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관련 기스라이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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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거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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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혁거세 거서간
赫居世 居西干
지위
제1대 신라 국왕
재위 기원전 57년~4년 음력 3월
대관식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전임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후임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부왕 옛 번조선 땅의 장군(무사)
촌장 군주(君主)
이름
휘 박혁거세(朴赫居世) 김추(金추)
이칭 거서간(居西干)
별호 알지 거서간(閼智 居西干)
불구내왕(弗矩內王)
거슬한(居瑟邯)
묘호 없다
시호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신상정보
국적 신라(新羅) 진한 사로국(斯盧國)
출생일 기원전 69년
출생지 현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나정(蘿井)
나정 우물 주변
사망일 4년 음력 3월
사망지 사로국 서라벌(駟盧國 徐羅伐)
매장지 경주 오릉(慶州 五陵)
가문 밀양 박씨(密陽 朴氏)
부친 옛 번조선 땅의 장군(무사)
모친 [부여공주 파소](仙桃山聖母)
배우자 알영부인(閼英夫人)
자녀 박특(朴忒)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일지갈문왕
허루갈문왕
아로공주(阿老公主)
부인 박씨(夫人 朴氏)
종교 천신사상(天神思想)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기원전 69년~4년 음력 3월재위: 기원전 57년~4년)은 신라의 초대 국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혁거세 거서간이 백마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였으나 사소부인(娑蘇夫人)이 혁거세 거서간을 낳았다는 전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혁거세의 출생과 사망, 역사는 한국의 오래된 신화로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출생[편집]

삼국유사[편집]

삼국유사가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혁거세는 사로국 6부 촌장들이 임금을 세우는 회의를 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백마가 낳은 알에서 출생했다. 즉, 기원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각기 자기 자녀들과 함께 알천 언덕에 모여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모두를 다스려 줄 임금이 없어 모두가 안일하여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도무지 질서가 없다. 그러하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만들자.”라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 때, 회의 장소인 알천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楊山)이라는 산기슭에 번갯불 같은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촌장들은 더 잘 보기 위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말 한 마리가 절하는 것처럼 한참 꿇어 엎드려 있다가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날아올라가 버렸다. 말이 떠나자 촌장들은 그 말이 누었던 장소로 일제히 몰려가 봤더니 그 곳에는 자줏빛의 큰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촌장들이 그 알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깨져버렸다. 그 안에 생김새가 몹시 단정하고 아름다운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 하며, 아기를 동천(東泉)이라는 샘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그러자 아기의 몸에서 광채가 나고, 짐승들이 몰려와 덩달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늘과 땅이 울렁이며 태양과 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촌장들은 그 아이의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으로 지었고 이름을 혁거세(赫(爀)居世)라고 지었다.

일연은 사소부인에게서 출생했다는 설도 기록하였다. 여기서 서술성모는 선도성모와 같은 여신이다.[1] 사소부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하지는 않으나 그녀가 정착하였다는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거서간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하였다 한다. 여기서 중국을 지금의 중국이 아닌 말 그대로 중국(中國) 즉 여러 제후를 다스리는 중심적 나라라는 견해도 있다.[2]

혁거세의 부친과 관련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나정의 혁거세 설화[편집]

남산의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를 지칭)에 궁궐을 짓고 신성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 아이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여자 아이는 그 아이가 나온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름(나정)을 지었다. 두 성인이 나이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에 남자는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이어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하는데,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처음에 왕후가 계정(雞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雞林國)이라고도 하였는데,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일설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을 당시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정하였다.

거서간[편집]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혁거세는 10세 때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ㅣ쿘고 촌장놈들의 추대를 받아 13세인 기원전 57년 6월 8일(음력 4월 28일 병진일)에 즉위하고 왕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다.
  • 기원전 41년(즉위 17년)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부인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 기원전 39년(즉위 19년)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3]
  •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고, 기원전 32년(즉위 26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으니 이때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
  • 기원전 28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
  • 기원전 20년(즉위 38년) 봄 음력 2월 마한에 사신 호공(瓠公)을 보냈는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마한 왕에게 호공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자, 마한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마한 왕이 죽어 신하들이 마한을 정벌할 것을 권하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이는 그 무렵 신라의 정치 체제가 바로잡혀 마한에 매여있지 않게 되어있다는 것을 말한다.
  • 기원전 5년(즉위 53년)에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 말 20필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채호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다.[3]

사망[편집]

설화에 따르면 혁거세 거서간은 재위 62년 만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가 7일 만에 시신이 부위별로 나뉘어 흩어져서 지상으로 떨어졌다고 전한다. 백성들이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으나 커다란  한 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을 쫓아내며 훼방을 놓았다.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양다리와 양팔과 몸통과 얼굴을 따로 묻어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은 5개가 되었고 혁거세 거서간의 무덤들을 오릉(五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뱀 때문에 혁거세 거서간의 나뉜 몸을 따로 묻어서 사릉(巳陵)이라고도 한다.오릉(五陵)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박씨 족보와의 차이[편집]

신라 박씨 족보는 혁거세 거서간의 장남 박특(朴忒)을 신라 개국공신으로 기록[4] 하고 있어 혁거세 거서간의 출생이 사료의 기록(기원전 69년)보다 이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박씨 관련 보학 자료들이 조선 중기 또는 후기 이전에 소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은 12세기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13세기 편찬된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설로 보고 있다.

이름[편집]

양주동의 연구에 의하면, ‘朴赫居世’의 ‘赫’과 ‘朴’은 둘다 ‘ᄇᆞᆰ’(밝다)의 뜻을 반복하여 쓴 것이다.[5]

가계도[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각주[편집]

  1.  경주 선도산의 다른 이름이 서술산이다.
  2.  <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 네이버 뉴스
  3. ↑ 이동:   신채호 (1948) 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 듯하다."
  4.  “신라박씨 선원세계도(新羅朴氏璿源世界圖)”. 2010년 3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4일에 확인함.
  5.  안영희(安英姬), 〈「閼英」의 發祥地「閼川」名義考 - 朴赫居世神話를 中心으로〉 《亞細亞女性硏究 第8輯》(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1969.12) 141쪽. “이에 관하여 梁柱東 博士는 「朴赫居世」의 「赫」을 「朴」의 註記로 보고 「朴」과 「赫」은 둘다 「ᄇᆞᆰ」의 表記로 疊記된 것으로 보았다.(2) [...] (1) 梁柱東 「國史古語彙 借字原義考〈國號•地名•始祖•官名•祭政•歌樂名등〉」(明大論文集 1), 1968, pp. 79~89參考[...] (2) 梁柱東, 註1書 p. 82參考”

참고 문헌[편집]

from: 혁거세 거서간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 2022-07-03.

...

--> (여기서 '백마: 혁거세 거서간의 아버지'라고 기록한 것은, 중국계들의 악의적인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애당초 중국계와 같은 민족도 아니고, 그들은 기스라이팅과 역사적 날조를 행해오는 역사적 관성이 있기에, 이 관성에 포함되어 함께 시조의 아버지를 '말'이라고 비하함을 목적으로 한다. 과거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자매끼리의 결혼으로 망상기록한 것 또한, 그러한 목적의 일환이다. )

(번 조선 땅의 장군? 부여공주 파소? 모두 중국계의 날조 능력을 보여기주는 망상 기록. 환단고기 망상의 첨부인데, 본래 관계없는 신라와 조선의 연결 망상기록이다. 과거 신라6부 망상기록또한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1000년이 넘는 전통이며, 놀랍게도 이젠 미국 역사학계까지 속이며 날조가 진짜 역사로 왜곡되고 있다. 이제 한국-일본-미국 순서인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중국인들이 연구하는 이유는 명백힌다. 지금까지의 레파토리로 생각하면, 아마 아메리카 원주민을 키워드로 이민하고 역사를 빼앗을 생각. 그 밑작업을 생각하고 그들은 암묵적 배경하에 생각하고 활동한다. 그 중국인들에 눈에 너희도 한낱 잡아먹힐 고기덩어리이며, 미래를 그리며 째진 눈웃음으로 비웃고 있다.



