을 방증합니다. 다만, 어쩌면 굳이 복희라는 존재를 연결시킬 이유나 연원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가 唐나라 시기이지만, 복희는 주로 번개의 상징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게다가 목성은 '주피터'를 상징하며 번개신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목성(木星)은 오행사상에 의해 동방으로 연결됩니다.32) 다만, 지금 위키피디아에서 辰國이 동방의 목성(木星)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은 목성의 동방적 성질에 집단하는 집단일 것입니다.33) 때문에 조금의 우려가 있습니다. 정작 辰星라는 명칭의 행성이 존재함에도, 그들(東夷)은 그들에게 유리한 조작 만을 바라보는 편협한 사고관에 매몰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남습니다. 다만, 복희가 번개의 상징성과 연결될 경우, Korea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갑자기 등장한 단군신화의 신화적 요소가 어디서 등장한 것인지 추측 가능합니다.

여러 근거를 바탕으로 생각할때 조선과 신라 건국 사이의 연결성을 주장하는 중세시대 한국(고려, 조선)시대 학자들의 주장은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따른 역사조작으로 추정되며, 그 신뢰성이 매우 신뢰성이 낮습니다34). 당나라인들과 상나라인들로 구성된 국가가 현재의 남한과 북한이며, 그들 중국인들이 중국인이 아닌 것처럼 조작하고 있는 문제적 상황이 현시대의 끔찍한 형태입니다.

당나라는 스스로가 고조선인이라고 조작하여 이민하고, 조작된 위략 사서를 신라에 들여와 여러가지 역사조작활동을 펼쳤습니다. 신라의 기록중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라는 표현에서 "구한(九韓)"은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때, 중국인들의 구이(九夷)를 모방하여 묘사한 것으로서, 신라 귀족들이 이(夷)족이 중국인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여 서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35)

또한 신라가 멸망하고 100년도 훌쩍 넘은 1072년에 송나라를 방문한 일본인 승려의 기행문인 『삼천대오대산기(參天臺五臺山記)』에선 송나라에 거주하던 Korean peninsula인을 고려인과 신라인으로 구분하여 표기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운송업에 종사하며 일본승려의 통역 및 기타 여행에 관한 일들을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인들이 공연을 선사해주었는데, 고려 음악이 아니라 신라 음악이었다고 구분해서 서술한다.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에도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당인(唐人)이라고 지칭한 기록에서, 중국인들의 민족청소와 역사조작을 대략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참고로, 일본에서 唐의 훈독은 가야에서 유래한 'から(kara)'로 정착되었는데, 이것은 가야인이라고 거짓말로 조작하는 중국계 한국인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거대한 '당'이라는 제국과의 접촉에서 '가야'라는 개념이 일종의 여과기로서 기능하기를 바랬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현대까지도 일본어에서 唐이 'から(kara)'라는 훈독으로 읽히는 단어들이 많이 남아있다36). 즉, 일본인들이 고려인(조선인)과 신라인이 구별되는 다른 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일본인들이 두 개념을 구분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고대 신라인들과, 근대 일본인들 모두 서술하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근대와 현대 시기에 서구학계는 고대 신라인과 현대 한국인을 구분하지 못하여, 동아시아사를 연구하는 동양인이 아닌 서구학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단편적으로 한계를 보였습니다37)38).

한반도 남쪽에 존재했던 국가인 가야는 그들의 전통에서 닭을 신성시했던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39). 마찬가지로,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월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세력은 흰닭을 상징으로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는 이씨왕조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두 사서는 당나라 시대 이후에 작성된 역사서이며, 한국의 경우는 확실하게 중국인들에 의해 민족청소가 끝난후 작성된 역사서입니다. 뿐만아니라, 대월사기전서와 삼국사기 모두, 당나라계 중국인에 의해 작성되기 이전에 분명히 존재했던 비중국인에 의해 쓰인 역사서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은 합리적인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두 당나라계 중국인에 의해 작성되고, 당나라에게 큰 영향을 받은 국가들이며, 중국인에 의해 쓰인 사서 이전의 자료들은 모두 사라졌다는 점에서 소름돋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또, 중국인들은 사서 『三國志』에서 한반도의 목지국을 월지국으로 고의적으로 오기하였는데, 이는 중앙아시아의 월지(Yuezhi)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왜곡이 발생한 것은 목지국의 마한족 사람들이 신라(Shirapa)에 이주하는 것을 정당하기 하기 위한 조작이었습니다40). 그러나, 왜 그러한 조작을 했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강족의 연결성을 토대로 고민한다면 이해가능합니다.


