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 씨족 집단이 겪은 역사의 흐름,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

 박씨 씨족 집단의 역사의 흐름,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


(작성 중...)


우선 박씨 씨족 집단의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씨족이 시원으로 삼는 인물부터 역사의 흐름을 살펴봄이 옳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박혁거세의 역사기록부터 확인해 보기로 한다. 


혁거세의 역사기록에 대해 한국, 일본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의도적인 누락이나, 고의적인 평가절하가 많다. 유의미한 영어위키피디아를 바탕으로 우선 설명하고자 한다. 

영어 위키피디아 박혁거세조 :

Hyeokgeose of Silla (69 BC – 4 AD, r. 57 BC–4 AD), also known by his personal full name as Bak (Park, Pak) Hyeokgeose (朴赫居世), was the founding monarch of Silla, one of the Three Kingdoms of Korea. He was the progenitor of all Bak (Park) clans in Korea.

His title Geoseogan (Hangul:거서간 Hanja:居西干) or Geoseulhan (Hangul:거슬한 Hanja:居瑟邯), means "king" in the language of the Jinhan confederacy, the group of chiefdoms in the southeast of the Korean Peninsula.

"Hyeokgeose" was not a personal name, but the hanja for his honorific name, pronounced "Bulgeunae" (Hangul:불그내 Hanja:弗矩内) in archaic Korean, meaning "bright world." 赫 hyeok, a Chinese character that means "bright, radiant, glowing" (from doubling the character for 赤 jeok "red"), is used to transcribe the Korean adjective stem 븕 bylg- > 붉 bulg- "red" (< ancient Korean word for "red; brightly colored; bright"). 居 geo, a Chinese character that means "live, dwell, reside, sit," is used to transcribe the Korean prenominal adjective inflection ㄴ -n ~ 은 -eun "~ that is (bright/red), ~ which is (bright/red)." 世 se, a Chinese character that means "generation; world; era," is used to transcribe an ancient word related to the obsolescent Korean word 뉘 nuy ~ 누리 nuri "world."

Refugees of Gojoseon lived in the valleys of present-day Gyeongsang-do, South Korea, in six villages called Yangsan (Hangul:양산촌 Hanja:楊山村), Goheo (Hangul:고허촌 Hanja:高墟村), Jinji (Hangul:진지촌 Hanja:珍支村), Daesu (Hangul:대수촌 Hanja:大樹村), Gari (Hangul:가리촌 Hanja:加利村), and Goya (Hangul:고야촌 Hanja:高耶村).

In 69 BC, the heads of the six chiefdoms gathered to discuss forming a kingdom and selecting a king. In the forest, at a well called Najeong at Yangsan, a strange light shone from the sky (some accounts describe the simultaneous rising of the sun and moon, as well as a volcanic eruption), and a white horsedescended. Chief Sobeolgong of Goheo discovered a large egg there. A boy came out of the egg, and when bathed, his body radiated light and birds and beasts danced. The egg was gourd-shaped, which has been posited as the origin of the Bak (Park, Pak) name, as it aligns with the Korean word for gourd (박, bak).

Sobeolgong raised him, and the six chieftains revered him. The chieftains made him king when he became 13 years old. The state was named Seorabeol.

Upon becoming king, he married Lady Aryeong, who is said to have been born from the ribs of a dragon.

A different version of the legend claims Hyeokgeose was a son of Lady Saso who was from a Chinese royal family and moved to the Jinhan confederacy.

This legend reflects developments in the city-state stage, the six chieftains representing a loose group of Gojoseon refugees. The story implies the ascendency of the Bak clan over the native peoples, and may indicate horse and sun worship.

The founding date is widely questioned today, as the Samguk Sagi was written from the viewpoint of Silla, claiming Silla's superiority and antiquity over Goguryeo and Baekje. Silla in this traditional thinking is thought to have been founded first, followed by Goguryeo, and then Baekje. --> 이거 존나 어이없네 하

Archaeological evidence, however, paints a different picture, and it is suspected that Goguryeo is the oldest of the three kingdoms, with Silla developing either concurrently with Baekje or after it. --> 고고학적인 증거가 왜 없다는 표현하는가?

According to the Samguk Sagi, Hyeokgeose and his queen traveled the realm in 41 BC, helping the people improve their harvests. The people praised them as the Two Saints or Two Holy Ones (Hangul:이성 Hanja:二聖).

In 37 BC Hyeokgeose built Geumseong (Hangul:금성 Hanja:金城) in the capital city (present-day Gyeongju), and in 32 BC he built a royal palace inside.

The Chinese Lelang commandery invaded in 28 BC but seeing that the people enjoyed piles of grain and did not lock their doors at night, called Silla a moral nation and retreated.

In 20 BC, the king of the Mahan confederacy demanded a tribute. Silla sent Hogong, who was a minister of Silla. The king was angry that Silla sent Hogong and not a tribute. Hogong criticized the king's impoliteness with fortitude. The king was angry at him and tried to kill him, but nearby subordinates stopped the king, and he was permitted to return to Silla.

In 19 BC, Hyeokgeose also sent an emissary upon the death of the Mahan king. In 5 BC, East Okjeo (a small state to the north, later conquered by Goguryeo) sent an emissary, and Hyeokgeose presented him with 20 horses.

According to Samguk Yusa, in the 61st year(4 CE), one day he went up to the sky, and eight days later, his body was scattered on the ground. And the queen also follows the king and dies. The people of the country tried to bury them, but a large snake appeared and disturbed them. Accordingly, the head and limbs were buried separately to create five tombs(五陵), and the name of the tomb was called Sareung. It is called Sareung(蛇陵) because snake(蛇) protect the tomb.

Hyeokgeose maintained control over his kingdom and was one of the few Park rulers to hold complete power over Silla. He died at age 73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바와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바는 다르다.

삼국사기: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001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002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003 전한 효선제(孝宣帝) 004 오봉(五鳳) 005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 006 4월 병진일(丙辰日) 007 일설에는 정월 15일 008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 009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 010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 011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012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013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014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015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016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017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 018의 6부 019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 020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021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022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 023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 001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002 노구(老嫗) 003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004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新羅 始祖 赫居世王)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 400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그 남쪽이 지금의 담엄사(曇嚴寺) 401이다. 마을 어른(村長)은 알평(謁平)이라 하여 처음에 표암봉(瓢嵓峰) 402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두어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는데 본조의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년)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니, 마을 어른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 하여 처음에 형산(兄山) 403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양을 도로 읽고 혹은 탁으로 쓰니 음은 역시 도이다.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남산부(南山部)라 하니 구량벌(仇良伐) 404·마등오(麻等烏) 405·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일러서라고 말한 것은 태조가 설치함을 말함이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3은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니, 마을 어른은 구(俱) 구를 仇로도 쓴다.례마(禮馬)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漸梁) 양(梁)을 탁(涿)으로도 쓴다.부(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니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는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賓之 또는 賓子·氷之라고도 한다.이니, 마을 어른은 지백호(智伯虎)라 하여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다.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니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하였다. 최치원은 즉 본피부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皇龍寺) 406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407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侯) 408의 옛 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
5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里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 409북쪽 산이다.이니, 마을 어른은 지타(祗沱) 只他라고도 쓴다.라고 하여 처음에 명활산(明活山) 410에 내려왔다. 이가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하서지(上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은 명활산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마을 어른은 호진(虎珍)이라 하여 처음에 금강산 411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니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彌村)·궐곡(闕谷)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모두에는 프로파간다가 섞여 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의심가는 점은 다음과 같다.

해당글의 '6부 관련 성씨들의 거짓' 글을 확인하기 바란다. 이를 기반으로 나는 우리가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씨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짓과, 날조, 억압들 그 속에서 우리의 판단들을 공부하고, 비록 각자 나름의 방향을 결정했음에도, 이 마지막 박씨 씨족 집단의 마지막 방향성을 결정할 때에는 모두가 뜻을 함께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글을 확인 바란다. 


고대:


석탈해 이사금 시대 :  (링크)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서기158년 )2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 』라고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이 있다.』고 했다. (링크)

아달라왕은 ... (작성 예정)


박원도 : 가락국 6대 좌지왕의 신하. 신라가 이 나라를 치려 하였는데 왕이 여자를 좋아해서 이런 환란이 온다고 박원도가 왕에게 간하여 왕이 개과천선하였다. <유사 2 기이 2 가락국기> 

--> 본래 내용이 이것만 있지는 않을 것. 탈해왕 설화에서 보듯이 김부식은 논리적 해석 능력이 매우 떨어졌고, 권력을 통해 억지로 역사책을 만든 무능한 인간이었다. 탈해왕 설화에서 탈해가 태어난 시대와 가야를 방문한게 맞지 않는다며 기록을 무시. 이것은 역사적 해석 능력, 논리적 해석 능력의 부재. 이러한 인간이 삼국사기를 저술하게 한 고려라는 국가와 중국계 김씨를 혐오한다. 역겹다.

~> 가야에도 박씨가 있었음을 추측하게한다.

