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東史] 근현대 이슬람사 개관

근현대 이슬람사 개관

I. 서문
II. 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의 이슬람 사회
III. 아랍세계, 각 국가들의 형성
IV. 석유문제
V. 이란혁명(1979)

I. 서문

  이슬람의 근대 시작점은 어디일까? 바로 1798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알렉산드리아 침공이라 할 수 있다. 150명의 학자와 3만5천의 병사로 몰타 점령한 나폴레옹은 1798년 7월1일 이집트에 상륙. 7월3일 알렉산드리아 점령. 7월 27일 피난민들 앞에서 전투하여 맘루크 군을 상대로 완벽하게 승리한다. 1801년까지 프랑스가 이집트를 지배했었으나, 1802년부터는 영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오스만 튀르크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결국 1914년 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삼아 오스만은 완전히 몰락한다.

1798년부터를 Moderen Contemporary World라고 한다. 나폴레옹의 1798년 침략은 문화적 침략이기도 했다. 150명 가량의 학자들을 나폴레옹이 데리고 다닌다. 로제타 스톤을 이때 발굴 및 해독하여 Egyptology의 시작을 알린다. 그외에 다리우스 비문, 쿠크쉬드 비문이라던지 모두 서양인들이 발굴한 것이다. 

II. 1차세계대전 이전 이슬람 사회와 근대주의

  1914년 WWI 발발, 영국은 이 전쟁에서 오스만의 전력을 얕보았다. 갈리폴리를 점령해 빠르게 전쟁을 끝내려 했으나, 50만명의 사상자로 영국이 패배한다. 오스만을 얕보았음을 꺠달은 영국은 메카&메디나의 존장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sein)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1915년 7월~1916년 3월까지 이집트에 있던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멕마흔(Hendy McMahan)은 후세인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아랍 독립국가를 만드는 것에 영국이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다만, 정확한 아랍독립국가를 만들겠다는 위치가 언급되지 않는데, 후세인과 영국의 '아랍'이라는 개념의 영역 범위에 대한 생각이 불일치했고 추후에 문제가 문제가 된다.

①. 후세인-멕마흔 Correspondence 1916.3 -> Arab revolt 1916.6.10
②. The Asia minor Agrement 1916.5.16
흑해지역은 러시아 예정. 중동 중에서 아랍어를 쓰는 지역을 프랑스-영국이 나눠갖는다. 
③. 1917.11.2 Balfour Declaration

※벨포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에 대해서: 
영국의 대부호 유대인 로스차일드경에게 벨포어(Balfour)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팔레스타인에 National Home을 만들어주는 것을 약속한다. 다만, 원문에선 "약속"이라고 해석되는 단어는 없고, 단지 With Favor라고 표현한다. (原文=For the Jewish people in Palestine). 보통 이스라엘은 시온주의 세력이 강했고, 유대인이 아니어도 크리스찬 시온주의자들이 있었다. 예를들어, 벨포어는 나중에 “70만 아랍인보다 시온주의가 중요하다”는 회고를 밝힌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 중이던 독일에는 유대인들이 많았는데, 독일이 먼저 유대인들을 우대하는 선언을 하면, 그들의 저력이 우려가 되므로 선언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수에즈 운하를 확보하려면, 팔레스타인 지역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 전쟁 후에 건국될 이스라엘 국가는 수에즈 수호 및 영국 이익 수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아랍과 영국이 모두 갖고싶어해 추후 논의 대상이 되고, International 국제 관리 구역으로 설정된다.

①②③의 주장들은 서로 모순적이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던 영국의 급박한 상황에 기인한 신뢰불가능한 약속들이었다.

1919년 파리박람회에서 1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를 이야기하는데, 1920년 San Remo에서 Mandate(위임통치령)을 만든다. 러시아는 10월혁명으로 불참이 불가피해지면서 탈락. 그래서 중동 영역을

(1) 시리아(Syria) = 프랑스, Syria+Lebanon
(2) 팔레스타인-메소포타미아 = UK
(2-1) 팔레스타인 = (TransJordan+Palestine) by 윈스턴 처칠(1921년)

이와 같이 분리한다. 즉, 중동의 국경선은 모두 서양인들에 의해 그어진 것이고, 복잡한 문제가 형성된다.