III. 姜太公의 姜齊

춘추시대 5패 중 하나인 제(齊)의 초대 군주인 강태공(姜太公)은 염제 신농의 후손입니다. 다만, 기원전 386년에 제(齊)나라의 군주가 강성(姜姓) 여씨(呂氏)에서 규성(嬀姓) 전씨(田氏)로 나라가 빼앗겼는데, 이는 제나라가 완전히 夷족 국가로 지배민족이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환공(齊桓公) 14년 때, 제환공은 진(陳)으로부터 제(齊)로 망명해 온 공자 완(完)(:진(陳)의 14대 군주 여공(厲公)의 아들이자, 전씨(田氏)의 선조이다)을 수용했습니다. 이렇게 기원전 672년, 진나라(陳)에서 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로 망명하여 강력한 대부 가문이된 전완(田完)의 후손들은 전, 손, 문, 설, 왕 등의 가문으로 창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씨(陳氏) 성과 전씨(田氏) 성을 혼용하여 썼는데, 기원전 386년에 제나라 전화(田和)가 강성(姜姓) 강공(康公)을 몰아내고 제나라 제후가 되었습니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개국원훈공신(開國元勳功臣)이었고, 신하국 제나라(齊國)의 시조였습니다.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는데, 육도삼략은 고대 중국에서 꼭 읽어야할 병서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합니다. 서양에서 유명한 손무의 『손자병법』은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따르면, 강태공을 본 주(周)나라의 서백(西伯)은 몹시 기뻐하며 “내 선군이신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께서 周에 오시면 周가 흥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 분 아니십니까? 태공께서 당신을 기다린지 오래 입니다.”라고 하며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주목할 점은 주나라의 군주가 굳이 강태공 같은 인물을 오래 기다려 왔다는 점이다. 당대 商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周는 도움이 절실한 입장이었다. 그중에서도, 강태공(姜太公)이 "매우 많은 정도(太公望)"로 원하던 인물이라고 표현된 것에는 그의 출신배경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서 보면 그는 원래 동해(東海) 사람으로, 그의 선조가 우(禹) 임금 시절에 치수사업을 도와 그 공로로 여(呂) 땅을 받아서 제후가 되었다고 합니다.  『국어(國語)』「주어(周語)」에 “제(齊)、허(許)、신(申)、여(呂)는 대강(大姜)에 유래되었다”고 했으며, 위소(韋昭)에 따르면 네 나라는 모두 강성(姜姓)이고 신나라는 강융(姜戎)입니다. 강씨(姜氏)는 본래 『국어(國語)』에서 "姜氏之戎"이라고 적힌 바와 같이 융족(戎族)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呂氏春秋에서는 동이지사(東夷之士)로 서술됩니다. 그래서, 태공망(太公望)의 정체성은 적어도 강제(姜齊)가 망하고 난 뒤에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중국에서 대세였던 동이족(東夷族)으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41). 그런데, 동이지사(東夷之士)라는 말의 해석은, 동이족인 귀족(士) 또는 동이족을 지배하는 귀족(士)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고의적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해석의 애매함을 의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기록은 후대 동이(東夷)와 관련된 중국인들의 조작 빌미가 되었습니다. 동이가 동쪽으로 확장하여, 중국인들이 역사를 조작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에서는 辰韓의 풍습으로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금의 진한사람들의 머리는 납작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경상남도 김해 예안리(禮安里)의 가야고분군, 4세기대 목곽묘인 예안리 85호와 99호 고분에서 변형 두개골이 발견된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편두(褊頭, Artificial cranial deformation) 사례가 발견된 유골은 제나라가 건국된 산동반도(山東省)의 대문구(大汶口, 다원커우)문화(BCE 4300~2500) 유적의 근처의 해안가와 일본 남부의 廣田遺址(Hirota site)에서도 두개변형(頭蓋變形)된 두개골을 발견했습니다42)43)