아달라 이사금이 자식없이 죽었다는 기록. 해당 기록에 대한 가능성 1. 사실이라면? 왕비족으로 이어져 오던 박씨가 정통을 위해 조작? 2. 원래 김씨라는 주장까지 가능. 아니면 3. 해당 기록이 사실이 아닐 수도.


신라시대 (중기부터) :

신라에서 추봉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하는데 그 뜻은 모르겠다. <사기 1 신라 1 일성이사금> --> 갈의 의미(링크)


물계자 : 10대 내해이사금 때 사람. 집안이 미미하였지만 활달하고 장한 뜻이 있었다. 포상 8국이 아라국을 치자 왕손 내음의 군사가 격파하였는데 물계자의 공이 컸고 그 후 골포 등 3국의 침공 때에도 크게 공을 세웠는데도 그 공이 알려지지 않자 머리를 풀고 금을 가지고 산에 올라갔다. <사기 48 열전 8 물계자> 내해 이사금 17년과 20년(215년) 일이다.

~> 물계자의 성씨?


물품 : 신라 박제상의 아버지이며 파진찬. 아도갈문왕의 아들이며 파사이사금의 4대손이다. <사기 45 열전 5 박제상>


박제상 : 19대 눌지마립간 때의 충신. 5대 파사 이사금의 5대손으로 모말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 아버지는 물품이다. 18대 실성이사금이 즉위하자 17대 내물이사금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냈는데 눌지 마립간이 즉위하자(417년) 박제상은 삽량주간으로 수주촌간 벌보말 등 3대신의 추천으로 왜에 가서 미사흔을 구해오게 했다. 제상은 거짓 항복하여 왜왕을 안심시킨 후 꾀를 써서 미사흔을 도망시키고 자기는 잡혀 불에 타 죽었다. 왕이 대아찬을 추증하고 제상의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았다. <사기 45 열전 5 박제상>

--> 박제상이 모말이라고도 한다는 기록과 이사부의 사례, 이차돈의 사례를 고려해보면, 성이 '박'이고 '모'와 '이(異)'는 씨로 기능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모마리밀지 (+ 이차돈은 '이차돈' 혹은 '거차돈'이라고 한다<해동고승전> 그런데 거차돈의 '거'는 일본에서는 いる로 발음되는 한자이다. 당대의 신라의 한자 사용 방식이 현재 한국과는 다름을 시사한다.) // 신뢰성있는 해석인지 다른 해석도 찾아보기

~> 그러나, 거칠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일본기록에  '것'으로 발음되는 한자'거'와 이차돈의 '거'를 '이'로 발음하는 두가지로 사용방식이 구별되는 집단이 있었음이 추측된다.

<유사 1 기이 2 내물왕 김제상> 

--> 삼국사기는 김씨 성을 가진 인물이 비정상적으로 많다. 중국 기록에서도 (어느 기록?) 신라에는 박씨와 김씨만 있다고 했으니, 두 성씨가 공평한 비율로 존재할 것인데, 김씨의 비율이 박씨보다 매우 많다. (구체적 숫자 비교 실시), 이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삼국유사의 저자 김일연 모두 그들이 김씨였으며, 당대 김씨는 중국계 김씨들과 신라계 김씨 모두 흉노가 본인의 조상이라 생각했기에, 김씨만의 나라인 신라로 삼고자 하는 사상을 반영한 왜곡 사서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먼저 만들어진 일본서기나 고서기에 비할바가 아니다. 시기를 보건데, 삼국사기는 앞에 쓰여진 일본서기에 대한 소문을 듣고 쓰여진 바, 김부식의 능력은 일본서기 저자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무능한 실력에 역겨운 중화적 욕심덩어리가 사서를 작성한다면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최악의 사례로서 김부식은 기능할 인물이다. 



모례 : 23대 법흥왕 때 일선군 사람. 19대 눌지 마립간 때 묵호자 라는 고구려 중이 일선군에 왔는데 모례가 자기집 토굴에 모셔 두었다. 양나라에서 보낸 향의 소용을 몰라 묻고 다니는데, 호자가 알려주었고 왕녀의 병도 향을 사르고 축원하여 고쳐 주고는 떠나 버렸다. 21대 소지 마립간 때 아도라는 중이 모례 집에 왔는데 호자와 비슷했다. 이들이 신라에 불교를 정착시킨 셈이다.

--> 해당 '모'는 씨로 기능하며 성이 '박'일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향의 출처는 중국 남조인 양이며, 사용방법은 신라 북쪽의 고구려에서 배웠다. 현대 중국계 중심적 역사학계는 중국 북쪽에서 온 북방계 루트로 전수된 불교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남방을 통해 불교가 전래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차돈 : 처도라고도 한다. 23대 법흥왕 때 근신으로 불교를 인정받기 위하여 순교하였다. 동 12년(525년) 왕이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군신이 믿지 않으므로 이차돈이 홀로 주장하다 형을 받게 되자 이차돈이 말하기를 불교는 뜻이 깊으므로 반드시 비상한 일이 있을 것이라 하고 목벰을 당하니 그 자리에서 흰 피가 솟아 나와 여러 사람이 다시는 불사를 반대하지 않았다. <유사>에는 염촉이라 하였다 <사기 4 신라 4 법흥왕> 성은 박씨. 아버지는 모르며 할아버지는 습보 갈문왕의 아들 아진종랑이다. 23대 법흥왕 14년(527년) 제신들이 절의 창건을 반대하자 스스로 목숨을 바쳐 이적을 보여 모두에게 불심을 일으켰다. 이름이 이차돈, 염촉, 이처, 염도 등 여러가지인데 첫 자는 뜻으로 읽고 아래자는 음으로 읽는다고 하였다. <유사 3 흥법 3 원종흥법 염촉멸신>

: 나무위키에는 김씨의 욕망에 따라서, (모은 신라의 중요 인물은 김씨이고 박씨는 흉노 김씨의 정복대상이다라는 망상), 김씨라는 해석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당대 법흥왕의 어머니가 박씨이며, 법흥왕의 부인도 박씨라는 점. 원래 신라에는 시조신으로 박혁거세가 모셔져 있었으나, 이사부의 희생 이후, 불교가 무사히 수용된 점을 생각해보면, 그가 박씨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해석이 매끄럽고 논리적이다. 물론, 흉노계의 김씨, 욕망덩어리쪽의 김씨라면 이해하지 못할 감각이다. 


from: 이차돈.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17. Retrieved 2022-06-17.


이사부: 신라 22대 지증왕 때 우릉도의 오랑캐가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이찬 박이종을 시켜 토벌하였으며 이종을 그 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유사 1 기이 지증왕> 

연제부인 :

법흥왕.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고도 한다. 매금(寐錦)이라는 단어는 『광개토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다. 

법흥왕은 이미 아버지 지증왕 시절 부터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이 40세 전후하여 승하한 것에 비해 그의 뒤를 잇는 지증왕의 즉위시 나이가 64세로 고령이었다는 점에다 인척 관계로 보면 그리 가깝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지증왕에 있어서는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이 있었음이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법흥왕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법흥왕은 지증왕이 50에 접어들 때에 낳은 아들이 되는데 지증왕이 그 이전에 혼인을 안했을리가 없고 그 전에 자식이 없을리도 없다. 그럼에도 법흥왕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왕위에 올랐을 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대체로 법흥왕의 위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영향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은 성씨가 박씨다. 눌지 마립간의 자손들은 눌지 형제들의 자손들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눌지 형제들의 자손에 속하는 지증왕의 부인이 박씨라는 점은 당시 여러 체계에서 꽤나 벗어난 경우가 된다. 하지만 지증왕이 미사흔계에 밀리고 있었던 복호계의 위치에서 생각해본다면 다른 왕비족을 맞아들여서 영향력 강화에 나섰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정이 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신라 왕비로는 꽤나 특이하게 전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법흥왕(추정), 진흥왕진지왕의 부인이 모두 박씨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복호계와 박씨의 연합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법흥왕은 아버지의 나이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 접어들면서 외가인 박씨 집안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본인의 입지를 다졌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동생인 김입종과 함께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에 김입종은 법흥왕 대에 신라 6부 중 한 부의 수장으로 올라가게 된다.


지소부인(또는 보도부인) :

진흥왕 김삼맥종은 입종갈문왕과 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입종갈문왕은 선왕 법흥왕의 동생으로 울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진흥왕의 유년기 때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지 왕위를 물려 받았다. 하지만 즉위 당시 7세의 어린 나이였기에[10] 당연히 직접 정사를 돌볼 수는 없었고 결국 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왕태후가 섭정을 했다고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섭정을 한 태후가 법흥왕의 왕비이자 외할머니인 보도부인인지, 모친인 지소부인인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법흥왕의 이자 입종갈문왕의 비인 지소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학계에서도 지소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진흥왕이 즉위한 직후 섭정을 시작한 태후는 대사령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켰고 문무관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541년 태후는 법흥왕 후기부터 공석이었던 병부령(국방부 장관)에 명장 이사부를 임명하여 국방 안정화를 시도하였다. 544년 권력이 이사부 1인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부령을 2인으로 늘렸는데 이후 신라는 모든 관부의 장관을 2인으로 하는 관습이 정착되었으며 법흥왕의 명으로 건설이 시작된 흥륜사가 완공되었다. 545년에 병부령 이사부가 역사서 편찬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여 거칠부에게 명해 전국의 문서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이 때 내린 명령은 이전에 내린 명령 기록과는 달리 삼국사기에서 태후를 언급하지 않고 진흥왕이 직접 내린 명령으로 확실히 기록되었기 때문에 551년이 아닌 545년부터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고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수렴청정 제도를 살펴 보면 국왕 뒤에서 대비가 결정한 후 대비의 조언을 듣고 어린 국왕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신하들에게 명하는 것이 수렴청정의 정석적인 형태였다.[11] 때문에 진흥왕이 직접 명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섭정을 벗어났다는 확고한 근거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부분이다.