III. 아랍세계, 각 국가들의 형성

  아랍의 근대의 시작점은 이집트에서 시작하였다. 1798년~1801년까지 프랑스가 이집트를 지배했으나, 1802부터 영국이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중동에서 상영된 최초의 영화가 이집트에서 상영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프랑스는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1859) 개발을 시작한다. De Lessept(레스포트)라는 프랑스인 사업가가 수에즈 운하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이집트가 지분을 나눠 가졌으나, 이집트는 쌓이는 빚으로 인해서 지분을 팔았고, 남은 지분을 영국이 차지한다. 수에즈 운하의 실질적 공사는 이집트인들이 진행했고, 여기에 프랑스와 영국의 자본이 투입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바로 수에즈 운하 회사(Canal Company)이다. 수에즈 운하(이집트)는 1869년 완성되었고, 영국은 중요한 수에즈 운하 점유를 위해 이전의 간접통치와 달리, 1882년에 영국군이 직접 진입한다. 1914년에 1차세계대전 이후부터는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1922년에서야 이집트는 독립한다.

영국군대가 수에즈에 주둔하고 영국이 이집트를 통제하는 상황에 반기를 가진 집단이 1928년에 형성된, 무슬림만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던, 무슬림 형제단이다. 1948년, 이집트는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참패한다. 전쟁 패배에 불만을 가진 이집트인들은 1952년에 자유장교단(Free Officer)의 쿠데타로 1953년부터 이집트 나세리 공화정을 세운다. 한국의 박정희도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인들이 강제점한 수에즈 운하를 되찾고자 (미국이나 소련에게 알리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단적으로 작전을 벌였으나, 갑작스런 구시대 제국들의 행동에 대해, 미국은 석유금수조치, 소련은 핵 위협을 하여, 결국 다시 수에즈 운하를 이집트에게 양도한다. 그리고 비록 강대한 영국-프랑스에게 빼았기었으나, 소련과 미국의 개입으로 다시 수에즈 운하를 되찾고, 정말로 국유화에 성공한 이집트 정권은 큰 지지를 얻는다. 

이제 다른 나라를 살펴보자. 레바논은 프랑스에게 그 지역에 살던 마론파 크리스천들이 요청을 하여, 레바논이라는 국가가 탄생한다. 그 구체적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시리아 내 레바논 산맥, 여기에 크리스찬인 마론파Maronites가 살았다. 프랑스인 시리아 총독에게 크리스천 마론파 집단들만의 단독 국가를 세우기를 요청한다. 같은 크리스천의 요청을 수용한 프랑스는, 국가를 세우고, 지역의 크리스찬과 무슬림을 1935년 인구조사를 기준 6:5로 권력분배를 하였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인구증가보다 무슬림의 인구증가속도가 더 빨랐고, 이슬림의 인구역전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레바논은 본래 크리스천 기반의 국가였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슬림이 인구 다수인 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사실, 최초부터 6:5의 인구비율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혹이 있다. 같은 크리스천인 프랑스가 6:5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레바논은 크리스천-무슬림 사이의 내전 이후에 5:5로 권력을 재분배했다. 그래서 레바논은 대통령은 크리스찬 & 총리는 Sunni파 & 국회의장은 Shia파로 고정되어 있다. 현대에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Failed State라고 불리우고 있다. 레바논에서 Shia는 주로 레바논 남부에 살고 그 남부에 사는 이들이 현대의 ‘헤즈볼라’이다.

요르단의 건국을 살펴본다. 1928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팔레스타인’과 ‘Trans-요르단’으로 지역을 분할한다. 요르단 국왕으로 취임한 인물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의 주인공인 후세인의 둘째 아들이다, 후세인의 첫째 아들은 「메카」의 '히자즈 왕국'의 국왕이었으나 압둘 아시스의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점령 당했고 흡수되었다. 후세인의 셋째 아들은 '시리아'를 점령했는데, 프랑스군에게 패배하고,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이후, 영국이 이라크의 초대 국왕으로 그를 세웠으나, 1958년에 이라크의 군부쿠데타로 무너진다. 즉, 메카의 존장 가문이던 히자즈의 후계는 둘째의 요르단만 남은 것이다.

IV. 석유문제

  중동에서 가장 복잡한 문제가 석유로 인한 문제이다. 1908년 최초로 마스제데 솔레이만(페르시아; Iran 内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는데, 석유가 추출되는 이란은 본래 영국의 지배지는 아니었다. 1차세계대전 중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으로 영국이 차지한다. 또 1927년에 키르쿠크(Kirkuk, Iraq 内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된다. 1928년에는 바레인에서 석유가 발견된다. 본래 UAE - Bahrain - Qatar은 영국과 Trucial State였다. 즉 협정국(사실상 보호령)이었다.