IV. 老子의 계보와 夷족.

노자가 소를 탄다는 기록은 어떠할 까요? 노자가 그럼 소와 관계가 있을까요? 주나라 농사를 중시한 것도 관계가 있을까요? 

명백히 말해서, 중국인들은 주나라의 농사 중시 문화를 빌미로 신농의 상징성을 그들 민족의 것으로 조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나라는 단지 당연한 고대국가로서 농사를 중시했을뿐 당대에 신농을 그들(주나라의 왕족계 민족)의 '조상신'의 단계로 까지 간주했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충설명이 필요하겠네요,  나중에 자세히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자는 이족에 해당합니다44). 제요는 다음의 기록을 통해, 동이족과 동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①『회남자』:요임금이 주도적으로 예에게 해를 쏘라고 명령했다. ②『논형』:요임금이 직접 활로 해를 맞추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요는 동이족의 시조인, 후예와 '동일인물' 혹은 '같은 계통의 인물'입니다.

노자가 소를 탔다는 묘사가 있으므로 관련이 있다? 탄다는 의미는 산해경을 통해 알 수 있든 호의적 의미가 아닙니다45). 또 전세계적으로 쓰이는 속어에서도 탄다는 의미가 그다지 좋은 의미가 아니다. 이건, 착취의 의도성을 드러낸다. 애당초, 고작 주나라 하급관료가 자신만의 상징성을 내세우는게 의미가 있겠는가? 조작에 불과할 뿐이네요.

노자는 어떨까요? 노자의 경우,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본래 태극은 노자가 발명했다는 웃지못할 역사왜곡을 중국인들은 퍼트렸습니다. 하지만, 많은 고대 문명들의 문화에서 발견되는 태극은 '노자'라는 개인이 발명한 것이 아니며, 재창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중국인들이 태극 자체의 발명으로 조작한다면, 이는 중국인들이 늘 그렇듯, 상징성을 빼앗아 그곳으로 이민하는 조작방식이라는 것이 명백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태극은 실제로 천전리(川前里) 암각화, 알렉세이 오크라도니코프의 아무루강 일대 암각화(탁본) 수집본, 아즈텍 마야 문명에서도 태극문양은 발견됩니다.46)47)48)

이러한 이유로 노자에 대한 비판도 형성되는데, 이에 따르면 태극상징은 본래 태양을 상징하는 형태였으나, 노자는 스스로의 발명으로(현대 중국인들에게 그렇게 주장되는) 또는 재창작으로 태극을 음양의 사상으로 창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음양에 노자는 대체 왜 남자와 여자라는 상징성을 더했을까요? 다른 노자의 기록에는 그가 방중술을 신선이 되는 방법으로 주장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결국, 그는 망상적 성향이 강한 성적 욕망이 억압되던 주나라의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열망을 사상에 반영한 변태적 사상가입니다. 전 이런 성적욕망을 숨겨 사상으로 주장하고, 이런 가짜 사상가의 후손들이기에 중국인들이 노자를 높이 위인으로서 우대하는 것에 매우 역겨움을 느낍니다. 좀 더 확대해석을 해보면, 이 노자로 시작된 사상을 왜곡하는 전통은 끊어지지 않았고, 현대 중국인들도 우선 망상하고 그 망상에 맞춰서 대다수인 인구수를 이용하여 기록을 조작하는 조작문화가 시작된 그 시작점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각주】