태후가 언제까지 섭정을 했는지는 기록에 나와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진흥왕이 18세가 되던 551년 '나라를 연다'는 의미인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꾸게 되므로 551년 정월부터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고 학계에서는 유력시하고 있다. 

다시, 이사부 :

이사부는 562년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미 이때 60대 후반의 고령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더이상 현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활발히 수행할만한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을 고려할 때, 고령이었던 이사부는 새로 점령한 단양 ~ 충주 지역에 남아 신라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병부로 돌아가 왜구 등 후방의 침입을 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이사부는 아래 단락에도 나오듯이 562년 대가야 정복 때 다시 등장하는데, 당시 대가야의 완전 정복은 어느정도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커다란 무력 충돌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령의 이사부가 직접 출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친정을 초기부터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진흥왕의 기록상 친정 시작되기 얼마 전에 있었던 독성산성 전투 및 도살성-금현성 전투를 보더라도, 중요한 전투와 대전이 끝나고, 국가의 명운을 건 전투는 없기 때문에,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던, 진흥왕에게 친정을 맡길수 있었을 것이다. 

또, 진흥왕 섭정기에 지소태후가 이사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면서도 끝까지 이사부를 신뢰했던 것을 보면 섭정기부터 진흥왕과 이사부 역시 신뢰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사부 : 태종이라고도 하며 삼국사기에는 '김씨',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나온다. 17대 내물이사금의 4대손이다. 22대 지증마립간 6년(505년) 이사부를 실질국의 군주로 삼았다. 동 13년(512년)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모계로 항복시켰다. 24대 진흥왕 11년(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싸워 병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공격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 두 성을 취하고 증축하여 갑사를 주둔시켜 지키었다. 고구려군이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돌아가는 것을 이사부가 추격하여 이겼다. 동 23년(562년) 왕이 이사부를 시켜 가라국을 습격했는데 나라를 멸하였다. <사기 4 신라 4 지증 마립간, 35 잡지 4 지리 2, 44 열전 4 이사부, 사다함>

: 위의 기록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박씨이었던 연제부인과 김씨인 지소부인이 권력을 쥐고있던, 법흥왕 초기와 진흥왕 초기 모두 권력과 원활히 소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전쟁영웅이던 이사부를 적극적으로 견제하지 않을 것을 보면, 크게 견제할 필요가 없거나 당대의 소통이 원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의 시대부터 본격적인 신라의 재부흥이 시작되는데, 이는 본래 신라의 건국집단이던 박씨 집단이 김씨 집단에게 협력하기로 결정한 덕분에 시작되었다. 이는 김씨가 신라 왕위를 차지한 후 최초의 박씨 왕비가 23대 법흥왕의 아버지, 22대 지증왕의 왕비임을 통해서 확인된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법흥왕이 후에 신라의 재부흥을 이룰수 있었음은, 이 권력 연합에서 비롯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애초, 김씨는 후대의 중화계의 삼한날조와 김일제 날조에 속은 것으로 봐서, 당대 고구려-백제-신라-일본 왕조에게 통용되던 암묵적 사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통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취를 이룰수 있었음은, 해양민족의 후계들에게 전승되던 상구조를 깊이 이해할수 있었던 이면의 집단이 김씨 왕조를 도왔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에 와서 평가해보면, 과연 그 판단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던 김씨 왕조에게 맡긴 결과 936년 신라는 멸망한다. 유감이다). 당대, 박씨이던 이차돈이 직접 박혁거세를 신앙하는 종교보다,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 희생한 것을 고려하면, 이러한 이해관계가 그 바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에는, 법흥왕 시대의 이사부의 적극적 군사활동을 생각해보면 박씨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24대 진흥왕 어렸을 당시 섭정은 법흥왕의 딸인 김씨 지소부인인데, 섭정이던 그녀는 이사부를 견제만 했을뿐, 적극적으로 군권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을 통해서 추정해보면 김씨라는 해석도 충분히 매끄러운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해당 주장은 김씨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한국역사학계 전반의 해석이다. 대체로 김씨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애초에 그가 박씨인지 김씨인지는 애매하기 때문에, 중화계들과 흉노계들이 그렇게나 김씨로 해석하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의도를 가질 필요도 없고 강하게 부정할 필요도 없다. 

--> 삼국유사에서는 박이사부. 김부식의 사기에서는 김이사부로 기록된다. 


물력 : 24대 진흥왕 때 대아찬 거칠부의 아버지. 내물이사금의 4대손. 이찬이었다. 잉숙 각간의 아들이다.

~> 거칠부는 '김씨'라 전한다. 거칠부가 일본서기의 구지포례로 추측되는바. 거는 궂 음으로 추정.


박경한 <삼국사기 6 신라 6 문무왕>


박뉴 : 30대 문무왕 원년(661년) 김인문의 휘하로 전사한 각간이다. <사기 44 열전 4 김인문>


박도유 : 671년 한성도독주 박도유는 문무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이에대해 김부식은 고의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인 배신자로 평가했으나, 진정 배신자는 당나라를 끌어들인 김씨이다. 중국계 김씨답게 김씨에게 유리하게 서술한다. (추가 연구 필요) <사기 7 신라 7 문무왕 하>


31대 신문왕 2년 (682년) 해관(바다관련 관리) 박숙청이 아뢰되 동해 중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를 향하여 온다고 하였다. 왕이 일관(날 일 관리 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니 돌아간 문무왕은 해룡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김유신은 천신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보배를 줄 것이라 하였다. 떠 있는 산에 대나무 하나가 있어 그것으로 저를 만들어 부니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없고 풍우가 평정하였다. 그래서 만파식적이라 이름하였다. <유사 2 기이 2 만파식적>


박인범 : 신라 열전에서 설총에 대하여 기술하고 끝에 문명이 남은 사람들의 이름을 늘여놓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 <사기 46 열전 6 설총> 

--> 기록이 없어서 기록치 못한다 하였으나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기록이 있었으나 기록하지 않은 것임을 의심한다. 그 말대로 없었다면, 박인범의 비기록에 비해 설총의 기록이 남아 있음은, 그들이 설씨였기 때문. 중국계 성씨인 설씨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남겨놓고, 나머지 기록에는 고의적 기스라이팅을 하였던 중국계들에게 잃어버려진 기록일 것이다.



중세:

고려시대 :

 - 신라말기 ~ 고려 초기

(신라 몰락기의 박씨)


경문왕(景文王) (861~875년 재위)

: 김씨이다. 하지만 역사적 흐름상 중요한 인물이기에 기록한다.


진성여왕(眞聖女王)(887~897년 재위)

: 아버지는 김씨 경문왕이며, 어머니는 문의왕후 김씨이다. 

: 아자개 칭 사불성(沙弗城)장군 885년에서 887년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889년 견훤이 반란한다. 원종-애노의 난(889년)이 발생.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의 후백제 건국(892년) 발생. 신라 몰락의 시작을 알린다. 


신덕왕 (912~917년 7월 재위)

: 신라 후대 중, 최초의 박씨 왕이다. 그의 장인어른은 49대 김씨 헌강왕(875년~886년)이다. 신덕왕 전의 임금은 


오월국(吳越國) 박암(朴巖) & 후사벌왕(後沙伐王) 박언창(朴彦昌) 

: 박언창. 916년 사벌국 건국. 917년 칭 후사벌왕. 918년 아자개 왕건에게 귀부. 923년 춘부소경 상주국 박암(광수암) 오월국 혹은 후당 방문. 더욱 상세한 정보는 다음 링크에, 연구자료 => (link)


경명왕 (917~924년 재위) (912~917년 태자)

: 신덕왕의 첫째 아들이다. 경명왕의 아들은 사벌대군 박언창(5), 고양대군 박언성(2), 밀성대군 박언침(1) 등이 있다.


경애왕 (924년 8월(음) ~ 927년 11월(음) 재위)

: 신덕왕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경명왕의 뒤를 이었다. 경애왕의 아들은 금성대군 박교순(錦城大君 朴交舜) 울산박씨, 계림대군 박순현(鷄林大君 朴舜玄) 경주박씨이다.