영국-미국-프랑스가 셀(영국-미국 합자 회사)의 각각 23.7%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오스만튀르크의 관리이자 아르메니아 출신 영국 시민권자가 여기 지분의 남은 것을 가진다. 오스만이 지배하던 지역에 빨간 선을 긋고, 그 지역 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 4개 회사들이 반드시 같이 사업을 해야 한다는 조약을 맺는다. 이것이 1927년 채결된 Redline Agrement이다. 그런데 바레인의 체굴권을 미국 회사에서 모두 구매한다. 미국 회사 연합 컨소시움으로 구매했으나, 그중 걸프오일이 구매하고, 다음엔 본래 협약에 없던 회사인 Standard Oil Company of California(SOCAL)가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1932년 미국이 마침내 유전을 발견해낸다. 미국은 바레인과 사우디의 지형정보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석유체굴 가능성을 확신한다. 미국의 SOCAL은 사우디에서 1932년 총 7개의 광구를 파고, 1938년에 석유 채굴에 성공한다. 그 광구가 ‘단맘7호정’이며, 이것이 오늘날의 사우디를 만든 석유라고 할 수 있다.

1951년은 이란이 석유를 국유화한 년도이다. 그러나 1953년에는 8월19일에 미국-영국의 공작으로 이란의 수뇌인 모사데드는 쿠테타로 체포된다. 즉 이란석유의 국유화가 실패한 것이다. 한편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은 무슬림들에게 단비와 같은 자부심을 주는 사건이었다. 무슬림세계가 최초로 세상을 흔들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건이다. 무슬림들은 서구에게서 배우는게 아니라 이슬람식으로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대두된다. 1929년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에서 희미하게 시작한 이 사상은 1979년 이란혁명으로 확실하게 성공한다. 파키스탄의 마우두디(Maududi)는 이란의 혁명이 “Shia의 혁명”의 아니라 “이슬람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란 혁명’은 본격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V. 이란혁명(1979년)

  1979년 4월 1일에 헌법통과로 이란 혁명정부가 건설된다. 이란의 대표, 호메이니는 “신이 다스리는 첫날”이라고 선언했다. 이란은 이슬람식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매우 혁명적 주장을 한다. 한편 1979년에는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기도 한다. 또 1979년 미국대사관 점거사건이 발생한다 (한국에선 박정희가 암살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건 때문에, 1979년을 운명의 해라고도 한다.

이란의 79년 4월 혁명은 세속왕정을 이슬람공화국으로 바꾸던 사건이었다. 주 이란 미국대사는 본국에 전보를 보내서, 이란에서 추방된 팔레비 왕이 절대 미국에 들어가선 안된다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란 국민들의 민심으론 팔레비 왕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팔레비는 멕시코에서 잠깐 체류하였으나, 팔레비의 요청과 미국에서 분쟁을 원하는 몇몇 회사들의 로비로 인해서 미국으로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미국-이란의 관계는 완전 최악이 되고, 1979년 주 이란 미국대사관이 민중들에게 점거된다. 이란 민중들의 미국대사관 점거는 25명의 인질들을 444일간 억류했다.

그런데, 미국의 입장에선 팔레비가 정권을 뺴앗기고, 호메이니 같은 이슬람주의자가 정권을 잡는게 나쁘지 않았다. 당시엔 오히려, 이슬람주의자는 반공산주의자이므로 Not bad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아프카니스탄의 경우, 1971년부터 공산당이 정권을 점거했다. 온건파는 파르참(국기) & 과격파는 할커(민중)을 명칭으로 한다. 즉 국기파 & 민중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프카니스탄의 새로운 젊은 공산주의자 지도자는 소련과 사이가 나빴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기도 한 온건파 공산주의자였고, 소련은 그의 사상을 의심한 것이다. 전쟁에 대해 소련의 KGB는 적극적으로 전쟁의 실시를 주장했지만, 소련 군정보국은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을 결코 반대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치국은 KGB의 판단을 믿고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한다. 당시 미국의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회고하길 1979년 7월부터 공산당을 무너트리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소련에게 “소련판 베트남전쟁”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미국이 의도한 함정을 모르고 1979년 12월 24일 타지키스탄을 통해서 아프카니스탄에 침공한다. 

그러나 아프칸 전쟁은 소련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구도가 무신론자vs유신론자의 전쟁이 된다. 당연히 모든 아랍세계의 무슬림들은 무신론자 소련에 대적하기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그리고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무슬림 극단주의 사상이 배양된다. 이란이 1979년에 이론적 틀을 제공하고, 79~89년 동안 이슬람주의자의 배양지가 된다. 많은 아랍-아프칸 전사들이 탄생했고 그 유명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라덴’도 여기에 미국-사우디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참전했었다. 여기에 파키스탄도 아프카니스탄을 지원한다. 결국 소련의 고르바코프는 1985년부터 철군을 고민하고, 1989년에는 완전 철수한다.