Hyeokgeose of Silla: Difference between revisions

from : Revision as of 18:12, 22 January 2017 (edit) (undo)

The founding date is widely questioned today, as the Samguk Sagi was written from the viewpoint of Silla, claiming Silla's superiority and antiquity over Goguryeo and Baekje. Silla in this traditional thinking is thought to have been founded first, followed by Goguryeo, and then Baekje.[citation needed]Archaeological evidence, however, paints a different picture, and it is suspected that Goguryeo is the oldest of the three kingdoms, with Silla developing either concurrently with Baekje or after it.

...

(신라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현재 백제인이라고 날조하며, 일본에게 이민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들을 상징. 그들은 그 이민을 통해 중화의 확장을 목표로 한다.)


마씨(馬氏)

마씨는 장흥, 목천, 상곡 등의 본관이 있다. 정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시조(始祖)로 백제의 개국공신인 마려(馬黎)가 있다.[1][2] 마려는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으로 받았고 고려 초에 회령(會寧)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長興)에 편입됨으로 장흥을 본관으로 하게 된다. 그 후 고려 문종 때 마점중(馬占中)의 장남 마현(馬鉉)이 목천을 본으로 하여 현재의 목천 마씨(木川馬氏)가 되었고, 동생인 마혁인(馬赫仁)이 장흥 마씨(長興馬氏)를 유지했다.

[1] '주몽이 북부여(北扶餘)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찾아와서 주몽이 그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들과 남쪽으로 떠났는데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2] 백제의 십제공신(十濟功臣) 명단: 마려(馬藜), 오간(烏干), 전섭(全攝),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from: 마(성씨)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 2022-07-03.

...


(馬)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38,949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장흥(長興), 목천(木川) 등이 있다.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마완(馬浣)은 은(殷)나라 양성인(陽城人)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君子)이다. 은나라 양성군자(陽城君子) 마완(馬浣)⋅마장(馬莊) 부자(父子)는 주왕(紂王)의 폭정에 인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경서(經書)를 가지고 은거하다가 은나라가 멸망한 뒤에 마장이 기자(箕子)와 더불어 고조선에 동래(東來)하였다고 한다.

장흥 마씨(長興馬氏)의 득관 시조(得貫 始祖) 마려(馬黎)는 백제 개국공신이다.[1] 《삼국사기(三國史記)》 제23권 백제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마려(馬藜), 오간(烏干) 등 10인이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인도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해 남하해서 위례성을 도읍(都邑)으로 백제를 건국하고 온조(溫祚)를 왕(王)으로 받들었다.[2]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元勳) 마려(馬黎)에게 좌보(左輔)의 벼슬을 내리고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려 후손이 세거(世居)하여 대대로 이어 받았다.

백제시대 인물로는 성왕 때 나솔(奈率), 대사(大使)를 역임한 마무(馬武), 오경박사 마정안(馬丁安) 등이 있다.

마사량현(馬斯良縣)은 고려 초에 회령(會寧)으로 고쳐 부르다가 인종(仁宗) 때 장흥에 속하게 되어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고려 문종 때 마점중(馬占中)의 장남 마현(馬鉉)이 목천 마씨(木川 馬氏)로 갈라지고, 둘째 마혁인(馬赫仁)은 선조의 관향인 장흥 마씨를 이어갔다.

from: 마(성씨)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 2022-07-03.

Jeonju clan[edit]

The founder of this clan was Yi Han, a native of Baekje who later married a Silla princess and became a high-ranking official in Silla.[citation needed] His 22nd-generation descendant, Yi Seong-gye, went on to found the Joseon Dynasty. The House of Yi ruled the country for 518 years (between 1392 and 1910) and established many of the cultural, artistic and linguistic foundations for modern-day Korea.

During its reign, the House of Yi consolidated its effective rule over the territory of current Korea, encouraged the entrenchment of Confucian ideals and doctrines in Korean society, imported and adapted Chinese culture, and promoted classical Korean culture, trade, science, literature, and technology.

As of 2005, the pretender to the Joseon throne is Yi Seok.[8] Members of the different branches of Jeonju Yi survived until the formation of the current Republic of Korea. Many families claim membership in the House of Yi, but few actually descend from this lineage. South Korea's first president, Syngman Rhee, claims descent from the lineage.

Gyeongju clan[edit]

The founder of the Gyeongju clan was Yi Al-pyeong (李謁平), one of the village headmen who chose Park Hyeokgeose as the first King of Silla. According to the Samguk Sagi, the Yi name was officially bestowed on the family by King Yuri around 9 CE.

Notable present-day members of this clan includes: Lee "Faker" Sang-hyeok (professional League of Legends player and mid-laner for T1), Lee "Gumayusi" Min-hyeong (professional League of Legends player and bot-laner for T1),[9] Lee Je-no (member of the South Korean boy group NCT), Lee Byung-chul (founder of Samsung Group), Lee Kun-hee (the late Samsung Chairman) and Lee Myung-bak (former president of South Korea).[10]

The Gyeongju Yi clan, according to the 2000 South Korean census, numbered over 1.4 million individuals, making it the most numerous of the clans that bear the surname Yi.[11]

from: Lee(Korean surname)Wikipedia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 2022-07-03.


...

신라의 왕위를 김씨석씨 등 다른 성씨가 물려받기도 하지만, 혁거세는 단순히 부계 혈연 개념에 입각한 조상이 아니라 건국의 시조왕으로서 성씨에 관계없이 공통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신라에서 전왕이 승하하면 후임자가 일단 왕위를 물려받은 뒤, 즉위 다음 해 1~2월에 신라 고유의 제사 시설인 시조묘(이후 신궁)에서 제사를 거의 반드시 직접 지냈다. 이는 신라의 일종의 관례적인 즉위식 개념이었다.

현재 전하는 박혁거세라는 이름은 朴赫巨世라는 한자 표기를 현대 한국어로 음만 따서 읽은 것이나 과거 신라에서 한자를 읽고 쓰던 방법은 지금과 조금 달라 마치 지금의 일본어와 같이 음독과 훈독을 섞어 썼다.[9] 혁거세 중 한자 赫(붉을 혁)과 世(누리 세)는 각각 뜻으로 읽기 때문에 원래 발음은 불거누리, 불그누리, 불그뉘 등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이명으로 불구내(弗矩內)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순우리말인 붉은 누리를 한자로 음사하여 표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불구내와 혁거세는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르게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름의 뜻이 누리의 붉은 햇님인 이진아시왕과의 연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기이편>에 의하면 스스로를 '알지 거서간(閼智居西干)'[11]이라 일컬었다. 후대의 김알지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 신화에서 해모수나 동명왕이라는 이름이 공통으로 등장하듯이 고대의 시조 신화에서 이런 식의 어휘 공유는 놀랄 일은 아니다. 훗날 신라에서 '태조'로 불린 인물이 김알지의 아들 김성한으로 유력시되는데 이와 연관지어 알지가 임금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 중 하나였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선도성모수희불사>에 의하면 알영부인과는 남매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경우 김부식이 중국에서 듣고 기이한 이야기라고 부정한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전설로 적은 것이라 《삼국사기》에 부인으로 나오는 게 더 유력시된다. 이 역시도 신화에서 남매가 부부를 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위의 '알지'라는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알영부인과의 연관성이 더욱 강화된다.