: 그런데 분석해보면, 실제로 신라 후기의 왕위에 오른 박씨가 실제 혁거세의 후손이 맞다고 가정하더라도, 경명왕의 아들이 5명이나 되며, 그 5명의 아들들이 모두 현재의 각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추측컨데, 스스로가 각각 각자의 이유로 박씨의 후손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있는 집단이 각지에 존재했고, 이들이 고려 성립기에 모두 박씨로 결정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들 중 견씨를 자청하던 견훤 - 상주박씨의 중시조 견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인질의 성이 진씨인 것과, 견의 중세 중국어 발음이 진으로 같은 것을 고려하면, 견훤은 본래 백제의 진씨 일족과 관련이 있고, 이 진씨와 신라 진한이 관련있다는 추측이 있었을 것이다. 당대 사람들도 이를 이해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박씨로 바꿘 것이라는 추정 제시한다. 

이와같이, 각기 나름의 이유로, 또 연관성을 근거로 해서 박씨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는 박씨 유전자 분포를 보면 신뢰가 높아지는 해석이다. 박씨에는 고대 중국 진나라와 관련 있다고 추정되는 하플로 Q가 한국인 평균보다 높은 4~5% 존재한다. 이는 정말로 고대 진나라 집단이 박씨로 오해되어 포함된 듯하고, 또 O1b계가 47.9%로서 다른 어떤 한국인 성씨군보다 높은 것을 통해 추정해보면, 대체로 O1b계 민족집단이 박씨를 선택한 듯하다. 그럼에도 O2계 하플로가 30%가량 존재하는 것은 왕씨에서 박씨로 바꾼 사례, 진나라 사칭 중국인 집단 등 신라-고려시대 이민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평균 O1b계 비율 : 34.6% // O2계 비율 : 48.8% // N계 비율 : 4.6% // Q계 비율 : 1.4% // C계 비율 : 12.3% // D계 비율 : 1.6%). 


박지윤

평주의 지배자였던 찰산후(察山侯) 박적오(朴赤烏, 朴積古)의 손자이며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 박직윤(朴直胤)의 아들이다. 아버지 박직윤이 평산에 13개 성을 설치하고 궁예에게 귀부(歸附)한 뒤로 패서 지역(浿西地域)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 

사서 및 묘지명에 따르면 박지윤은 할아버지 찰산후 때부터 이미 박(朴)씨 성을 사용했고 성씨가 내려와 현재의 평산 박씨와 평주 박씨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박지윤의 거점지인 평주가 고구려의 옛 땅이었고 자기 아버지가 대놓고 대모달을 자칭한 것을 보면 박지윤은 고구려계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구려 관직을 자칭한 것치고는 성씨가 전형적인 신라계 성씨인 박씨인 점이 모순인데 박씨는 예나 지금이나 본래 중국에도 없는 성씨로 모든 본관이 박혁거세의 후손인 순수한 신라계 성씨이기 때문. 옛 고구려에도 박씨 인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발해: 이민자 중 인물 2명, (+발해의 성씨 목록.)


고려 태조: 배현경, 복지겸 , 신숭겸

배씨? 복씨? 신씨의 정체는? (링크)

    지백호(배씨)는 법흥왕 추봉 문양공(文讓公)으로 무열왕 추봉 장렬대왕(壯烈大王)이 된다.

    지백호(정씨)는 법흥왕 추봉 문화공(文和公)으로 무열왕 추봉 감문대왕(甘文大王)이 된다. [ 아들: 동(同) 손자: 가도(可都) ]

    석강수 이야기에도 나오는 6부? 석강수의 출신이 경기도 지역의 6부이다. 

    왜 하필 문'양'공일까? 왜 문'화'공일까? 왜 '감'은 석씨와 비슷한 한자를 사용하였나?


박윤웅(朴允雄)
: 울산 박씨의 시조이다. 고려 태조 왕건시대 사람이다.


박영규 
: 순천 박씨의 시조이다.
  • 순천 박씨: 견훤의 사위로 후백제에서 장군을 한 박영규를 시조로 한다. 사육신 박팽년 중종반정 일등 공신 박원종을 배출했다. 남한 내 인구가 10만에 달하는 박씨 중 4번째로 큰 집안이다. 35명의 문과급제자와 1명 상신이 있다. 무과급제자가 29명이다. 강남대군 박언지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는데, 애초에 박언지라는 인물의 실존여부가 불분명할뿐더러 실존했다 쳐도 박영규보다 아들~손자뻘의 인물이므로 맞지 않는다. 현재 순천 박씨 종친회측에서는 가문의 뿌리를 소개할 때 박언지와 박혁거세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박영규부터 언급한다. 박영규의 출자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고려 중기 ~ 고려 말기

(고려 치하의 박씨)


박술희, 김견술

박양유군사적, 외교 관련으로도 꽤 뛰어났는지 서희최량과 함께 상군사로 북방에 나가기도 했다. 후 거란과의 교섭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단편적인 모습이 보인다.


완안 함보 (完顏 函普) : 941년 ~ 960년

: 김씨일 확률이 높다. 애초에 김알지 전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김씨의 원래 근원은 남방 해양민족이다. 또, 흉노계 김씨가 망상해서 이민해 오기 전의 김씨는, 박씨-김싸 상호간의 결혼과 양자 입속으로 인해 유전적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일단 전통상으로는 김씨계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자세히... 링크


의흥 박씨원래 왕씨로 고려 왕족이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도피하여 은둔하였고, 병부 상서를 지냈던 왕을규가 외가의 성을 따라 박씨로 성을 바꾸고 의흥(義興)을 본관으로 삼아, 그가 의흥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복성하지 않고 박씨 성을 계속 써왔다.

= <거짓 박씨> 주의.


박서 장군 :
General Park Seo (Defeated the Mongol Army of Sartak at Battle of Kusong 1231)


박항(朴恒) 

추가자료 - 원구(元寇)와 박항(朴恒) (링크)

(1227 ~1281). 춘천(春川) 박씨의 시조. 초명은 박동보(朴東甫), 자는 혁지(革之). 관련사건: 여몽연합군.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수염이 아름다웠다 한다. 고종(高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몽고군이 춘천을 함락시킬 때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몽고군의 포로가 되어 연경(燕京)으로 끌려갔다. 박항은 어머니를 두 번이나 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림원에 보직되었다가 충주(忠州) 지방관이 되어 치적을 인정받아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다.또한, 경상도와 전라도를 자세히 조사하고 살펴본 치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1269년(원종 10)에 우사간(右司諫)으로 몽고에 가서 원종(元宗)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렸으며, 이듬해에는 하정사(賀正使)로 또다시 몽고에 다녀왔다.충렬왕(忠烈王) 초에 승선(承宣)이 되어 인사행정을 관장했는데, 당시 정방(政房)에서 이를 행할 때 집에 나가 잤으므로 인사를 청탁하는 자가 문전을 메웠다. 그러나 박항은 인사행정을 마치고 궐내를 나옴으로써 그 폐단을 없앴다.1277년(충렬왕 3)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그 해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278년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고, 그 해 왕과 공주를 수행해 원나라에 갔다가 참문학사(參文學事)가 되었다.김주정(金周鼎)·염승익(廉承益)·이지저(李之氐) 등과 함께 필도치(必闍赤)가 되어 궐내에서 기무(機務) 처리에 참여했고, 그 해 또 왕을 수행해 원나라에 갔다. 1279년에 찬성사(贊成事)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취하였다.한편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군량·전쟁무기를 징발하였다. 그래서 원나라의 원수 흔도(忻都), 우승(右丞) 홍다구(洪茶丘) 등을 보내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횡포를 일삼았다.이에 박항은 왕으로 하여금 원나라 세조에게 장계(狀啓)를 보내게 해 왕을 좌승상행중서성사(左丞相行中書省事)에, 김방경(金方慶)을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에 임명하게 해 흔도와 홍다구의 횡포를 견제하게 하였다.제2차 일본정벌 때 고려의 전쟁물자의 공급책과 군사기밀에 대한 조처도 박항에게서 나왔다.박항은 문장을 잘하고 마음이 너그러워 사람들을 잘 접대하고 부지런히 공무를 보아 수령으로서 그 치적에 뛰어났으나, 고집이 강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박구( 朴球 )

: 고려후기 동지밀직사사, 지밀직사사, 찬성사 등을 역임한 무신. 1289년 사망. 관련사건: 여몽연합군. 

조선시대 :

***

(몽골치하의 박씨 & 조선 초기의 박씨) 

이성계의 아버지? 할아버지계 부인이 박씨 성을 가져,, 아마도 몽골측에 귀부할지, 고려측에 귀부할지 고민하던 전주 이씨 집안을 고려 측으로 끌어들인 장본인. 이건 그들이 삼국사기의 신라6부의 이씨라고 믿었기 때문으로 추정됨. 당대에 본관을 전주라고 주장했으니, 남반도계 민족이라고 믿고 당대 가문이 도움을 주었을 것.

이성계 당시 박씨 장수..

대마도 정벌 당시,

세종의 아들의 아내

그리고 이건, 조선 ?대 왕 ??(조선 초기 중) 가문 멸망으로 배신당함. (삼국사기 왜곡으로 1번째 배신당하고, 견휜(원래 이씨)의 살해로 2번째 배신 당하고, 3번째로 조선에게 배신 당했으니, 이 정도면 원수 집안이 아닌가?)


박연:
: 노성 박씨의 시조이다.

***
(15세기 조선 군인으로서의 박씨)

이후 지속적으로 박씨는 조선의 무과에 도전한다. +조선왕조는 초기 이후부터 본인들의 군대를 신뢰하지 못했다. 신뢰하지 못하였기에 의도적으로 군사력을 약화한다.