1) 楊海帆, 2003, 3기

2) Shennong Ben Cao Jing, Wikiped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9 May 2023 10:53 UTC. Retrieved from 14 July 2023 14:01 UTC.
Wachtel-Galor, Sissi; Yuen, John; Buswell, John A.; Benzie, Iris F. F. (2011). Benzie, Iris F. F.; Wachtel-Galor, Sissi (eds.). Ganoderma lucidum (Lingzhi or Reishi): A Medicinal Mushroom. Herbal Medicine: Biomolecular and Clinical Aspects (2nd ed.). Boca Raton (FL): CRC Press/Taylor & Francis. ISBN 978-1-4398-0713-2. PMID 22593926. The first book wholly devoted to the description of herbs and their medicinal value was Shen Nong Ben Cao Jing, written in the Eastern Han dynasty of China (25-220 AD). This book is also known as “Classic of the Materia Medica” or “Shen-nong’s Herbal Classics.”
Traditional uses, chemical components and pharmacological activities of the genus Ganoderma P. Karst.: a review / Li Wang, Jie-qing Li, Ji Zhang, Zhi-min Li, Hong-gao Liu, Yuan-zhong Wang // RSC Advances: Issue 69, 2020. — p. 42087
Unschuld, Paul U. (1986). Medicine in China: A history of Pharmaceutics. Berkeley: Univ. of California Pr. ISBN 9780520050259, p. 17.

3) 章太炎, 『章太炎先生文錄新編』 巻6下, 「西南屬夷小論」

4) 孟鷗, 2007

5) 徐曉光, 1995

6) 桃太郎の鬼の正体は「百済の王子」だった!? 鬼を倒した吉備津彦(きびつひこ)とは?、<rekishijin>、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10-27, Retrieved 2024-05-11. URL: https://www.rekishijin.com/29803

7) 『戰國策』巻22 吳起.

8) 侯哲安, 1979년, 1기.

9) 林惠祥(1901-1958), 『中國民族史』 下巻 (臺灣 商務仁書館、1935):氐羌據後漢書言其出自姜姓, 今代史家亦有謂姜卽爲羌者, 若然則炎帝之裔而上古二大姓之一之姜姓乃屬羌族矣.

10) 林惠祥(1901-1958), 『中國民族史』 下巻 (臺灣 商務仁書館、1935):左傳襄十四年羌戎一段, 知九州之一名瓜州, 其地鄰秦, 其人爲姜姓, 其類則戎, 雖則爲戎, 不失其爲四嶽之後. 四嶽之後, 有文物之大國齊, 又有戎者, 可以女眞爲例. 建州女眞征服中夏之後, 所謂滿洲八旗者盡染華風, 而在混同江上之女眞部落, 至今日仍保其漁獵生活, 不與文化之數. 但藉此可知姜本 西戎, 與周密邇, 又爲姻戚, 惟並不是中國.

11) 林惠祥(1901-1958), 『中國民族史』 下巻 (臺灣 商務仁書館、1935):殷墟文字中出現羌字之從人, 與未出現從女之姜字, 在當時或未必有很大的分別, 到後來男女的稱謂不同, 於是地望從人爲羌字, 女子從女爲姜字, 沿而爲二了. 不過漢晉儒者還是知道羌卽是姜的. ... 姜羌之同, 是僅僅文字上一名之異流呢, 或者種族上周姜漢羌是一事. 照後漢書西羌傳, ‘西羌之本出自三苗, 姜姓之別也’. 則范曄認姜羌爲一事. 范曄雖是劉宋人, 但范氏後漢書僅是文字上修正華氏司馬氏的, 這話未必無所本. 且西羌傳中所記事, 羌的好些部落本是自東向西移的. 而秦之强盛尤與羌之西去有關系. 這話正和左傳襄十四年姜戎子的一段話是一類的事. 那麽, 漢代羌部落中有些是姜氏, 看來像是如此.” 

12) 林惠祥(1901-1958), 『中國民族史』 下巻 (臺灣 商務仁書館、1935):大月氏本居近塞, 後因避匈奴乃遠遁中亞. 大月氏屬何種族今尙未定. 據西人硏究, 有藏族,蒙古族,突厥族,阿利安族四說. 氏字不讀氏音, 且史書亦有作氐者, 而後來之嚈噠據史常言其爲大月氏種類, 嚈噠屬於廣義的羌藏族, 大月氏大約原來亦屬於羌藏族, 至於後來因西徙而與西方諸族雜居, 其種或致漸不純粹也. 大月氏西徙後一部分不從去者與漢人錯居湟中. 別有名稱.