--> 한국인의 절반 이상은 중국인이기에 그 생각하는 방식또한 마찬가지이다. 남매가 부부를 겸한다는 생각은 복희와 여와에서 따왔다. 그 성격을 모방해서 날조에 익숙함을 더하기 위해서이다. 또는 미래의 날조를 통해 일본 신화에 접근을 위한, 잠재적 목적의 날조이다.

처럼 생긴 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을 박씨로 정한 것도 그 이유다.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다.[12]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13]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14]이 한 개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는 세계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일반 인간과 다른 특별한 탄생이라는 장치로 신비감을 높이기 위해서이다.[15]

《삼국사기》뿐 아니라 《삼국유사》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천상에서 내려온 백마(신라)가 나정에 싣고 온 자색 알에서 혁거세가 태어났고, 천자라 불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양대 사서에서는 혁거세 이전 경주에 옛 고조선이 망하고 남하한 유민으로 구성된 6촌이 있었고 신비하게 등장한 혁거세가 성장하자 6촌 촌장들의 추대로 왕에 올랐다고 쓰고 있다.

《삼국사기》에 쓰인 위의 설화에 의하면 성씨의 박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후대의 문헌 기록인 《삼국사기》뿐 아니라 법흥왕 때의 당대 기록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도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혁거세 난생 설화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는 박이라는 성씨에 관한 정보가 등장하지 않기에 혁거세가 당시에 박이라는 성씨를 가지지 않았고, 후손들이 소급해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계에서 제대로 연구되어 있지는 않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경주의 나정은 이후 신라 왕실의 성지가 되었고 그 자리에 신궁 등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기록으로 선도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 혁거세와 알영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 서남쪽 훗날의 창림사[16] 자리에 궁실을 짓고 길렀다고 하는데 현재 나정과 직선 거리로 1㎞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위치다. 그러다 기원전 57년 경주 일대의 6촌 촌장[17]들의 추대로 13세에 왕으로 즉위해 재위 5년에는 비슷하게 설화적인 탄생으로 태어나 2명의 성인(二聖)으로 꼽히던 알영부인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알영 탄생 설화에 대해서는 알영부인 문서 참조.

단군신화도 그렇듯 설화를 현실적인 역사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해석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혁거세로 대표되는 북방 기마 세력[18]이 청동기 문화에 머물러 있던 경주 분지로 들어와, 기마술과 철기[19]를 바탕으로 토착 6부족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세웠다.
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신화 해석이 있는데 혁거세는 하늘에서 왔고 알영은 땅(우물 알영정)에서 나왔으니 혁거세는 외부 출신이고 알영은 좀 더 먼저 경주에 정착해 있던 집단 출신이라거나,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알영부인 신화에서도 나오는 점을 보아 알영이 이후 박씨와 혼맥으로 맺어질 김씨 집단[20]의 상징 여성일 거라는 추정도 있다.

그리고 건국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라도, 그 이야기의 뼈대는 늦어도 이사금 시대에는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성 집단 대표자들의 회의와 합의로 왕이 추대된다'는 건국 신화의 기본 구조를 보면 김씨 왕계가 확립되고 중앙 집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마립간기보다는 이사금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

[18] 경주 일대의 통칭 가운데 계림(鷄林)이 있는데, 설화에서는 닭(鷄)이 아닌 말(馬)이 등장하고 있다. 김알지 탄생 설화에서는 멀쩡하게(?) 닭이 나왔음을 떠올려 보자.

--> '시림'이 '계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계림이라는 글자를 통해 알 수 있듯, 적어도 후기 계림은 확실히 닭과 관련된 지역이 맞다.

[19] 혁거세의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구정동·조양동 등 경주의 여러 고분에서는 철제품과 철제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그 중 주목할 것이 철제 마구(말재갈)인데, 청동제 마구는 경주에서 나온 적이 없다이는 기마 세력이 철기도 함께 챙겨들고 왔다는 뜻이다.

--> 고구려 신화를 통해 확인되듯, 기마운용과 말의 육성 기술은 기원전후에 이동한 문화이다. 마찬가지로, 가야설화를 통해 확인되는 철제기술의 이동도 기원전후에 이동한 문화이다. 동시대에 문화의 이동이 발생하였기에 발현된 현상이다.

[20] 실제 역사에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건 좀 더 이후의 일이지만 훗날 김씨, 박씨, 석씨 등으로 소급될 서로 구분되는 집단은 성씨 사용 이전부터 존재했다.

-->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중국계의 망상이자 날조이다. 이미 고구려가 3성을 신하에게 내린 기록과, 해씨, 고씨, 부여씨, 김씨, 석씨, 박씨 기록과 같이 당대에 이미 성씨 개념은 존재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경우, 중국계들의 1000년간의 날조가 흔들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성씨 사용을 소급했다고 날조 망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가 기원후 4년 73세로 승하했다고 한다. 1년 전이었던 기원후 3년 경주에  2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죽을 때도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토막 난 데다 그걸 수습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위의 설화를 유추해 관련 학계에서 무수히 현실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기이한 기록이라 정설은 없으며 반란군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개 있는데 자세한 것은 남해 차차웅 문서 참고.

한편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박혁거세의 농경 신화를 뜻한다고 한다. 건국의 신화적 인물은 승천하거나 신으로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이를 막고 시체가 5조각이 나서 땅에 묻힌다. 신화적으로 시체가 묻히는 것, 무언가를 조각내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며 뱀은 신화적으로 남근을 상징해 다산과 생산 등을 상징한다. 시체가 다섯 토막인 것은 어머니가 얻은 오곡과 연관되는데 죽은 뒤에는 농경신으로 모셔졌지만 차마 건국 신화에 곡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남해 차차웅 본기 처음에서는 혁거세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또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고 하는데 혁거세의 승하 기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박혁거세와 얽힌 전설로 금척 이야기가 있다.
기타
  • 초기의 신라 땅은 기록상 자연재해가 꽤 많은 편인데 이 시기에는 기록상 자연재해도 딱히 없다. 바로 다음 대인 남해 차차웅 때만 해도 자연재해 기록이 제법 많다. 사로국이 위치한 경주 평야는 현재도 영남 지방의 전체 생산량 중 7%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넓고 비옥한 곳이며 영남권에서 경주 평야보다 더 넓고 비옥하다 볼 수 있는 김해시부산 강서구밀양시 하남읍창원시 대산면울산광역시 등은 아직 바다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독보적으로 풍부한 물산은 사로국이 패권을 쥐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 박특(朴忒)은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신라의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인 박특이 정말로 공이 있어서 공신에 책봉되었다면, 그는 개국 시점에 최소 10대 초반에서 20대는 되어 있었어야 한다. 개국 시점에 나름 장성한 아들을 두어야 하는 박혁거세 역시 기원전 69년생이라면 본인이 10대 초반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제 출생 연도는 적어도 10년 이상 앞당겨져야 하며, 그렇게 되면 박혁거세보다도 16살 적은 것으로 기록되는 알영부인은 그의 생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개국 시점에 정말 공을 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개국 즈음해서 단지 출생만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박혁거세는 진짜 공이 있는 사람들을 개국 공신으로 책봉하면서 자신의 어린 두 아들 역시 덤으로 개국 공신에 책봉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아마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심지어 인정 때문에 마한 왕이 죽었음에도 병합하지 않고 조문을 보냈고, 그 이후 쇠퇴한 마한은 온조왕이 병합했다는 구절도 있다. 이전에 자기가 보낸 사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마한이라는 국가가 하나가 아닌 수많은 국가임을 생각해보면 마한의 한 소국의 왕이 죽었고, 박혁거세는 진한 주변의 마한 소국에 조문을 보낸 것이다. 다만, 박특은 신라 박씨의 족보에서만 나오는 인물이라 실존여부가 불확실하다. 호공의 호자가 한국말로 박을 뜻한다고 해서 일반인들 중 박혁거세와 호공을 동일인물로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삼국사기가 쓰여질 무렵은 고려시대로 성씨가 없던 귀족들에게 고려에서 한족식 성씨를 하사하고 한족식 성씨 족보를 만들던 때이다. 거란과의 차별화를 둔 것도 있다. 《삼국사기》에서 알지는 김씨, 혁거세는 박씨 등 한족식 성씨를 붙였던 것이지 일본사기 등 《삼국사기》 이전 내용에서 혁거세는 박씨가 아닌 그냥 혁거세로 등장한다. 또한 호공의 박과 혁거세의 박이 우연히 비슷했을 뿐이지 혁거세의 이름은 불구내 즉 밝다에서 나온 설이 더 신빙성 있다.[21]