  • Park Soon ko:박순 (고려) (?-1402). Military subordinate to Taejo of Joseon. Accompanied Taejo in all military campaigns from the anti-Japanese pirate campaigns in the south to Liaodong invasion of 1388. Personally delivered the message of Redeployment from Wihwado to King Ui of Goryeo in behalf of Taejo. Was appointed the high commander of Joseon Army following the founding of the dynasty. Killed during the Northeastern Rebellion of 1398 ko:조사의의 난


  • Pak Paeng-nyeon (1417–1456) was a scholar-official of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is known as one of the six martyred ministers. He was born to a yangban family of the Suncheon Pak lineage, and was the son of high minister Pak Jeongrim. He joined in a plot to overthrow Sejo and restore Danjong in 1456, but the plot was uncovered through the betrayal of fellow plotter Kim Jil. Sejo admired Pak's abilities and offered to pardon him if he were to deny his involvement and acknowledge Sejo as his king. Park died in prison from torture. Revered as a model of Confucian Loyalty. Alone among the six martyred ministers to have a surviving male descendant. One of his female servant passed off his youngest son as her own, thereby ensuring the family name. All other family and relatives were executed.


  • Park Joong Seon ko:박중선 (1435–1481) Passed the National Military Service Exam with the highest score in 1460 at the age of 35. Held in high esteem by the new King Sejo for his excellent riding and archery skills, frequently accompanying the king as his personal body guard on hunts. Married off his daughter to the Crown Prince in 1366, becoming an in-law of the King. In 1367, appointed a Provincial General to put down the Northeastern Rebellion, earning further accolades becoming the youngest Minister of Defense in Joseon history.


  • Park Jin (1560–1597) Served in the military intelligence following his passing of the national military service exam. Transferred to Infantry 4 years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Defeated by the Japanese at the Battle of Miryang (Clan home), before regaining his honor in follow on victories, including the battle of Yeongcheon and the Second Battle of Gyeongju. Was instrumental in convincing Sayaga, the highest ranking Samurai General of the invasion force to surrender. In 1597, near the end of the war, a Ming Chinese General 누승선(婁承先) accused him falsely of disobeying official order, tortured him, resulting in his death. Korean investigators confirmed broken ribs and sternum on his body.
  • ***
    (15세기 만주족으로서의 박씨)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 1월 12일 무오 2번째 기사 1455년 명 경태 6년 함길도 도체찰사에게 야인의 강-약과 다-소를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다

    "화라온(火剌溫)320) ·수빈강(愁濱江)321) ·구주(具州)322) 등지의 올적합(兀狄哈)323) 은 깊고 먼 내지(內地)에 거주하고 일찍이 귀순(歸順)하지 않았으므로, 그 부락(部落)과 족류(族類)의 강약(强弱)과 휘하(麾下)의 이름과 숫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올량합(兀良哈)324) 과 알타리(斡朶里)325) ·여진(女眞)326) ·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327) 내의 추장(酋長)들은 등급을 나누는 것이 어렵겠으므로 아울러 1등으로 시행하고, 비록 추장(酋長)의 부락이 아니더라도 족류(族類)가 강성한 사람도 또한 1등으로 시행합니다. 그 나머지 각 사람들은 족류(族類)의 강약을, 2등·3등·4등으로 나누어, 그 강약을 상세히 알 수 없는 자들도 또한 사유(事由)를 갖추어서 후일(後日) 이 참고(參考)에 빙거(憑據)하게 합니다.

    회령진(會寧鎭)에서 서쪽으로 13리 강내(江內)에 거주하는 알타리(斡朶里) 중추(中樞)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는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추장(酋長)은 1등이고, 아들 청주(靑周)는 2등이고, 차자(次子) 3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데 모두 미약(迷弱)합니다. 사직(司直) 고나읍다손(高羅邑多孫)은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사직(司直) 고나린가(高羅麟可)는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호군(護軍) 동이린가(童伊麟可)는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양리인(楊里人)331) 동후후리(童候候里)는 4등이고, 아들 삼하(三下)·차자(次子) 삼파(三波)는 4등입니다. 양리인(楊里人) 이다비(李多非)는 4등이고, 아들 좌오하(佐吾下)·차자(次子) 좌화로(佐化老) 이상은 4등입니다. 위의 양리인(楊里人) 10호(戶) 아울러 15가(家) 내에 장정(壯丁)이 30여 명인데, 이상은 아울러 오음회(吾音會) 사람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마구음파(馬仇音波) 등의 관하(管下)입니다. (동씨)

    종성진(鍾城鎭)에서 서쪽으로 20리 강외(江外) 수주(愁州)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 도만호(都萬戶) 유상동개(柳尙同介)는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추장(酋長)은 1등이고, 아들은 1명인데 미약하며, 형 부만호(副萬戶) 반거(班車)는 2등입니다. 부만호(副萬戶) 어치개(於赤介)는 2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아우 모이내(毛伊乃)는 3등이며, 종형(從兄) 상호군(上護軍) 소고(所古)는 3등이며, 조카 호군(護軍) 유요시로(柳要時老)는 3등이며, 아우 어리응거(於里應巨)는 3등이고, 그 아들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아우 좌화기대(佐和寄大)는 3등이며, 조카 사안(沙安)은 4등이고, 그 아들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시시가(時時可)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노로호(老老好)는 4등이고, 아들 3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아을거(阿乙巨)는 4등이고 아들 3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말을로(末乙老)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소고로(所古老)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피응자(彼應者)는 4등이고, 아들 3명은 미약합니다. 다양가(多陽可)는 4등입니다. 나음다(羅音多)는 4등이고, 아들은 1명입니다. 양리인(楊里人) 사직(司直) 야상개(也尙介)는 4등이고, 아들 소중가(所衆可)는 4등이고, 차자(次子)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소시내(所時乃)는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사직(司直) 소우대(所尤大)는 4등이고, 차자(次子) 2명은 미약합니다. 어부개(於夫介)는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사직(司直) 나송개(羅松介)·차자(次子) 소오개(所吾介)·차자(次子) 자읍개(者邑介) 이상은 4등이고, 차자(次子) 3명은 알지 못합니다. 남개(南介)는 4등이며, 다장개(多將介)는 4등이고, 아들 3명은 미약합니다. 위의 마을 24가(家)내에 장정(壯丁)이 53명입니다. 노사(老沙)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미약합니다. 야거(也車)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자롱개(者弄介)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미약합니다. 사주(沙主)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미약합니다. 사토(舍土)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은 알지 못하고, 차자(次子) 2명은 미약합니다. 사직(司直) 어부내(於夫乃)는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3등이며, 사위[女壻] 두이응거(豆伊應巨)는 4등이고, 그 아들 2명은 미약합니다. 마하(麻下)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미약합니다. 거거(巨車)는 4등이며, 아우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벌이응거(伐伊應巨)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차자(次子) 2명은 미약합니다. 태수(太守)는 4등이고, 아들 3명은 미약합니다. 가하(可下)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오로도(吾老都)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미약합니다. 도을지(都乙之)는 4등이고, 상가(尙家)는 4등이고, 야시(也時)는 4등이며, 여칭거(汝稱巨)는 4등이고, 아들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차자(次子) 3명은 미약합니다. 비랑개(非郞介)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미약합니다. 이시개(伊時介)는 4등이고, 아들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차자(次子) 2명은 미약합니다. 다음파로(多音波老)는 4등이고, 거부(巨夫)는 4등이고, 이칭개(伊稱介)는 4등입니다. 모을오(毛乙吾)는 3등이고, 아들 보청개(甫靑介)는 4등이고, 차자(次子)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을지대(沙乙只大)는 4등이고, 아들 보랑개(甫郞介)는 4등이고, 차자(次子)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23가(家) 내에 장정(壯丁)이 40명인데, 아울러 유상동개(柳尙同介)의 관하(管下)입니다. (유씨)

    종성진(鍾城鎭)에서 서쪽으로 1백 95리 아치랑귀(阿赤郞貴)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 도만호(都萬戶) 김도을온(金都乙溫)은 아들이 없고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추장(酋長)은 1등이고, 수양(收養) 조카 도지휘첨사(都指揮僉使) 김다롱가(金多弄可)는 1등이고, 그 아들 사직(司直) 아응산(阿應山)은 4등이며, 조카 호군(護軍) 김당(金當)은 시위(侍衛)하고 도만호(都萬戶) 김대두마(金大豆麻)의 아들이니 2등이며, 그 아우 다구(多具)는 2등이며, 그 조카 사직(司直) 사다(舍多) 롱개(弄介)는 2등이고, 그 아 들 와랑개(臥郞介)·차자(次子) 오리개(吾里介) 이상은 4등이며, 그 조카 만호(萬戶) 김토시(金土時)는 2등이고, 그 아들 나롱개(羅弄介)·차자(次子) 남낭개(南郞介)·차자(次子) 이을대(伊乙大) 이상은 4등이며, 그 조카 사직(司直) 강내(江乃)는 3등이고, 그 아들 3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6가(家) 상아치랑귀(上阿赤郞貴)·하아치랑귀(下阿赤郞貴)에 거주하는 사람 아울러 3백여 명은 모두 김도을온(金都乙溫)의 관하(管下)입니다. 도지휘(都指揮) 다이내(多伊乃)는 족류(族類)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수대(藪大)는 4등이고, 차자(次子)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그 동복 동생[同生弟] 지휘(指揮) 와허내(臥許乃)는 3등이고, 아들 6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만호(萬戶) 아하(阿下)는 족류(族類)가 강성하고, 지휘(指揮) 라답자(剌答子)는 3등이고, 아우 5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삼촌[叔] 2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주장개(住將介)는 3등이고, 소롱거(所弄巨)는 3등이고, 야상거(也尙巨)는 3등입니다. 지휘(指揮) 흉구대(凶仇大)는 3등이고, 아들 3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사람들은 아울러 김도을온(金都乙溫)의 관하(管下)입니다. (김씨)