한편, 이란혁명은 아랍국가들에게 위협적이었다. 때문에 이라크(Iraq)는 스스로를 아랍세계의 동쪽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겠다고 주장하고, 미국과 아랍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Iraq)와 이란은 전쟁(1980~1988)을 치룬다. 이것이 이란-이라크의 ‘8년전쟁’이다.

즉 아프칸 전쟁(1979~1989)과 동시에 이라크-이란 전쟁(1980~1988)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패배한다. 패전 그리고 전쟁에서 빌린 차관에 의한, 엄청난 빚에 분노를 가진 사담 후세인은 1991년 빚의 청산을 위해 쿠웨이트 유전을 장악한다. 그리고 사우디의 유전까지 점령하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침공은 1991년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에게 저지당한다. 이것이 1차 걸프전쟁이고 아버지 부시는 사담후세인의 야심을 꺾는 것을 목표로 했다. .

1991년을 1차 걸프전쟁이라하고, 2003년을 2차 걸프전쟁이라고 한다. 
2차 걸프전쟁은 아들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한 전쟁이다. 그 명목은 대량살상무기를 없애려는 의도였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자였고, 많은 잔인한 작업들이 이라크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은 당시 강력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미-소 냉전시대의 베트남의 실패를 만회하고 미국의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걸프는 일반명사로 ‘(해안)만’을 의미하기에, 걸프라고 하는 장소는 페르시안만(:걸프)를 의미한다. 왜 일반명사인 '걸프’를 써서 ‘걸프전쟁이라 부르는가? 당시, 이란은 '페르시아만'이라고 불러왔고, 아랍은 ‘아라비아만’이라고 불렀다. 미국이 이것을 고민하다가 ‘만(걸프)’라고 결정한 것이다.


【Timeline】
1979년 이란혁명. 
1982년 이스라엘의 Lebanon 침공
: 시아파 사람들, 이때(82년) 만들어진게 헤즈볼라(Shia파, 이란 후원). 레바논 이슬람 저항운동.
1987년 하마스(Sunni파, 무슬림 형제단).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
1988년 알카에다(Sunni파)
: 종파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목표한다. 이들이 모두 내세우는게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슬람의 문제가 된다. 아랍민족주의에서 이슬람 문제로 넘어가면 불편해지는 이들 = 이란과 적대적인 사우디아라비아. 즉, Political Hegemony 분쟁. 또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이슬람이 불편해지는 것. 

【Location】
(( Lebanon(헤즈볼라) - Syria(정부, 시아파) - Iraq(시아파 민병대) - Iran(정부)

(( Yemen(안사룰라 Ansarullah, 후티 반군)

ex: 후티는 그들 지도자의 가문 이름이다. 이들은 이란과 마찬가지로 같은 이슬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고, 자이디, 이스마일리도 있고 등. 예를들어 시리아 정부의 Shia파는 같은 종파는 아니지만, 예맨의 시아파도 같은 종파는 아니지만, 큰 의미에서 같은 Shia파이다. 


【참고자료】

1) 에스포지토(박현도, 송영은 공역), 『이슬람의 모든 것』, 바오, 2020.

2) John L. Esposito - What Everyone Needs to Know about Islam, Seco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1).

3) Marshall G. S. Hodgson, 『The Venture of Islam, Volume 1: The Classical Age of Isla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4) 박태식, 주원준, 박현도 공저, 『신학의 식탁』 (들녘, 2019).

5) 박현도 교수님의 이슬람교의 이해이슬람사 강의록을 참고 하였습니다.

6) [#中東史] 십자군 전쟁의 의미와 후대에 미친 영향, <Blogspot>, 2023-12-25,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2/blog-post_25.html>

7) [#中東史] 튀르크인과 이슬람사, <Blogspot>, 2023-12-21,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2/blog-post_21.html>

8) [#中東史] Shia파와 Sunni파의 분열 (Islamic history), <Blogspot>, 2023-11-07,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1/shia-sunni-islamic-history.html>

9) [#中東史] 이슬람(Islam)의 역사성, <Blogspot>, 2023-11-07,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1/blog-post_7.html>

10) 모로코 종교학자평의회 사무총장 Ahmed Abaddi 박사 초청 강연 -이슬람 극단주의 원인을 중심으로한 재요약-, <Blogspot>, 2023-09-26,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09/ahmed-abaddi.html>

11) [#中東史] 이슬람 사회에 끼친 서구의 영향, <Blogspot>, 2023-12-30,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2/blog-post_75.html>

10) [#中東史] 이란혁명이 가져온 변화, <Blogspot>, 2023-12-30, <https://decentpark-into-thevencera.blogspot.com/2023/12/blog-post_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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