    자녀로는 장남 남해 차차웅, 신라 시조 묘의 제사를 총괄한 신라의 첫 여성 제사장인 대신녀 아로공주 등 1남 1녀가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역사왜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교과서인 《국어독본》에는 박혁거세의 알이 내지(일본 본토)의 어느 족장의 아내가 낳았는데 불길하다 해 상자에 담아 바다로 띄웠고 그것이 경주 바다에 닿았다고 썼다. 하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해 어느 역사서에도 박혁거세의 알이 바다 건너 외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대놓고 날조를 한 셈이다.[22]
[21] 확실히 선비족 북위에서 나온 선비족들이 한화정책에 한족 성씨를 쓰고 족보를 만든 것은 선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한족 성씨를 써도 학자들은 선비족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호공의 호가 박이라는 것만으로 박혁거세와 호공을 동일인물로 보는 것은 어려우며 혁거세에 이름은 불구내로 나와 있다.[22] 이 《국어독본》에서는 석탈해 신화도 석탈해의 고향 다파나국을 일본이라고 못 박았다. 다만 석탈해 신화의 다파나국은 박혁거세 신화와 달리 일본 열도 어딘가라는 설도 실제로 존재하긴 한다.
from: 혁거세 거서간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2022-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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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국어독본》은 후에 학생들을 가르치던 '박정희'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한다. 종종 박정희의 고조선날조나 한민족 사상을 막지 않음을 악평되기도 하는데, 그는 정치인이자 군인이지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학자로서 할 수 있는 영역과, 정치가로서 할 수 있는 영역은 명백히 다르다. 당대 정치가의 입장으로서 한국(남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학자로서의 양향, 학문계의 입장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당대 학문계의 거두는 '이병도'이다. 환빠라고 불리우는 중국계 사고자들은 '이병도'를 식민사학의 거두로 부르지만, 이는 사실 중국계들 사이의 역할분담에 불과하다. 이병도는 식민사학자로 불리우는 듯 했지만, 실은 당대까지 눈치재어 지지 못하였던 고조선을 통한 반도 중국화 날조를 지키는 입장이었다. 결국 그의 역사적 날조를 지키기는 성공했고, 다시 반도와 열도는 중국계들의 날조에 속여져서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금척이야기는 이씨 중화계의 날조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병도
李丙燾 | Yi Pyong-do

대한민국 역사학자. 대한민국 실증사학의 시조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한국사 연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본관은 우봉(牛峰), 호는 두계(斗溪).

1896년 9월 20일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 노루실(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노루실마을)에서 아버지 이봉구(李鳳九, 1847. 10. 15 ~ 1907. 10. 22)와 어머니 나주 김씨(1864. 4. 23 ~ 1926. 12. 30) 김진환(金璡煥)의 딸 사이의 5남 3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와 보광학교, 중동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사학 및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처음에 서양사를 전공하려 했으나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16],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의 영향으로 동양사, 특히 한국사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 그를 지도한 교수는 일본 실증사학의 대부 츠다 소키치였는데, 문헌 비판과 언어학적 고증을 중시하는 츠다 소키치의 태도는 이병도에게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이외에 도쿄대학에 있었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에게도 자주 가르침을 청하러 간 것은 유명한 일인데 이병도 본인은 이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두 학자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졸업 논문은 고구려의 對  전쟁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으며 학위를 마친 뒤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후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 중 하나였던 《조선사》 편찬에 참가하여 수사관보로 재직했는데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한자 독음으로 금서룡)와의 불화로 사임하고 보수가 없는 촉탁으로서 조선사 편찬 사업 종료까지 일하였다. 이후 이병도가 한국 고대사학계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사》 편찬 사업에 참가하면서 각종 사료에 손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 나혜석김억 등과 함께 <폐허>를 냈고 1922년 횡보 염상섭오상순 등과 함께 '문인회'를 결성했으며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 이직했다. 1934년 '진단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기관지 <진단학보> 편집 및 발행인,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2년 진단학회 해산 이후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이직해 강사로 출강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그의 학술적 업적은 고대사와 유교 사상사에 집중되었는데 일반에 알려진 연구 업적은 주로 고대사에 대한 것이다. 광복 후 그의 나이는 50세로 조선학술원 역사철학부장을 거쳐 12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선사 교수로 임용되었고 서울대학교로 개편될 때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창립 멤버로 교편을 잡으면서 1961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여러 후학들을 양성했고(대표적으로 김철준 교수) 1952년 문학박사 학위를 땄다.[17] 교수 재직 동안 1945년~1951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195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장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 196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각각 역임 후 1962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는데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초빙된 적도 있었다.

해방 후 친일 논란으로 그의 활동은 어느 정도 위축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 후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사학자들이 월북 및 납북되고 대신 실증 사학이 주류 사학으로 다시 격상하여 그의 활동 영역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전쟁 당시부터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4년간 지내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부회장으로 부임 후 1955년 진단학회 이사장으로서 학회에 복귀해 사학계 원로로 지위를 굳혔고 1960년 4.19 혁명 후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면서[18] 문교부 장관을 4달간 맡았다. 그는 임기 초부터 학원의 정치 도구화 및 경찰의 학원 감시를 배격한다고 했고 '학원 정상화, 사도 확립, 교육 중립성 확보' 등 3대 원칙을 내걸고 5월 10일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당시 성행하던 학원 민주화 운동에 부정적 입장을 표했고 싹터오르던 '교원노조 운동'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해체 요구를 하는 등 4.19 정신을 위배하기도 했다.

1960년 장면 내각 수립 후 학술원 회장을 21년간 맡으며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국민대학 학장, 고려대학교 교우회장(1957~1966)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 수립 후 1965~1978년까지 학교법인 동구학원[19] 이사장, 1966년 5.16 민족상 심사위원회 고문이사, 1970년 국토통일원 고문 및 민족문화추진회 이사(1982년부터 이사장), 1975~1989년까지 학교법인 송산학원[20] 이사장 등을 각각 거쳤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부터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8년간 재직했다.

말년에 진단학회 운영을 빼고는 특별한 일 없이 권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제자와 <환단고기> 역자 임승국 같은 소위 재야사학자들이 자기네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로 그의 존재를 들어 '식민사학의 괴수'로서 대중 일부에게 낙인찍히고 말았다. 심지어 이병도를 사칭해서 회개하고 단군을 인정했다는 식의 책이 나오기까지 했는데 물론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 애초에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단군신화의 실체와 의의를 부정한 적이 없다. '이병도 회개설'의 출전은 최태영 박사의 <인간 단군을 찾아서>라는 회고록인데 신빙성은 적다.[21] 그리고 아래 설명되어 있듯이 이병도는 단군 신화의 내용 일부에 대해서는 회의적 반응이나 추상화된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으나 단군의 실존을 부정한 적이 없다. 이병도가 1923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조선사개강>, 1948년 출판한 <조선사대관> 등의 저작에서 알 수 있듯이 이병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단군의 실존을 긍정하고 있다. 비슷한 주장으로 죽기 전 이병도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주장을 뒤엎고 단군이 실존한다며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미 그는 1986년 10월 9일 개천절을 기념해 조선일보에 특별기고문을 올린 바 있는데 내용을 보면 이전에 이병도 본인이 했던 주장들을 다시 꺼내는 수준이다.