    경흥진(慶興鎭)에서 북쪽으로 30리 강외(江外) 회이춘(會伊春)에 거주하는 여진(女眞) 호군(護軍) 박파이대(朴波伊大)는 고(故) 지휘(指揮) 말아토(末阿土)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사직(司直) 오을빈개(吾乙賓介)는 시위(侍衛)하고, 차자(次子) 사정(司正) 사영부하(沙迎夫下)·차자(次子) 사이은가무(沙伊隱加茂)·차자(次子) 사정(司正) 소이가무(所伊加茂) 이상은 4등이고, 아우 호군(護軍) 박보을고소(朴甫乙古所)는 3등이고, 아들 야당지(也堂只)·차자(次子) 야다무(也多茂)·차자(次子) 야랑가(也郞可)·차자(次子) 야라가(也羅可)·차자(次子) 료고(了古) 이상은 4등이고, 아우 박부(朴夫)는 4등이고, 아들 가모리(加吾里)는 4등입니다. 여진(女眞) 은속시응가(殷束時應可)는 4등이고, 아들 어을소(於乙所)·차자(次子) 소롱가(所弄可) 이상은 4등입니다. 여진(女眞) 호군(護軍) 김주롱가(金朱弄可)는 3등이고, 아들 지휘(指揮) 비상가(非尙可)는 3등이고, 차자(次子) 자리가(者里可)·차자(次子) 소로가(所老可) 이상은 4등이고, 차자(次子)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조카 김소말응가(金小末應可)는 고(故) 소징가(所澄可)의 아들인데 4등이고, 아우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6가(家) 내에 장정(壯丁)이 21명입니다. (박씨)


    경흥진(慶興鎭)에서 북쪽으로 30리 강내(江內) 여오리(汝吾里)에 거주하는 여진(女眞) 만호(萬戶) 김모다오(金毛多吾)는 3등이고, 아들 도쌍가(都雙可)·차자(次子) 이마두(伊麻豆) 이상은 4등이고, 아우 부사직(副司直) 김모하(金毛下)는 4등이고, 아들 진홍오(津紅吾)·차자(次子) 연다(延多)·차자(次子) 간아지(干阿之) 이상은 4등이고, 차자(次子)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여진(女眞) 사정(司正) 김이랑가(金伊郞可)는 4등이고, 아들 호군(護軍) 가화(家和)는 4등이고, 아우 김야하(金也下)는 4등이고, 차제(次弟) 1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여진(女眞) 사정(司正) 박단용가(朴丹用可)는 4등이고, 형(兄) 모하례(毛下禮)는 4등이고, 아우 두롱가(豆弄可)는 4등이고 차제(次弟) 아양가(阿陽可)는 4등입니다. 여진(女眞) 김모랑가(金毛郞可)는 4등이고, 아들 사종가(沙從可)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8가(家)내에 장정(壯丁)이 18명입니다.


    from: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 3월 24일 기사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함길도 도체찰사 이사철이 야인 부락과 족류의 강약을 등급매겨 아뢰다.국사편찬위원회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6-12. Retrieved 2022-06-12.



    ***

    (차별받는 박씨 - 향화인)

    조선과 가까이 있다보니, 개중에는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땅 안으로 들어와 사는 자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을 조선에서는 '향화호인'(向化胡人) 혹은 '향화인'(向化人)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조실록 1608년 8월 25일 <광해군일기>

    경기도 용인(龍仁)에 사는 박길상(朴吉祥)이 이끄는 80여 명의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향화인들이 용인 고을 5리 안에 있는 장터의 큰 길가에 7~8년 동안 살고 있으면서, 박길상이 부하 16~18명을 거느리고 말을 타거나 혹은 걸으면서 활과 화살 및 긴 칼과 몽둥이를 무기로 삼아서 집단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물건을 빼앗는 도적질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향화인들은 읍내의 땅을 원래 주인들한테 빼앗아서 농사를 짓거나 곡식을 마구 베어가는가 하면, 자신들이 키우는 수많은 소와 말들을 멋대로 풀어서 키우고 그 가축이 남의 땅에 들어가 곡식들을 먹어치우도록 내버려 두는 식의 행패를 저질렀다. 이런 행패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관청에 알려 고발을 하면, 관청에서 향화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관아로 나오라고 하는데, 문제는 관청의 명을 알리려고 온 사람한테까지 향화인들이 마구 때리며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
    (차별받는 박씨 - 백정)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의 이행은 백정의 몰락이 발생하는 시대이다. 백정은 본래 ... 일반 백성을 의미 ... 그런 단어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몰락하는데...

    박서방과 고기 한근 이야기, 

    옛날 시골 장터에서
    박씨성을 가진 나이 지긋한 백정이
    고기를 팔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젊은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한 양반이 말하기를
    "어이 백정! 고기 한 근만 다오"하니

    백정이 "예, 그러지요"하면서
    솜씨 좋게 고기를 칼로 썩 베어 내어 주었습니다.

    또 다른 한 양반은
    상대가 비록 천한 백정이긴 했으나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기가 민망하여서
    "박서방! 고기 한 근 주시게"하고 말하자

    백정이 "예, 고맙습니다"하면서
    역시 솜씨 좋게 고기를 잘라 주는데
    먼저 양반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때
    먼저 양반이 소리쳐 따졌습니다.
    "이놈아! 같은 한근인데
    어째서 이 양반 것은 나 보다 배가 많으냐?"

    그러자 그 나이 지긋한 백정은
    "예. 그야 손님 고기는 백정이 자른 것이고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자른 것이니까 그렇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옛 말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라고 했습니다
    말 잘해서 손해 보는 법이 없단 말이지요.

    from: 백정와 박서방. 세종의소리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15. Retrieved 2022-05-15.

    (+4학년 국어? 국정? 교과서에도 나와있어) (추후 자료 찾아서 표기)


    백정설화 : (링크)

    전래 설화의 하나. 하늘나라의 소(또는 왕자)가 잘못을 저질러 그 벌로 인간세계에 내려와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고 죽어 그 혼이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간다는 이야기. 백정설화는 내용의 특수성때문에 주로 백정사회에서 폐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수집된 자료를 보면 주제가 거의 통일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3000년전 천국에 인마라는 힘센 소가 하느님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는 늘 사람되기를 염원하였다. 이를 안 하나님이 30일 동안 쑥만 먹고 눈을 감지도 말고 앉지도 말고 서 있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인마는 그대로 지키겠다 하고 도를 닦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이를 시험하려고 뿔이 센 마귀와 발톱이 뽀족한 두 마귀를 보냈다. 소는 며칠이 지나자 집에 두고온 아내소와 자식들이 생각나고 쑥은 써서 먹기 힘들고 서 있으려니 힘이 들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마귀가 나타나 방해를 하니 화가 나 마귀를 죽여 버렸다.

    이를 안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벌로 소를 10년간 부리라고 했다. 소는 사람이 끄는 대로 땅에 내려왔다. 10년이 지나도 하나님한테서 아무 소식이 없자 인마소는 화가 나서 뒷발로 사람을 차 죽였다. 사람을 죽인 죄로 하나님은 코뚜레를 꿰어 죽도록 사람에게 충성을 하게 했다. 살생한 소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주인한테 충성을 다하고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갔다. 지금도 소는 죽어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땅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불평없이 도를 닦는 것이다.

    다른 설화와 함께 비교해보면 소가 되어 땅에 내려오기 전의 신분은 다음과 같다. ① 하늘나라의 소, ② 하늘나라의 왕자, ③ 반도원장(), ④ 짐승의 왕인 소, 또한 땅으로 내려오게 되는 이유를 보면, ① 살생, ② 파계, ③ 복숭아를 훔쳐 먹음, ④소가 사람이 되고자 함. ④ 배신행위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 설화의 형성에 영향을 준 설화로는 단군설화, 견우와 직녀, 잉어 및 처용설화 등을 들 수 있다. 백정설화의 사상적 배경은 불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사찰에서 도살장을 하는 경우나 도살할 때 중이 염불 하는 등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그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전승되는 설화의 대부분에 ‘소’가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소를 신성시하고 백정직을 신성하게 꾸미기 위한 도우업()에 종사하는 백정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도살업이 현대화돼 가면서 백정설화를 알고 있는 저승자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 지리적으로 백정설화의 분포가 어느 특정한 유형을 형성하면서 전승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출처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외 2인  한국사전연구사 



    : 이 이야기를 통해 확인되는 백정 계급에서의 박씨 성씨 존재. 백정이 성씨가 없었다 거짓! 그런데 임꺽정은? 임꺽정의 형의 이름이 가도원인데 임씨인지 아닌지 명확치 않다. 그럼 친형이 아닌가? 친형이 아니더라도, 임꺽정의 꺽정은 순수 한국어 이름. 한자를 쓰지 않아. 임을 발음할 한자로 임을 선택하였기에 발생한 문제가 아닌가? 임씨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꺽정이 9세기에 당나라에서 온 임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임씨들... 사실일 수도 있어. 