13) 辛亚民:《说卦传》“帝出乎震”章析论 , <SOHU.com> ,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7-07-18. Retrieved 2023-07-14. URL: https://m.sohu.com/a/157945413_713036?_trans_=010004_pcwzy.
" 帝出乎震,齐乎巽,相见乎离,致役乎坤,说言乎兑,战乎乾,劳乎坎,成言乎艮。"

14) My previous Blog post about 東夷, <Blogspot>,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6/blog-post_10.html

15) 稲のたどってきた道 佐藤 洋一郎 氏. <at home-academ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07-26, Retrieved from 2023-07-26, URL: https://www.athome-academy.jp/archive/biology/0000000116_all.html

16) [朴東-11] 오·월 전쟁과 오나라의 멸망 그리고 초기 동이 왜의 확산, <Media 시시비비>,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0-07-15, Retrieved 2023-07-14. URL: http://mediaccbb.com/news/newsview.php?ncode=1065543982440300.
" 이후 왕충의 『논형』에 왜인이라는 직접적 표현이 나타난다. 주 성왕 시기(BC 1043~1021)인 “주(周)시대에는 천하가 태평하였으며 월상(越裳)은 흰 꿩을 바치고 왜인은 창초를 바쳤다”(周時天下太平 越裳獻白雉 倭人貢鬯草)는 것이다. 『산해경』에도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으며, 왜는 연에 속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거연은 크고 강한 연나라로서 연소왕(BC 311~279) 때를 가리키고, 개국은 연나라의 장성에서 멀지 않은 산동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서』지리지에는 “낙랑(樂浪)의 바다 한 가운데에 왜인의 나라가 있는데, 백여국으로 나뉘어 있다. 세시마다 와서 조견하였다.”고 한다. "

17)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
— 三国志、巻三十、東夷伝

18) 『漢書』 「地理志」 第八下 “其君禹後, 帝少康之庶子云, 封於會稽, 文身斷髮, 以避蛟龍之害”

19) 『史記』 「越王勾踐世家」:越王句踐,其先禹之苗裔,而夏後帝少康之庶子也。封於會稽,以奉守禹之祀。文身斷發,披草萊而邑焉。後二十餘世,至於允常。允常之時,與吳王闔廬戰而相怨伐。允常卒,子句踐立,是為越王。

20) 『魏略』(『翰苑』에 인용) “女王之南·又有狗奴國·女男子爲王. 其官曰拘右智卑狗·不屬女王也. 自帶方至女國萬二千餘裏. 其俗男子皆點而文聞其舊語·自謂太伯之後. 昔夏後少康之子封於會稽·斷髪文身·以避蛟龍之吾. 今 倭人亦文身·以厭水害也.”

21) 『三國史記』「卷46」「列傳 第六 强首」、其母夢見人有角而妊身, 及生頭後有髙骨. 昔諦以兒校勘 002就當時所謂賢者問曰, “此兒頭骨如此, 何也.” 荅曰, “吾聞之, 伏羲虎形, 女媧蛇身, 神農牛頭, 皐校勘 003陶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凢者.

22) 董楚平《吳越文化志》,上海人⺠出版社,1998年。

23) 金鐘《濮與中華⺠族》,廣州出版社,2012年。ISBN 978-7-5462-0291-4

24)『北史』「卷094 列傳第八十二 四夷」、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有留者,遂爲新羅,亦曰斯盧。