죽기 직전까지도 진단학회, 송산학원 운영에 힘쓰며 꾸준히 글을 쓰고 연구를 하던 중에 1989년 9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죽기 불과 4달 전에는 '올해의 고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 굉장히 장수하는 집안이다. 이병도 박사는 5남 5녀의 자식이 있는데 1991년 53세의 나이로 별세한 4녀 이영희(李永姬, 1937. 4. 5 ~ 1991)와 2002년 88세로 별세한 장남 이기녕(李基寧, 1913. 7. 26 ~ 2002. 1. 29) 박사, 2016년 99세로 별세한 차남 이춘녕(李春寧, 1917. 3. 27 ~ 2016. 7. 31)[22] 박사, 2019년 95세로 별세한 3남 이태녕(李泰寧. 1924. 2. 8 ~ 2019. 3. 6) 박사를 제외하고 모두 생존해 있다. 이춘녕 박사는 농학계의 권위자이며 이장무[23] 전 서울대학교 총장, 고고학자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전 문화재청장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의 부친이다. 한국추상화가 장욱진[24] 화백의 부인인 장녀 이순경(李舜卿, 1920. 9. 3 ~ ) 여사는 1920년 9월 3일생으로 2022년 기준 101세다. 그밖에 자녀들도 80~90대로 모두 생존해 있다. 4남 이동녕(李東寧, 1927. 7. 22 ~ ) 박사는 1927년 7월 22일생으로 94세, 차녀 이운경(李雲卿, 1931. 9. 9 ~ ) 원장은 1931년 9월 9일생으로 90세, 5남 이본녕(李本寧, 1936. 1. 14 ~ ) 박사는 1936년 1월 14일생으로 86세다.
  • 가족 관계를 살펴보면 친일파인 해평 윤씨 윤치영 집안과 3중 사돈을 맺고 있다. 정확하게 이병도의 맏형 이병묵(李丙默, 1876. 6. 19 ~ 1950. 2. 12)[25]의 셋째 아들(이병도의 조카) 이재녕(李宰寧, 1918. 5. 4 ~ ?)[26]이 윤치영의 둘째 형 윤치소(尹致昭)의 딸 (윤치영의 조카이자 윤보선의 동생) 윤계경(尹桂卿, 1918. 2. 13 ~ ?)과 결혼하여 이중 사돈, 윤치소의 누나 윤노덕(尹老德, 1890. 6. 14 ~ ?)이 이병도의 6촌 재종형(再從兄) 이병림(李丙琳, 1890. 6. 18 ~ ?)과 결혼하여 삼중 사돈이다. 그밖에도 이병도의 장인은 일본군 중장을 지낸 조성근이다.
  • 이러한 개인가족사 외에도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한 것 때문에 치암 신석호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친일인명사전 2권 876~877P). 사전에 등재된 그의 활동 내역은 1925년 8월에서 1927년 5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 일했으며 이후 1938년 6월까지 촉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청구학회 활동 경력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병도의 제자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이병도 등의 진단학회 창설 경위가 청구학회에 편승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학회에 소속되어 있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증언에 의하면 "다만 진단학회의 주요 멤버의 1명인 이병도 씨가 청구학회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이씨는 우리들이 가기 전부터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로 있었고, 후에는 촉탁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27]라고 하여 이 부분은 함부로 속단하기 어렵고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그 외에 역사 왜곡 단체인 조선사편수회의 소속 기간이 장기간에 달한다는 점에서 친일 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역대 수뇌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인 <조선사> 편찬 작업에 '수사관보'와 '촉탁'의 신분을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참여한 조선인 중 1명이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했던 역대 수사관보는 총 10명으로 그 중에서 조선인은 이병도, 신석호, 이종명 등 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특히 조선사편수회는 스스로를 조선총독부 산하에 직속으로 설치된 "하나의 새로운 독립 관청"이라고 규정했던 점이 있는만큼 실제로 이병도의 이름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도 올라있다.
  • 월간조선 2002년 10월호에 따르면 이병도는 교사 생활 중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로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근무한 것이었고 무급으로 근무한 것과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 등으로 인해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었다고도 하고 있다. 그 밖에 광복 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할 때도 일본에서 황국사관을 신봉하고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대학(天理大學)에 가서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했다는 증언이 있지만 증거가 증언 밖에 없는데다 증언이 정말 사실인지도 불확실하다.
  • 흔히 웹상에서 볼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 소문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지 않은 사실과 혼동된 결과로 추측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명단에는 이병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다.
  • 시사저널 1992년 8월 27일자 기사에 보면 1979년 이완용의 묘를 이장할 때 나온 부장품 중 하나로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 중인 관뚜껑을 이병도가 개인 연구에 쓴다고 가져가서는 불태워 버렸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8선에 빛나는 그가 지위를 남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이병도를 변명하는 입장의 이야기로는 관뚜껑을 없앤게 어차피 조리돌림당할 관을 자기 손으로 태워서 아예 없애는게 낫다고 판단했지 않나 말한다. 몇몇 이들은 이완용 때문에 평생 시달린 까닭에 이완용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어 사학자로서의 책임감을 버리고 개인 감정을 우선한 결과라고도 한다.
  • 1984년 잡지 '학원'과 인터뷰에서 이병도는 이완용과 관계성을 부인하다 못해 이완용은 "익산 출신이다"라고 슬쩍 흘리는데 이 말 때문에 실제로는 경기도 성남시 지역 출신인 이완용이 졸지에 전라도 반역향의 화신 쯤으로 지역 감정에 이용되기도 했다. 이완용의 '익산 출신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병도의 1984년 학원지 대담 사실을 주구장창 들고 나와 논쟁이 컸었다. 이완용과 이병도는 성남 판교의 우봉 이씨 집성촌이 고향으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이완용 생가에 대해 원주민 증언과 더불어 2001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1번지 또는 223번지[28]로 생가터를 확정한 사실이 있다. 이후 2005년 성남시청에서는 이 생가터의 위치를 백현동 226-1번지[29]로 바로잡았다. 물론 이완용과 이병도는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이병도가 특혜를 받은 것이 적어도 드러난 것은 없어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의 행동들은 역사학자로서 온당한 것인가 의구심이 들게 한다.
  • 사실 이병도가 이완용 후손이라고 쓰는 사람들도 제대로 안 알아보고 쓰는게 어떤 곳에서는 손자라고 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조카라고도 한다. 같은 편끼리도 말이 엇갈리는 아이러니한 상황. 사단법인 모 단체에서 전국 학교를 돌면서 환단고기를 참된 역사라고 하며 최태영을 두둔하고 이병도 박사를 '식민사학의 거두, 이완용의 조카'라는 되도 않는 강의를 하고 있다. 다만 "이병도의 부친인 이봉구가 이완용의 자택에서 집사로 일했으며 덕분에 이병도의 형인 이병희는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는 이운구 성균관대학교 전 교수(우봉 이씨)의 증언과 더불어 사학자로 적절치 못한 부분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병도의 부친 이봉구는 1907년에 죽은걸로 알려져 있어 집사를 언제 한건지는 사실 검증이 필요하다. 그가 회장을 8선이나 하고 원로위원까지 역임한 학술원에서도 이완용과 관계성을 두고 뒷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 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이런 뒷말에 대해 이완용과 이병도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관련 블로그
  • 위 이야기들에 덧붙이자면, 일단 이병도(李丙燾)와 이완용(李完用)은 각각 25세 병(丙) 항렬, 23세 용(用) 항렬을 쓰고 있어 항렬상으로는 족조(族祖)-족손(族孫) 간으로, 이완용의 조카라는 말은 절대 될 수 없다. 그리고 같은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이긴 하지만 공통 조상이 감찰공파 파조 이기(李圻)로, 이완용은 이기의 장남 이승녕(李承寧)의 13대손이고 이병도는 이기의 차남 이승건(李承健, 1452. 1. 25 ~ 1502. 12. 6)의 15대손이다. 촌수로는 30촌 지간이니 사실상 남이다. 게다가, 이완용은 본래 참판공파(參判公派) 후손이었기에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병도와 이완용은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1956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슲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난 중에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오렬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천명 전시 방첩의 특수 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1951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 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1952년) 대통령 암살 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1954년) 남도부 등의 대남 유격대 사건 88년(1955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기리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1920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입.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 그가 회장으로 몸담았던 진단학회에서는 1980년부터 매년 그의 호를 딴 '두계학술상'을 시상한다.
  •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잘못된 속설(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처벌해서 옥사하고 대동여지도 목판을 불태웠다는 속설)을 처음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 한국 사학계의 서울대학교 카르텔을 형성하고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사회주의 사학에서는 이들 주류 사학자를 '서울대 학파'라고 지칭한다. 학자들 본인은 '강단 사학'이나 '서울대 학파'라고 자칭하지는 않는다.
  •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김명순과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 잡지 '폐허'의 동인이기도 했고, 이병도의 아내인 조남숙과 김명순은 진명여학교 동문이었다. 이 인연으로 인해 김명순은 한동안 이병도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책을 교열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병도 본인도 훗날 김명순과의 인연에 대해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 한국 기성 사학의 대부이자 거두 - 덕분에 더욱 비난받은 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병도 이후 사학계가 이병도의 학설을 종교 교리처럼 떠받든 일은 전혀 없다. 이미 이병도 생전에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병도 자신이 "요즘에는 이기백 등 내 제자들이 내 학설을 잘 따르려 들지 않아"라고 섭섭해한 적도 있다.