    장씨 중에서도 백정이 있어. 장씨는 장보고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8~9세기에 이민온 중국인 성씨. 이들도 함께 몰락한 것으로 추정

    일제강점기에 형평운동을 벌인 인물 중 장지필(張志弼)은 백정 부호인 장덕찬의 아들로 백정의 아들이기 때문에 양민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도부라고 찍혀 나오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 내가 백정이라니! 형평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편견이라는 게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이후에도 실질적인 대우는 계속 그대로 이어졌다. 드라마 "제중원"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박서양도 백정 출신으로 많은 차별을 당했는데, 1920년대 서울에서 의학 강의를 하다가 일부 학생들이 그가 백정 출신인 것을 문제 삼아 수업을 거부한 사태가 있었다. 일본의 민족분열정책에 따라 많은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어느 정도였느냐면 백정들은 농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할 때도 그 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농민이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학교 진학이나 직업도 도축 분야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천대는 형평 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천 형평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분사의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가 한 말[17] 때문에 형평사 임원과 김석희 간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 장외에서 관람하던 일반인이 그것을 백정들이 버릇이 없어졌다로 인식하고 그들을 박멸하자고 주장하여 며칠 동안 형평사를 공격하거나 형평사 임원의 집을 파괴하고 가족을 구타하는 일을 벌였다. 이에 평소 조선의 사회운동을 아니꼽게 보던 일본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한동안 예천이 무정부 상태가 되기도 했다

    박문수의 이야기, 그도 느꼈기 때문에 삼촌이라 부르는 것을 허락? (박문수 친척된 백정 - 한국민속대백과 ) (링크2)

     갈래 : 전설
    • 시대 : 조선
    • 신분 : 관료
    • 지역 : 기타
    • 출처 : 김균태 (340)
    • 내용 :
    하루는 팔도를 돌아다니는 어사 박문수가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한 참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박문수 작은아버지! 박문수 작은아버지!”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사 박문수에게는 자신을 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박문수는 소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찾으니 백정이 나왔다. 어사 박문수를 보고 다급해진 백정은 황급히 박문수를 안방으로 모시고 무릎을 꿇으며 죽여 달라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박문수 “당신이 나를 작은아버지라 하였는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니 어디 동헌편에 출도하고 잔치를 해야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박문수는 동헌편에 출도하고 역졸을 불러 이곳에 자신의 작은아버지가 계시니 모시고 오라고 하였다.

    백정은 역졸들이 자신을 데리러 오자 아무리 자신보다 벼슬이 높다고 하지만 자신은 방석 위에 앉아 삼촌을 오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하며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역졸들은 백정의 이야기를 박문수에게 그대로 고하자 박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박문수는 직접 백정을 모시고 돌아와 푸짐하게 잔치를 하였다. 백정은 또 이렇게 박문수와 연을 맺게 되었다. 박문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 백정은 그때부터 박문수의 뒤를 밀어주기 시작하였다. 박문수가 팔도를 다 돌아다니고 서울 본댁에 올라오자 억만 장자가 되어있었다. 그런 박문수에게는 아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우는 자신의 형을 믿고 깡패질을 하며 돌아다녔다. 하루는 형제가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창 대화를 하던 중에 아우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재산이 늘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박문수는 강원도 어느 고을에서 백정을 작은아버지라고 하고 얻게 된 재산이라고 사정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동생은 어떻게 백정 놈이 우리의 작은아버지가 될 수 있느냐며 당장 가서 목을 치겠다고 하고 집을 나갔다. 박문수는 급히 사람을 보내 백정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동생을 조심하라고 미리 기별을 해 주었다. 백정이 사는 지방으로 내려온 아우는 술을 얼큰히 먹고, 방안 가득 양반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백정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백정이 아우를 피해 두렁 위로 올라가서 상수리나무를 붙잡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내가 저 놈 때문에 남부끄러워 이곳으로 피난을 왔는데, 저 놈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서 여기를 오니 이 모양새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하인들은 박문수의 아우를 잡아 광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매일 하인들을 광으로 보내 그 아우를 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인들은 한 달 동안 아우를 때리며 그냥 “작은아버지, 살려 주십시오.” 하면 될 것을 하고 때렸다. 그렇게 한 후 백정이 광에 들어가자 아우는 백정을 보고, “아아고 작은아버지,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정은 이제야 아우가 술에 깼다고 하고는 읍내로 데려가 가서 먹을 것을 사다가 잘 차려주고 며칠 치료를 받게 하였다. 이렇게 풀려난 박문수의 아우가 차차 몸이 회복되자 백정은 아우에게 나귀를 주며 서울로 돌아가라고 하고는 노잣돈 외에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박문수는 나귀를 타고 온 아우를 보고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아우는 풀이 죽어서 할 수 없이 작은아버지라고 부르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문수는, “예, 이놈! 나도 작은아버지라고 하였는데 너는 말해 무엇을 하느냐. 네 목숨을 살려 돌아온 것이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from: 박문수와 백정. 네이버 지식백과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15. Retrieved 2022-05-15.

    ...

    조선 노비가 성노리개? 김성회의 왜곡을 반박한다 (링크) [해당 자료속에 있는 논문 자료 참고]


    (서양 학문과 접촉한 학자로서의 박씨)

    (유학자로서의 박씨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나, 서구적 사고와의 접촉에서는 학문적 성과를 낸다.)


    시대 설명 : [ 채제공 시대 -> (정조와 영조 이후, 순조, 현종 고종으로 이어지는 시대) ]

    실학의 등장 (청나라에 의한 자극) 

    (실학은 중화전통과 관련있던 중화계 조선인들이 꺼리던 분야이다. 이러한 심리적 꺼리낌으로 인해 학문적 차별 속에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틈이 생겼고, 박씨는 적극적으로 실학( ) 또는 서학( )에 도전하여 성취를 이룬다. 후대의 운요호 사건으로 근대화된 일본과 접촉시 협상에 참여하는 박규수가 이러한 흐름의 계승자이다.) 

    --> 박지원 : 열하일기 / 허생전 / 양반전 (문체반정 조사)

    박지원의 제자 : 박제가(북학의 저술, 제자: 김정희) / 유득공(발해고) / 이덕무 / 서이수

    손자 : 박규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관련)

    1884년 갑신정변 :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사진)

    을사오적 :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박제가? 동료 유득공, ?가 발해고를 작성한 이유,, : 발해-고려 간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박씨 성의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라 경주에서 강원도를 통해 발해로 이동하는 경로, 혹은 황해도 지역에서 발해로 이동하는 경로가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추정. (당시 잠깐 한성의 군주가 박씨로, 이후 반역으로 처형됨 // 3국통일 이후시기 ,, 혹은 ,, 후삼국시대 추정. // 기억이 애매함)



    • Park Yeon (박연) (1595– after 1666). Jan Janse de Weltevree, after his 1627 shipwreck, was drowned to Jeju Island and was not allowed to leave Korea. Thus he adopted a Korean name.

    • Pak Jega (1750–1815) was a Korean Scholar of Practical Learning Silhak who advocated modern commercial reformation for Joseon dynasty after visiting China on official capacity. A strong critic of the Confucian scholars first mentality, he was banished to the provinces in 1805.

    • Park Gyu-su 박규수 (1807–1877). He passed the national service exam in 1848, and as an inspector, put down the 1862 Peasant Rebellion in Jinju, reducing the tax burden and punishing the corrupt official of the city. As the Inspector General of Pyeong An Province in 1866, when USS General Sherman General Sherman Incident made its expedition into Pyeong Yang, ordered the attack on the ship when the sailors began attacking and looting the populace, resulting in the burning and sinking of the ship. Also a geographer, cartographer, and poet in the classical style. Became a notable member of the modernization movement in late Joseon until his death in 1877.

    • Park Jeong Yang ko:박정양 (1842–1905) was the First Ambassador of Joseon to the United States in 1887, and a member of Kim Hong Jip cabinet.