25)『北史』「卷094 列傳第八十二 四夷」、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26)『隋書』「卷81 列傳第四十六 東夷」、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27) 『三國史記』「卷23 百濟本紀 第一」、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宜乎?」沸流不聽,分其民,歸彌鄒忽以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為輔翼,國號十濟,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28) 『隋書』「卷81 列傳第四十六 東夷」、百濟之先,出自高麗國。其國王有一侍婢,忽懷孕,王欲殺之。婢云:「有物狀如雞子,來感於我,故有娠也。」王捨之。後遂生一男,棄之廁溷,久而不死,以為神,命養之,名曰東明。及長,高麗王忌之,東明懼,逃至淹水,夫餘人共奉之。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

29) [#Youtube] My Comments (March 2024) #고대사 #금척 #키 성장 클리닉, <Blog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4-03-09. Retrieved 2024-04-02.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4/04/youtube-my-comments-march-2024.html.
「百済人」は自分たちを扶餘人の子孫と言い、同時に自分たちを海から渡ってきたので「済」と言いました。これは矛盾でしょうか? 扶餘人は自らを「亡命者」と言いましたが、正確にどこから亡命したのかは分かりません。最初の倭は「巨燕の南にある」と言っていて、ただの「燕の南」なら楽浪郡の海の方ですが、「巨燕の南」なら‘日本海’にあたります。扶餘の子孫である高句麗は自分たちを「河伯」の子孫だと主張し、「河伯」は元々黄河上流の神でした。しかし、現代中国人の祖先によって霊落され、生け贄を要求する神として描かれます。だから諸葛亮が餃子を発明したのです。古代の黄河上流民族は漢民族の祖先によって逃げたので、「河伯」は霊落されて悪神になりました。楚は「楚辭」という詩で「河伯」を称賛しました。 

30) 박영규, 『교양으로 읽는 중국사 1』 (웅진씽크빅, 2005), 17쪽. “복희씨伏羲氏는 중국 민족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신화적 인물로 복희伏羲 또는 복희伏犧, 포희包羲, 포희包犧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전설에서 복희는 인류에게 닥친 대홍수 시절에 표주박 속에 들어가 있던 덕분에 되살이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로 복희라고 했다고 전한다.”

31) 引《汲冢竹書》云:「舜放堯於平陽,取之帝位」
— 汲冢紀年存真

32) My previous Blog post 고대인의 천문학, <Blog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05-29, Retrieved 2023-07-14.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5/blog-post_29.html

33) Jin (Korean state), Wikipedi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8 July 2023 07:01 UTC. Retrieved from 14 July 2023 14:39 UTC.
" a division of the orbit of Jupiter identified with the dragon. "

34) [#東洋史] 한자 공동어의 변천 (상고 ~ 중고 시대까지) [: 박원기 교수님 강의 요약], <Blog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4-04-07, Retrieved 2024-04-17,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4/04/blog-post_17.html.

35)『三國遺事』「卷第三 皇龍寺九層塔」、新羅第二十七代女王爲主, 雖有道無威九韓侵勞. 若龍宫南皇龍寺建九層塔則隣國之災可鎮.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 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逰,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犾, 第九層獩㹮.”

36) 『海游錄』>「申製述海遊錄[下]」>「附聞見雜錄」> 東曰唐史旣云倭。改國號爲日本。今後則願飭下輩。呼我以日本人可矣。余又問貴國人呼我曰唐人。題我人筆帖曰唐人筆蹟。亦何意。東曰國令則使稱客人。或稱朝鮮人。而日本大小民俗。自古謂貴國文物。與中華同。故指以唐人。是慕之也。
우삼동이 말하기를, “당사(唐史)에 이미 이르기를 ‘왜가 국호를 고쳐서 일본이라 하였다.’ 하였으니, 이 뒤에는 원컨대 하인들에게 신칙하여 우리를 일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내가 또 묻기를, “귀국 사람이 우리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또 우리나라 사람의 필첩(筆帖)에 쓰기를 당인의 필첩이라 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하니, 우삼동이 말하기를, “국가의 명령으로는 객인(客人)이라 칭하고 혹은 조선인이라 칭하도록 하였으나 민속(民俗)이 옛적부터 귀국의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한 때문에 당인이라 칭하니, 이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하였다.