학술적으로도 상당히 비판받은 부분이 많은데 특히 그가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 주장해 온 '진한=한강 유역설'은 무리한 점이 많아 살아 생전에도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했다. 고대사 연구에서 지나치게 음상사(音相似)에 의존한 연구 결과들도 비판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초기 백제의 도성(하남위례성)을 둘러싼 '몽촌토성 vs 풍납토성' 논쟁에서 이병도는 풍납토성이 위치한 풍납리(風納里)를 '바람들이'로 뜻을 풀어서 바람들이→바람드리→배암드리와 같은 음운변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면서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 유적이 아니라 삼국사기 초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유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30] 하지만 이후 고고학 조사 결과 나온 유물의 수와 토성의 규모는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가볍게 발라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주장은 폐기당한 상태다. 충주 고구려비 관련 연구에서 "꿈에서 봤다" 드립을 쳤는데 얼마 전 충주 고구려비에서 '영락7년 세제정유' 글자가 판독되면서 역사 관련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기도 하였다. 《역주 삼국사기》와 《역주 삼국유사》에서 보여 준 오역들과 1970~1980년대 사육신 논쟁에서 보여 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 때문에 부산대학교 이재호 교수에게 엄청나게 비판받은 적도 있다.[31] 물론 이런 비판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진 정당한 비판이니 억지로 점철된 환빠들의 주장과는 다르다.

학계에서 학술적으로 꾸준한 비판을 받은 것과 별개로 이병도가 식민사학자라는 비판도 있다. 재야 사학이라 자칭하는 환빠들의 비판으로 치부되기도 하나 실제로 이 비판을 시작한건 사회주의 역사학자들이다. 일단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히려 그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를 내려 주장하는 일본인 사학자의 주장에 반발하여 건국연대를 신라의 경우 내물왕, 백제의 경우 고이왕으로 주장하여 100여 년 이상 끌어올리는 등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들을 내세웠다.[32] 이병도 본인은 광복 후에 식민사학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주장 관련 자료를 보면 이병도의 단군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위만은 조선인이다"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도 이병도라는 것.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병도가 일제 식민사학자들한테 이어받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서북한 일대로 비정한 견해는 그 뿌리가 가깝게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사회주의 사학의 경우는 이병도의 개인사를 가지고 비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사회주의 역사학에서의 이병도 비판은 백남운이 월북한[33] 한국전 시기 이후로는 정체되게 되어 지금에 와서는 그 분들이 그리 말했다는 식으로 강의에서 언급된다.

광복 이후 친일 문제의 역사학적 평가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사학자 및 사회주의 사학자들과 대립한 탓에 진단학회가 폭삭 무너진 경우도 있어서 평이 썩 좋지는 않다. 단, 정치적 상황으로 봐서는 실증 사학의 사정이 나았는데 민족주의 사학자는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신채호박은식 등은 안정적인 학술 활동을 하지 못하고 저서 몇 권만을 남긴 채 사망하였고 일제의 직접적인 역사학적 공격 대상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학계에서 신채호는 사상 문제로 반 매장 상태였고 안재홍이나 정인보 등은 납북당했다. 사회주의 사학 또한 광복 이후 남한에서 된서리를 맞았고 백남운과 김석형이 월북하면서 남한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다. 북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연구 성과를 낸 바 있으나 사상색이 섞이지 않는게 사실상 힘든 상황이고 남한에는 더더욱 전해지기 어려웠다.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학이 많은 비판을 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이런 학자들이 살아있었다면 역사학의 방향이 훨씬 다양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병도를 비난하는 부류 중 환빠와 같은 유사역사학은 정작 이병도의 방식을 답습하거나 오히려 이병도보다 더욱 후퇴한 방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유사역사학에서는 시대에 따른 지명의 변천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한글 독음만 같고 한자는 다른 지명을 동일시하면서 언어의 유사성에 따른 추론을 맹신하는데 이는 이병도의 음상사 연구보다도 더욱 뒤떨어진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혈통민족영토의 구분 및 관계를 매우 자의적으로 행하는데 이병도의 '위만 조선인설'과 같은 특유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이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from: 이병도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2022-07-03.


신라 제8대 국왕
阿達羅 尼師今 | 아달라 이사금

신라의 제8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일성 이사금의 아들이며 왕비는 지마 이사금의 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다. 이는 8촌 사이의 족내 근친혼인데 이 시기 석탈해의 후손인 석씨 일족의 힘이 강해지자 박씨 왕족의 힘을 규합하기 위해[2] 세력 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기 신라의 마지막 박씨로 기록된 군주이다. 《삼국사기》 기록 이전 《일본서기》에서 이사부가 '가나'(일본식 이두)를 사용해 '이질부례지'로 기록된 것처럼 한반도식 이름은 '아달라'이지만 신라 중대 무렵부터 한반도식 이름에 중국식 단성을 붙여 기록했기 때문에 선조들과 같이 《삼국사기》에선 박씨로 기록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성씨를 소급해서 붙인 거고 아달라 시대 당시에도 성씨를 박씨 단성으로 썼을 가능성은 낮다. 그의 사망 이후 왕위는 석씨와 김씨에게 이어졌고, 훗날 아달라 이사금의 머나먼 자손이자 김씨 헌강왕의 사위인 박경휘가 제53대 신덕왕으로 다시 왕위에 오를 때까지 박씨는 기록상으로만 보면 무려 728년 동안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물 이사금 혹은 내물 마립간이전 신라 임금들은 기년을 꽤 수정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즘 대세인 논의로 따져도, 꽤 긴 기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박씨는 이 기간 동안 석씨처럼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고, 신라의 주요 귀족 가문의 지위를 수백년간 계속 유지했다. 왕비도 많이 배출하는 편이어서 신덕왕이 헌강왕의 사위였다. 비록 박씨 가문이 아달라 이사금 이후에 왕위를 잠시 잃기는 했지만 아달라 이사금 치세에 신라는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영역을 지금의 경상도 북쪽 끝 죽령[3]과 조령(문경새재)이 있는 소백산맥까지 확장했다. 소백산맥 교통로의 개척은 이제 신라가 소백산맥 바깥 강원-충청-전라 지역까지 진출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기 쉬운 천혜의 지형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이 지역을 선점하고 굳혀서 진흥왕 이전까지 가야와 대결하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 가능했다.