    조선시대 급제자 자료조사법 : 

    하버드 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 교수와 전북대학교 송준호 명예교수[6]가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들의 출신 배경 및 그 행적과 업적을 종합적으로 추적한 와그너-송 프로젝트에 따르면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들 중 전주 이씨안동 권씨[7] 다음으로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고 한다.[8] 참고로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전주 이씨 868명, 안동 권씨 366명, 파평 윤씨 346명(함안/남원 윤씨 포함 424명)이다. (나무위키)

    근세:

    (근세의 박씨 - 일제치하의 박씨)

    밀양 박씨의 인구수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릉은 경주 시내로 부터 서남방향에 있으며, 일직선으로 연결할 경우, 경남 밀양방향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이 만들어진다. 김,이,박 이 세개의 성씨는 기존의 성씨가 없던 이들이 본인 주변의 성씨를 따라하면서 인구수가 많아졌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따라할 성씨가 있기위해서는 그 박씨가 충분히 유의미한 존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도 밀양 박씨는 선조 묘에 대한 관리와 제사를 통한 유대감 형성과 결집력 유지를 통해 성세를 유지해 왔을 것이다. 사릉의 매장 방식이 아무리 도굴이 어려운 '~~' 방식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관심이 없었다면, 무덤은 제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밀양 박가나 사릉 근처의 박가가 지속적으로 시조묘에 관심을 기울였음을 의미한다. 또 밀양 박가에서 사업이나 이 묘지기 일에 대해서 관련이 있던 이들이, 전국적으로 성을 받는 "~~" 시기에 박성을 선택했을 것이기에 진짜 양반의 조상이 아닌 박씨이더라도 박혁거세와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박서양 : (링크)

    : 그는 백정출신으로 본인을 백정에서 해방시켜준 기존 대한제국 집단, 조선 양반집단에게 애착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 충분히 역사적 고찰을 할 수 있는 풍부한 역사적 자료에 접촉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분질서로 고통받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 조선의 양반집단이었고, 이들이 일제에 대한 독립활동에 참여하자, 그에게 은인이던 이들에게 은혜를 갚고자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는 역사의 큰 의미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는 그를 도운 사람(양반)을 돕고자 하였다.

    박성춘

    에비슨이 조선에 온 직후 무어 목사와 같이 어떤 환자 집에 갔는데 그 환자는 당시 조선에게 가장 천대받는 백정白丁이었다. 백정의 이름은 박성춘이었는데, 에비슨의 치료로 회복된 이후 기독교 신자가 되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일반 신자들이 싫어하며 문제를 삼자 무어 목사는 교인인 백정을 교회 밖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말해 이들을 설득하였다.

    백정은 조선에서 전통적으로 머리에 상투를 틀지 못하고 갓도 쓰지 못하는 존재였다. 1895년 여름 콜레라 퇴치로 에비슨의 지위가 조선 정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게 되자 에비슨은 백정 신분 향상에 적극 나섰다. 조선정부에 편지를 올려 백정의 신분차별을 없애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런 요청에 조선정부는 전국에 법을 선포하고 포고문을 붙이도록 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백정들의 신분차별은 철폐되었다. 이러한 일로 신분이 향상된 백정 박씨는 세월이 흘러 은행가가 되었으며 그의 장남인 박서양은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에 입학하여 1908년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from: 네이버지식백과-백정박성춘과에비슨.백정 박성춘과 에비슨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5-15. Retrieved 2022-05-15.


    근대:

    (남한 초기의 박씨)


    박태준

    ...

    박정희

    [특집 | 10·26 40주년 - 朴正熙, 오해와 진실] 박정희가 지역감정을 조장했다고?

     - 박정희 일상 나무위키 아카이브 220515 (링크)

     - 박정희 오해에 대해서 유뷰브 내용 (링크)

     - 박정희의 스위스 계좌? --> 아카이브 


    현대:

    인천 무차별 살인 피해자.. 이름...

    '신라 고분' 앞에서 골프 스윙 연습하는 무개념 50대 커플들 (링크)

    박아달라, 박지마 이름으로 놀리는 감각. 왜냐하면 본인의 조상과 전혀 관련이 없기에,,, 그들의 조상은 중국인측. (그러한 감각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

    2000년대 일제시대 괜찮았다 발언 박씨 살해



    * 박시형

    朴時亨、北朝鮮の歴史学者。朝鮮社会科学院歴史研究所(朝鮮語: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院士。(Link)



    * 박영인

    Masami Kuni (also known as Park Yeong-in) (Link)



    * 박소희

    ‘파친코’의 박소희, 우리가 몰랐던 재일한국인 배우 (Link)



    * 박찬욱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46601&page=1


    * 박진영


    * 박진 (외교부장관)


    지역별 분포 :

    2015년 통계청 자료조사에 의하면 주로 영남 동남부, 전남에서 총인구 대비 박씨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인구의 10% 이상이 박(朴)씨로 전국 평균 8.43%보다 높다. 목포시, 해남군, 진도군, 완도군, 신안군 등 전남 서부의 박(朴)씨 비율이 특히 높은 편. 충북 남부나 강원 영서 일부 지역도 박(朴)씨 비율이 높다. 제주도는 예외.

    전라남도 진도군은 무려 18.87%가 박(朴)씨다. 그 뒤를 경상북도 청도군(14.25%), 경상남도 남해군(13.19%), 경상북도 군위군(12.94%), 전라남도 해남군(12.81%)이 이었다. 

    현대 주요 분포는 현재 전라 및 경상에서 유의미한 비율 차지, 그뒤로 주로 한반도 남부에 위치. 백정의 평등을 위한 운동인, 형평사 운동도 전주에서 일어났다. 당대 백정에 대한 역사 기록이 부족한 이유, 그리고 이를 연구하기를 꺼려하는 조선인들의 심정이 왜 발생하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족보의 신뢰성 3가지 type :

    1. 신뢰 : 구씨는 완전한 사실, 정조시대 기록 중에 있는 구씨를 구씨로 한자 모양을 바꾸었다는 기록. (구례마, 신라 건국 당시의 구씨, 파진찬으로 기록된 아달라이사금 당시 구씨, 천보노 설계자 구씨, 

    2. 의심, 애매모호함 : 석씨 사실인가?

    3. 불신 : 백씨, 마씨, 이씨 완전 거짓.


    의심(疑心) :

    • 의흥 박씨: 원래 왕씨로 고려 왕족이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도피하여 은둔하였고, 병부 상서를 지냈던 왕을규가 외가의 성을 따라 박씨로 성을 바꾸고 의흥(義興)을 본관으로 삼아, 그가 의흥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복성하지 않고 박씨 성을 계속 써왔다.
    • 노성 박씨: 조선 초기 문신인 박연을 시조로 한다. 조선에 유명한 박연이 두 명인데 그와는 관련 없다. 다른 박연이다. 참고로 유명 박연 중 하나는 악성 박연[10], 그리고 벨테브레가 이름을 바꾼 박연이다. 
    • 번시 박씨: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를 본관으로 삼는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성씨다. 시조는 박영강으로 신라의 후예다. 1619년 후금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강홍립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강홍립이 부차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금의 포로가 되자 그 부하들이 중국에 남아 랴오닝성 번시시 일대에 정착하여 계보를 이어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다.李씨(중국 1위, 대만 5위), 金씨(중국 69위, 대만 94위), 崔씨(중국 74위), 鄭씨(중국 23위, 대만 12위), 姜씨(중국 60위, 대만 80위)인 것에 비해 박(朴)씨는 중국 성씨 순위권 밖이다. 
    朴이라는 글자는 소박할 박, 혹은 팽나무 박이며, 유래에 대해선 정설이 없으며 의견이 분분하다. 박혁거세의 난생설화 때문에 표주박을 뜻하는 瓢(표)에서 갈라져 나와 朴이 되었다는 등 이설이 많다. 
    중국인 중에 '朴'씨(박씨)가 간혹 있는데, 신라방 출신이 현지에 정착한 경우이거나, 조선인이었다가 청나라(주로 병자호란 시기)에 끌려갔거나,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에 따라 싸우지 않고 투항하고 정착한 조선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중국인 중에서 중국 조선족 출신의 박씨가 숫자로는 가장 큰 비율이다. 박씨 성을 고집하는 조선족들은 한족이나 만주족 등의 어머니를 가졌더라도 중공 성립 후 조선족을 자처해 인정됐다고 한다. 中서 400년 혈통 지켜온 '번시 朴씨' 조선족 시조 ‘번시 朴씨’…400년 혈통 지켜낸 비결은?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박씨는 조선인 특유의 성씨라고 서술되어 있다. 중국에는 다른 박(薄, 보)씨가 있고 유명인으로는 보시라이(薄熙來, 박희래)가 있다.
    (유전자 조사 결과 박(薄)씨도 한반도 박씨와 유전적 거리가 매우 가깝다. 이것과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유로 중국 사회과학 연구원에서는 한반도 박씨가 고대 상나라계 박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출처). 하지만, 이건 薄씨에서 朴씨가 나온 것이 아니라, 朴씨가 薄씨를 자청하였기에 발생한 현상일 뿐이다. 애시당초, 하플로 O1계열은 양쯔강 남부에서 해양을 통해 퍼졌기 때문에, 과거 만주족의 청나라 건국 당시, 만주족의 일부로서 중국에 유입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보시라이(薄熙來, 박희래)가 신라계 만주족 후손인지, 몽골계 만주족 후손인지, 정말로 고대 상나라의 후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작성 진행중)......

    (2022.04.30 16:36 최초 작성)

    (2022.06.17. 01:04 작성)

    (2022.06.19. 04:30 마지막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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