37)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동아일보>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5-04-22, Retrieved 2024-05-11, URL: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104406/1

38) RAS Korea digitizes art historian Jon Carter Covell's 2,000 photos, <The Korea Time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1-12-14, Retrieved 2024-05-11, URL: https://www.koreatimes.co.kr/www/nation/2024/05/177_318658.html

39) 『三國遺事』> 金官城婆娑石塔 :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許皇后名黄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初公主承二親之命泛海將指東, 阻波神之怒不克而還白父王. 父王命載兹塔, 乃獲利渉來泊南涯. 有緋㠶茜旗珠玉之羙, 今云主浦. 初解綾袴於岡上處曰綾峴, 茜旗初入海涯曰旗出邊. 塔方四面五層, 其彫𨩐甚竒. 石微赤班色其質良脆, 非此方類也. 本草所云, 㸃雞冠血爲驗者是也.
Geumgwan province Pasa pagoda : The Pasa stone pagoda of Geumgwan Gaya temple was carried by Heo, the queen of King Suro, from Ayuta Kingdom in the West. The princess tried to cross the sea to the east by her parents' orders. But the anger of the sea god failed to start. As the father, ordered her to carry the tower, then she was able to cross the sea easily. It moored on the south coast. It is now called 主浦 because it carries beautiful things such as red sails, red flags, and red jade. The first place where the silk were drop on the hill is called 綾峴. The coast where the red flag first came in is called the 旗出邊. The pagoda has four sides and fifth floor, and the sculpture is very unique. The stone has a color of red spots. The stone is soft. Therefore, it does not come from our country. This is what 本草 said, that the blood of the chicken's crest was examined by dipping it into a stone.

40) User contributions on Wikipedia (朴→‎歴史), <Blog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01-12, Retrieved 2024-05-11,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1/user-contributions-on-wikipedia_83.html

41)『史記集解』「卷三十二」太公望呂尚者東海上人、集解駰案呂氏春秋曰東夷之士…

42) Hirota people of Japan intentionally deformed infant skulls 1,800 years ago, <livescienc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08-17, Retrieved 2023-12-26. URL: https://www.livescience.com/archaeology/hirota-people-of-japan-intentionally-deformed-infant-skulls-1800-years-ago

43) 土井ヶ浜遺跡 <Doigahama Site Anthropological Museu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12-26, Retrieved 2023-12-26, URL: https://www.doigahama.jp/

44) [#東洋史] The Truth about Korean history that Koreans want to hide, <Blog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3-11-14, Retrieved 2023-05-11,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1/the-truth-about-korean-history-that.html
: Descendants of the Chinese Emperor Yao(堯) include the Han Dynasty's Liu(劉) Clan(202 BC - 220 AD). The Rhee(李) Clan is also descended from the Emperor Yao(堯), as evidenced by the Tang(唐) Dynasty took its name from the Taotang(陶唐)DiYao(帝堯). Emperor Yao(帝堯), the descendants of the ChenLi(陳豊氏) have the surname Yi(伊). Laozi(老子), the originator of the Rhee(李) family, was originally an official in the state of Zhou. The surname Rhee(李, 理, 伊) is derived from official of Zhou. 

45) [#東洋史] 乘の意味、中国人が「老子・牛」の関係を自慢するのがヘンタイと感じる理由, <Blogspo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4-05-11, Retrieved 2023-12-26, URL: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4/03/blog-post_8.html

46) 현대구상양식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도상학 강좌 1. 글 : 박용숙 / 미술평론가, 월간 아트코리아 웹진,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9년 7월호, Retrieved 2023-07-14. URL: http://www.galleryartkorea.kr/Main/Main.asp?GotoPage=200907/10/12/200907101215&BK_Main=200907

47) [강원]멕시코 아즈텍 유적에서 발견된 태극무늬 정체는…, 동아일보,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4-11-10, Retrieved 2023-07-14.  URL: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141110/67771258/1

48) 알렉세이 오크라도니코프, 시베리아 고대문화


동아시아에서 소(牛)는 누구의 상징인가? (1) © 2024 by  Jaehyun Park is licensed under CC BY-ND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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