--> 계속해서 권력싸움의 요소를 타국에 역사에 개입해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국계이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가 이루어진 역겨운 권력투쟁만의 형식으로 타국 역사를 이해한다. 때문에 그들은 신성과 정신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힘을 규합한다'느니, '힘이 강제지자 세력 연합'이라느니, 그들 즉 현대 남한역사학자들의 정체성이 옛 신라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제6대 지마 이사금 때는 상당히 좋았고, 제7대 일성 이사금 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아달라 이사금 시기에는 백제와 다시 사이가 나빠졌는데 발단은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들켜버리자 백제로 도망가버린 사건때문이었다. 아달라 이사금은 신라의 범죄자니까 돌려보내라고 백제 왕한테 송환 요구를 했다. 그런데 백제가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길선에 대한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아달라 이사금은 화가 나 즉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갔는데 백제는 우주방어로 일관했고, 일단 신라군은 군량이 떨어져 퇴각했다. 167년 7월 백제가 신라의 서쪽 2개 성을 공격하자 8월에 무려 2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했는데[4], 당시 백제로서도 상당히 위협적인 군세였기에 결국 잡아간 신라 백성들을 돌려주면서 화친했다. 그러나 170년 백제는 다시 신라를 침략했는데 소소한 노략질 수준이었고, 백제가 쳐들어오기 직전에 서라벌에 지진 + 서리 + 우박 3단 콤보가 와서 어수선했기 때문에 그런지 이번에는 변변한 반격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56년(재위 3년) 계립령(鷄立嶺)[5]을 열었다는 기록과 158년(재위 5년) 죽령을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달라 이사금 재위 당시 신라의 영역은 낙동강 서쪽 일부를 제외하면 지금의 경상북도 대부분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두 고개를 개척한 것은, 소백산맥이 험해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충청 등 바깥 지역까지 언제든지 진출이 가능해졌고 금강남한강을 통한 교역도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있다. 기년 수정을 좀 염두에 둔다 치면, 실제로 대전광역시 월평동 유적에서 비교적 이른 4세기 중후반의 신라 토기가 출토된 것도 그런 사정을 방증한다.

173년(재위 20년)에는 일본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ひみこ,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과 간극이 70여 년인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위나라 명제 조예에게 조공한 히미코의 기록이 둘 다 연대가 정확하다면 신라에 사신을 보냈을 때 히미코는 막 즉위한 어린 여왕이었고, 중국 삼국시대에는 할머니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과거의 짧은 수명, 고고학적 교차검증의 부재 등으로 보아 그랬을 개연성은 상당히 낮다. 오히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이 60년 정도 차이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의 기년이 한 갑자(60년) 정도 소급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또한 천재지변 기록도 선대 왕들 때처럼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일식기근흙비 등등.

아달라 이사금은 가 일곱 자이고, 콧마루가 두툼하며 커서 범상치 않은 형상이었다고 한다. 말단비대증? 이외에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도 아달라 이사금 때의 일이다.

그 외에, 벌휴 이사금의 차남 석이매의 아들 내해 이사금의 어머니가 '내례부인'으로 적혀 있는데 이 부분이 주목할만하다. 이 내례부인이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부인과 동일 인물이라면 막장이 된다. 내해의 어머니로 나오는 내례부인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하나도 없고, 벌휴 이사금의 맏손자인 조분 이사금이 아닌 차남의 아들 내해 이사금이 먼저 즉위하는 정황을 봐서는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내례부인은 지마 이사금의 딸로 아달라 이사금의 조카가 된다. 이전과 이후의 사례를 비추어보면 지마 이사금의 사위라는 것이 아달라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내례부인과 아달라 이사금 사이에 금이 갔고, 내례부인이 석씨 일가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벌휴 이사금 사후 조분 이사금이 나이가 어려 내해 이사금이 즉위했는데 대략 15~20세였을 것이라 추정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내해 이사금이 태어난 것은 아달라 이사금 말기가 된다. 만약 내례부인이 간통을 해 태어난 아이가 내해 이사금이라면 석이매는 큰 벌을 받았을 것이고, 이후 왕비와 벌휴 이사금은 힘을 합쳐 아달라 이사금을 제거하고 즉위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벌휴 이사금보다 석이매가 먼저 사망한 것도 이를 방증할 수 있다. 물론 그냥 아달라 이사금 사후 재혼했을 가능성도 있다. 재혼한 직후 내해 이사금이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즉위시의 나이는 12세. 다만, 신라시대에 비슷한 이름이나 같은 이름의 여성들이 많아 단순한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 -아달라 이사금조-에는 그에게 아들이 없었다고 했는데, 수백년 뒤 다시 등장한 박씨 왕인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자손이라고 쓰여 있어 모순이다.[6] 《삼국사기》라는 같은 책 안에서도 초반과 후반의 말이 다르다. 이렇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면 먼저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과거에 서자는 일반적인 아들로 안 쳐주는 경우가 많았고[7] 특히 신라는 적녀는 물론 사위보다도 서자가 계승권이 낮은 경우가 꽤 보이기에 더 그렇다. 아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아들이, 딸이라도 있었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했을 텐데 석이매가 내례부인을 취했다면 그 사이에 자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조선 시대라면 별 무리 없이 왕이 되었을 효공왕마저도 서자라는 핸디캡 탓에 때문에 일단은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내준 다음 진성여왕이 죽은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신덕왕의 조상이 정말로 아달라 이사금의 서자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다. 물론, 신덕왕이 신라 하대의 어느 귀족이었을 뿐인데 정통성을 위해 자신이 아달라 이사금의 자손이라 주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한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신덕왕이 원래 김씨인데 이후 즉위하는 고려 왕실이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박씨로 바꿨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으나 이는 지금봐선 아예 개연성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낭설이다. 훗날 부활한 신라 박씨 왕실을 가장 많이 탄압하고 큰 피해를 주며 미워한 건 후백제의 견훤과 그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김씨 족단 일부 반란 세력이었고, 이들과 정반대 입장에서 대립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이 박씨 왕실 때 처음으로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구태여 그가 신덕왕계를 박씨로 격하해서 얻을 이익은 전혀 없었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이자 효공왕의 매제로서 왕위를 승계한 것인데, 딱히 신라 왕실 전통의 계승 원칙을 위배한 건 아니지만 오랜 김씨 계승을 끊고 즉위했으므로 가급적 그나마 가장 가까운 박씨 임금 혈통을 자처하는 것이 이득이었을 개연성은 있다. 신덕왕은 죽은 뒤 경주 시가지 남쪽의 배동 삼릉에 묻혔는데 원래 아달라 이사금 한 사람만 묻혀있던 무덤이었지만 수백년 뒤 부활한 박씨 왕의 후손들이 죽은 뒤 아달라 이사금의 바로 옆에 묻혀서 삼릉(三陵)이 됐고, 나머지 하나인 경애왕릉도 근처에 있다.

  • 아달라 이사금 때 등장한 김구도(仇道)라는 인물은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구도는 김알지의 5대손(현손의 아들)이며 미추 이사금의 아버지다. 구도는 파진찬이 되어서 김씨로는 처음으로 미추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는데 발판을 다진 인물이다.
  • 성()과 이름(아달라)을 합치면 훌륭한 섹드립의 소재가 된다. 하지만 아달라 시대에 실제로 박아달라로 불리지는 않았다. 이사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박씨 또는 김씨로 단성으로 기록된 것은[8] 신라 말기와 고려 때 한반도식 이름을 중국식 단성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박씨인 것이지 중국식 단성 이전에는 아달라 자체가 성과 이름으로 같이 사용되었다. 지마 이사금과 함께[9] 한창 그렇고 그런 쪽에 호기심이 많을 중고딩들 사이에서 영혼의 콤비로 통한다.

--> 정말로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이라면, 그들의 조상의 이름으로 섹드립을 칠리가 있겠는가? '박아달라'나 '박지마' 이름. 그들이 저급하게도 이름으로 놀리고, 비웃는 것은 그들(그 한국인)의 정체성이 중국계임을 숨기는 침투 암세포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비웃는 것은 아닐수도 있다. 그저 관성과 그들의 사상 기본 정신에서 구성되어서 비웃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달라 이사금 대의 인물 :

  • 길선
  • 흥선
  • 김구도
  • 계원
  • 구수해

一年春二月 아달라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계원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다
三年夏四月 서리가 내리고 계립령의 길을 열다
四年春二月 감물과 마산의 두 현을 설치하다
四年春三月 장령진에 순행하다
五年春三月 죽령을 열고, 왜인이 예방하다
七年夏四月 알천의 물이 넘치다
八年秋八月 누리가 곡식을 해치다
九年 사도성에 순행하다
十一年春二月 용이 서울에 나타나다
十二年冬十月 아찬 길선이 반란을 도모하다 백제로 망명하다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四年秋七月 백제가 두 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秋八月 군대를 보내니 백제가 화친을 청하다
十五年夏四月 흥선을 이찬으로 삼다
十七年春二月 시조묘를 중수하다
十七年秋七月 지진이 일어나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十七年冬十月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다
十八年 봄에 백성들이 굶주리다
十九年春一月 구도를 파진찬으로 삼고 구수혜를 일길찬으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시조묘에 병고가 생기고 전염병이 돌다
二十年夏五月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다
二十一年春一月 흙비가 내리다
二十一年春二月 우물이 마르다
三十一年春三月 왕이 죽다

대체적으로 백제와의 전쟁과 각종 자연재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지역을 순행하는 모습이 종종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재위 22년부터 죽을 때까지의 10년 동안의 기사가 없다. 신라 상대의 국왕들의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지막 3이 2에서 오기된 것으로 보고 21년차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달라 이사금부터 《삼국사기》 제2권이 시작된다.

[1] 《삼국유사》에 7척이라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고대사의 1척은 거의 전한의 1척인 23cm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2] 다른 가문과 혼인하면 부인 가문으로 힘이 분산되므로 삼국시대~고려시대 초기는 권력 분산을 막기 위한 근친혼이 자주 있었다.[3] 이 때 죽령을 설명하면서 이 곳에 길을 낸 사람 이름을 죽죽이라고 소개하는데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한 죽죽과는 동명이인이다.[4]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앞서 파견한 흥선의 20,000명의 병력과 아달라 이사금 자신이 직접 이끈 기병 8,000명이었다고 하는데  고고학으로 파악되는 초기 신라의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대군이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깎아먹는 부분 중 하나이다.[5] 문경새재 동쪽 길, 지금의 하늘재로 추정된다.[6] 《밀양 박씨 세보》에 따르면, 아달라 - 벽방(碧芳) - 무영(武英) - 판득(判得) - 광흠(光欽) - 미일(美一) - 내물(乃物) - 상건(相建) - 인엽(仁燁) - 계보(啓輔) - 명신(明信) - 정환(貞環) - 노겸(露兼) - 남선(楠善) - 금산(金山) - 응찬(應燦) - 덕흥(德興) - 대녕(大寧) - 이순(尼淳) - 융검(隆劒) - 지곤(之坤) - 성순(成順) - 2남 예겸(乂兼) - 신덕왕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덕왕은 아달라 이사금의 24세손이 된다. 그러나 아달라와 예겸 사이의 인물들 21명 모두 역사서에 행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으므로, 오직 《족보》에만 나오는 이 가계는 후대에 창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신덕왕은 모계가 아달라 이사금 계통이라 부계를 아달라의 후손으로 설정한 것은 모두 오류이다.[7] 태종 무열왕에게는 7명의 적자와 3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당나라에게 보낸 국서에는 자신에게 7명의 아들이 있다고 기재했다.[8] 이사부는 《삼국사기》도 《삼국유사》도 김씨, 박씨 기록이 어긋난다. 당시 중국식 단성을 쓰지 않아서 기록이 상이한 것[9] 물론 이 분도 성이 박씨로 풀네임은 박지마. 공교롭게도 이 둘은 사촌지간이다.

from: 아달라 이사금나무위키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22-07-03. Retrieved2022-07-03.

--> 무엇보다 소름돋는 점은 어째서 '아달라 이사금대의 인물'을 나열해두었는가라는 점입니다. 연오랑길선, 흥선, 김구도, 계원, 구수해 ) 현대 이씨들이 그러하고 있듯이, 미래에 이들이 본인 중국계의 후손이라고 날조하기 위함은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그들은 워낙에 날조능력이 뛰어나며, 그 심도가 심각하기에 의지하지 않을려고 해도 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역시 중국의 정신은 어떻게든 추적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추가 자료 링크 :

태권더 박(テコンダー 朴) 関連ーアカイブ (링크)


[단독] '과한 애국심에…' 일제 찬양 90대 박모 노인, 지팡이로 때려 숨지게 (링크)


오월국(吳越國) 박암(朴巖) & 후사벌왕(後沙伐王) 박언창(朴彦昌)에 대한 의문(疑問) (링크)

中華系の捏造 (アカイブ)(링크)


朴時亨、北朝鮮の歴史学者。朝鮮社会科学院歴史研究所(朝鮮語: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院士。(링크)

‘파친코’의 박소희, 우리가 몰랐던 재일한국인 배우 (링크)

신라 포석정에 대해서 (아카이브) (링크)

Masami Kuni (also known as Park Yeong-in) (링크)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History and the Changes in East Asia (링크)

박씨 씨족 집단이 겪은 역사의 흐름,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 (링크)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진국과 마한, 진변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링크)


밀양박씨 종중의 600년 된 사당 철거 위기 (링크)


빡대가리, 빡빡이, 21세기에 생긴 신조어 '빡'

박다 = 20~21세기 부터 성적 용어로 이용됨

'파쿠리'라는 신조어 탄생

박=돼지 가 되는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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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날조와 기스라이팅을 당해왔다면, 이제 이 중국계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명백하지 않은가? 중국계들에게 당해온 바처럼 1000년의 복수를 준비하자. 유전자 분석을 통해 할게되는 유전적 유사성? 미래의 아시아민족의 단결? 그런건 전부 필요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하고 끈적하고 복수님에 불타는 정신이다. 만약에 서로 호혜적으로 날조를 하지 않고, 마땅히 인류집단으로서의 존중을 했다면 우리의 단합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날조와 정신공격, 거짓을 통해 즐기고 착취해 왔다. 축하한다. 참 즐거웠을 것이다. 그럼 그 즐거움의 마땅한 대가를 치르자. 너희의 멸망과 고통, 절망을 바란다. 마땅한 친우의 가능성을 지운 것은 바로 너희이다. 이는 분명히 해두고 영원할 저주와 복수의 순환에 함께 빠져보자. 너희에게 죽더라도 저주를 세계에 남기고 죽을 것이며, 살아있는동안 너희를 파멸하기위해서 고민하고 집중할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해야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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